레밍(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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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홍보대사를 ‘자발적’으로 지원한 직후, 담임교사는 그를 더이상 호출하지 않았다. 그 부분만으로도 자신의 선택에 흡족해하던 단유는 금요일 오전 조례가 끝난 직후, 다시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너 내일 축구부 시합에 나간다며?”
단유는 감독에게 들었던 약속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거뭇거뭇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다음 주에는 시(市)대회 수학경시대회 있는 거 알지? 그거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겠니? 만약 니가 시합 나가는 게 불편하다면 선생님이 가서 감독님께 이야기를 해주마.”
아직 조례가 끝나지 않은 교실이 많은지 복도는 한산했고, 조례가 끝난 단유네 반 아이들만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교실을 조용히 빠져나가 화장실 등으로 향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사실 수학경시대회도 경시대회지만, 더 문제는 다음 달에 있을 홍보대사 면접이잖냐? 만약 경기에 나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축구부 감독님과의 약속은 되도록 지키고 싶네요.”
“···알겠다. 하지만 되도록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물론 약속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선생님에 의해 통제받게 될 향후의 일상이 걱정돼서 조금 고집을 부리기로 마음을 먹었던 단유였다.
교무실로 향하는 선생님을 일별하고 자리로 돌아오니, 눈을 게슴츠레 뜨고 늘어져 있던 도하가 눈에 들어왔다.
“넌 더위도 다 지나갔는데 아직 그 모양이야?”
“관성이야.”
단유는 놀란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관성이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그 정도는 알아.”
도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지만 못내 뿌듯함이 얼굴에 묻어나고 있었다.
“요새 공부하니?”
“그건 아니고, 요즘 TV 보면 계속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뉴스?”
“예전에 돈 받은 사람이 또 돈 받는 게 관성이라고 하더라고.”
‘나 뉴스 보는 사람이야’라는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이는 도하였다.
“아.”
‘관행’을 ‘관성’으로 잘못 말한 도하였지만, 우연인지 상황에 적합한 표현이 되고 말아서 단유가 착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단유는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모처럼 뿌듯해하는 도하의 얼굴이 보기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고, ‘관성’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떠오른 단상에 몰두하느라 정정할 타이밍을 놓쳤다.
‘관성 모멘트.’
물체가 회전운동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을 의미한다. 단유가 가끔 바람을 이용한 능력을 사용할 때, 특히 회오리 같은 형태의 바람을 일으킬 때 반드시 연산해야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단일 질량의 물체면, 단순히 회전축에서 각 질점(質點)까지의 수직거리의 제곱에 질량을 곱하면 되지만, 이산적 질량인 경우, 즉 물체의 질량이 크기를 가지고 연속적으로 분포된 경우에는 적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바람을 일으킬 때는 공기의 질량을 계산하여 이에 응용한다. 공간의 좌표를 계산함과 동시에 해당 공간의 공기들을 역산하여 질량을 구하고 다시 이를 지정한 회전축에 맞춰 계산해야 회오리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는 바람에 대해서만 이 연산을 이용했는데, 만약 이를 응용하여 다른 곳에 쓰면 어떻게 될까? 도하는 실수로 ‘관행’을 ‘관성’으로 표현했지만, 우연히도 적절하게 들어맞았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처럼 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곳에 ‘바람’의 능력을 이용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응용해본다면 혹시나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물속에서 회오리를 만들 수도 있을 테고, 더 나아가 아예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물체도 회전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즉, 요지는 ‘회전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단유는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 즉시 노트를 펴고 당장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쏟아내며 정리를 시작했다. 연구과제가 정해졌으니, 남은 것은 파고들어서 답을 만들어내는 일만 남았다.
할 일은 많았다. 당장 관성 모멘트에 대해 새롭게 정리할 일도 있었고, 물체의 저항값을 구하기 위한 연산도 필요했다. 그리고 물체의 질량이라는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정의를 내리고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도 있었다. 단유는 다급함을 느끼며 빨리 이 아이디어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노트에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과 숫자들을 써 갈기는 단유를 보며 도하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관심을 끊었다. 방학 전에도 자주 보던 모습이니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 있을 수업 시간에도 단유는 오직 저 노트만을 보고 있겠지. 도하는 사각거리는 노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마치 ASMR을 듣는 것처럼 편안했다.
단유는 학교에 있는 내내, 심지어는 점심시간마저도 교실에서 노트를 붙잡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한 뒤에도 단유는 노트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적어나갔다.
