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97화 (397/956)

레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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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은 다 끝나신 건가요?”

“아, ···아니요. 잠깐 밖에, 편의점에 가려고요.”

“아, 그러시구나.”

종철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귓불을 만지작거리더니 씩, 웃음을 지었다.

“그럼 같이 갈까요?”

“네?”

“아니, 별 뜻이 있는 게 아니고요, 저도 마침 편의점에 가서 살 게 있어서요.”

나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종철이 뭘 살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은 지금 식사를 대신하려고 편의점에 가는 것이니 괜히 궁상맞은 모습을 들킬까 봐 염려된 탓이었다. 당당하게 ‘편의점에서 저녁 때우려고요’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건, 그저 부끄럽기 때문일 뿐이고.

“같이 가죠.”

마치 종철이 끌고 가는 양, 먼저 몸을 돌려 지하 연습실을 빠져나간다. 나윤은 주춤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라나섰다.

****

“더 안 해도 되겠냐?”

같이 뛰니까 재미있지 않았냐는 감독의 질문에 단유는 정중히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가볼 데도 있어요.”

“그러냐. 알았다.”

지금 단유를 붙잡아 부담감을 줄 필요는 없으리라. 어차피 토요일에 보면 되니까.

“수고했다.”

단유는 감독과 코치는 물론, 다른 축구부원들에게까지 정중하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답은 벤치를 지키고 있던 축구부 1학년 아이들에게서 나왔다. 더러 2, 3학년 선수들도 ‘수고했다’며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착한 아이들이었다. 질투와 시기가 있을지언정,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질투와 시기는 뒤끝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단유야.”

명수가 뛰어와 단유를 불러세웠다.

“왜?”

“집에 갈 거야? 나 오늘 좀 늦을지도 몰라.”

단유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감독과 코치에게 시선을 던졌다.

“연습 때문은 아니고, 애들이 같이 밥 먹고 가자고 해서.”

“아, 그래? 알았어. 그럼 오늘은 나 혼자 먹어야겠네.”

며칠 전부터 하은의 수업 시간표가 변동돼서, 아침에 늦게 출근하는 대신 퇴근을 늦게 하게 되었다.

“아니면 너도 같이 있을래?”

“아냐. 내가 끼면 이상하지.”

“뭐 어때? 너도 축구부인데.”

“이름만 올라간 거지, 축구부 아니다.”

명수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단유는 명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생각해보면 잘된 일이라고 봐도 되겠다. 어차피 오늘은 나윤을 잠시 보려고 했던 참이었으니, 이참에 나윤이랑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 될 거 같았다.

단유는 생각난 김에 물어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나윤은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걷던 종철이 뒤를 