그렇지만 그 연구 때문에 본래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거나 넘기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단유는 신문을 돌렸고, 조금은 짧아진 운동 시간이나마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명수와 함께 경기장으로 향했다. 지난번, 춘계대회와 같은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예선 경기는 비록 오후 2시부터지만 아침부터 나와서 가볍게 몸도 풀어야 하고, 전략을 듣고 익히는 시간 역시 필요한 관계로 아침을 먹자마자 나와야 했다.
경기장에는 검은 선글라스로 다크 서클을 가린 감독이 나와서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들 잘 잤나?”
“네!”
감독은 비장했고, 아이들은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춘추 대회를 휩쓸겠다는 야심은 비단 감독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총 2경기가 오전 오후로 펼쳐지는데, 첫 경기는 오전 10시부터였다. 그래서 경기장 관람석에 올라갔을 때, 몇몇 사람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고, 더러 반 팔 티셔츠만 입은 사람들은 쌀쌀한 기온에 팔을 비비며 열을 내고 있었다. 더위가 가시자마자 갑자기 서늘해진 아침 기온에 적응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우선 첫 경기 보면서 상대를 분석한다. 전반만 볼 거니까 자세히 보고 특히 자기 포지션에서 상대해야 할 선수들의 움직임을 모두 체크해라. 나중에 어느 팀이 상대가 될지 모르니까.”
강팀으로서의 여유랄까, 아니면 긴 안목에서 내린 결정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향후의 경기를 잘 풀어나가려면 상대를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단유는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곧 시작될 경기를 기다렸다.
“누나 오냐?”
명수가 옆에 앉더니 대뜸 그렇게 물었다.
“아니. 넌? 상미 와?”
‘상미가 왜 오냐’고 받아칠 거라 생각했는데, 명수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유가 돌아보자 명수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시간 맞춰 올 거야.”
“진짜?”
명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겠네?”
“좋긴. 부담되지.”
명수는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곧 시합이 시작되었다. 경기 초반 두 팀의 선수들은 몸이 덜 풀렸는지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의 선수들은 전체적으로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너희들은 저렇게 긴장하지 마라.”
감독이 진지하게 말할 정도로 선수들의 긴장도가 두드러졌다. 그 결과 위태위태하던 수비진이 결국 무너지면서 전반 5분 만에 골이 나왔다.
“에이 볼 거도 없네. 저 팀이 너무 못하는데요?”
“경기 결과가 중요한 게 아냐. 두 팀 중 한 팀과 우리가 붙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다들 집중해서 보도록. 나중에 확인할 거야.”
너무 이른 시간에 실점한 게 오히려 충격요법으로 작용한 것인지, 파란 유니폼의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아 만회 골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다소 지루한 공방전이 전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무리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고, 선수라 해도 아직은 나이가 어린 이들이기에 집중력이 오래가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후의 시합이 준비되어 있는 이들인데 남의 경기에 온 정신을 쏟을 수 있을까.
몇몇 아이들은 옆 사람과 잡담을 하면서 시합에서 눈을 떼기 시작했고, 감독 역시 무리하게 아이들을 다그치기 미안할 만큼 경기력이 떨어지는 시합이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보는 이들과 달리, 경기장 위의 아이들은 어찌나 필사적인지 실력과 기술의 부족을 오기와 끈기로 버텨내고 있었다. 거기에 운까지 더해진다면 감탄할 만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와아. 저걸 넣네.”
명수가 손뼉을 치며 파란 팀의 득점에 대해 감탄을 터뜨렸다. 솔직히 골이 나올 거라 예상을 못 한 부분이었는데, 여태 공 배달에만 집중하던 파란 팀 미드필더가 조금 먼 거리에서 슛을 쐈고, 마침 앞으로 나와 있던 골키퍼는 그 슛에 손도 대지 못했다. 펄쩍 뛰어오른 골키퍼의 장갑 위로 지나간 공은 아슬아슬하게 골포스트의 아래쪽을 맞고 굴절되면서 골망을 뒤흔들었다. 전반 종료 3분 전이었다.
그리고 1:1로 전반이 마무리된 상황에서 감독이 일어났다.
“더 보고 가면 안 돼요?”
아무리 지루했던 경기라도 전반이 이렇게 마무리되면, 후반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별거 아닌 경기력을 보일 거란 게 예상되지만, 또 방금의 슛처럼 예상 못 한 경기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하니까.
“우리 시합도 준비해야지. 다들 일어나.”
코치만 남아서 경기를 마저 보고 상대팀 분석을 하기로 한 뒤, 감독과 아이들은 관람석을 떠나 경기장 내부의 소강당으로 향했다. 선수대기실은 사용 못 하지만, 여기서 간단하게 오늘의 작전을 브리핑하고 몇 가지 점검을 하면 금방 시간이 흐를 것이다. 무엇보다 감독은 아이들의 멘탈을 점검하고 건강상태를 최종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코치가 돌아왔다. 아이들은 가장 먼저 시합결과를 물었다.
“다니엘중이 이겼다.”
파란팀의 역전승이란 말에 아이들이 아쉬움의 탄식을 했다. ‘끝까지 봤어야 했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분위기에서 코치의 말이 이어졌다.
“4:1로 이겼어.”
감독이 더 놀란 얼굴로 코치를 바라보았다.
“전략이 대단했어요. 전반에 뛰던 선수 중 3명을 과감히 교체하길래, 문제가 있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후반에 나온 3명이 괴물 같은 애들이었어요. 마치 걔들이 진짜 스타팅 멤버였단 듯이요.”
몸을 제대로 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했는데, 후반 3분 만에 1골을 얻으며 역전에 성공, 그리고 다시 8분경에 쐐기를 박나 싶었는데 이후에도 한 골을 더 넣으면서 결국 4:1 완승이라는 코치의 이야기였다.
“일단 그건 다음 경기니까, 나중에 비디오로 확인해보고 우린 오늘의 시합에 집중하자.”
감독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도 보고 들어서 알겠지만, 상대의 골이 나온 시간이 언제냐?”
감독의 의중을 파악한 아이들이 외쳤다.
“전후반 시작할 때요.”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잘 알겠지만, 경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그리고 전반 끝나기 5분 전과 후반 시작 후 5분이 가장 골이 나기 쉬운 시간이다. 뭐 때문이라고?”
“집중력이요.”
“너희들은 그런 실수, 절대 해선 안 될 거야. 단순히 골을 먹는 것으로 끝이 아냐. 한 골 먹을 때마다 충격이 얼마나 심한지, 겪어서 잘 알잖아. 그렇지?”
“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경험했기에 이 아이들은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같은 말로 너희들이 노려야 할 시간도 그 시간이다. 상대의 집중력이 떨어진 시간. 그 시간에 골을 넣어야 상대는 충격으로 비틀댈 것이니까. 알겠지?”
감독은 손뼉을 치고 둘러보았다.
“가자.”
마치 당장에라도 함성을 지르며 경기장으로 뛰어나가야 할 것 같은 감독의 멘트였지만 실상은 앞 팀이 비우고 간 대기실로 가서 짐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몸을 풀어야 했다.
장계중학교 축구부의 시합이 시작될 무렵, 벤치에 앉은 단유는 옆 사람이 건넨 수건을 받아 무릎 위에 걸쳐 놓고는 편한 자세로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긴장 안 되냐?”
옆에 앉은 2학년 동기가 물었다.
“긴장은 무슨. 내가 시합 뛸 것도 아닌데.”
동기는 사이드라인 근처까지 나가 있는 감독의 뒷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니가 나가면 좋을 텐데.”
“나보다 니가 나가서 뛰는 게 더 좋을걸?”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고. 아무래도 직접 뛰는 게 더 좋으니까, 축구부에 들어와서 축구화를 신고 경기장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단유가 경기에 나서면, 그래서 만약 골키퍼라도 한다면, 절대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소년은 판단했다. 그간 자신이 봐왔던 단유의 실력이라면 말이다.
곧 경기가 시작되었고,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후에 시작한 탓에 기온도 조금 올라서인지 아이들의 몸은 크게 굳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봄 대회의 경험치가 쌓여서인지 상대 팀보다 덜 긴장한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집중력이라는 부분은 그런 것과 별개로 쳐야 하나 보다.
“위험해! 수비! 수비 나와야지!”
전반 4분이 지났을 즈음에 벌써 감독은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상대 공격수 두 명이 수비진을 헤집고 들어오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막지 못해 뚫리고 말았다. 최종 수비수에게까지 도달한 시점에서 골키퍼가 각을 줄이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나오지 마! 들어가! 들어가!”
감독이 애타게 불렀다. 골키퍼의 정면으로 들어온 공격수 말고, 오른편에서 가운데로 달려드는 다른 공격수가 있었는데 골키퍼가 미처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가운데 녀석이 확실히 공을 찰 거라고 예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골키퍼의 시야가 좁아진 것은 분명했다.
상대 공격수는 최종 수비수와 골키퍼를 뚫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공을 옆으로 보냈다. 그제야 골키퍼가 다른 선수를 인식했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오른쪽 윙을 맡았던 선수의 왼발에 공이 걸렸다. 그리고 골키퍼도 힘껏 몸을 던졌다. 동시에 벤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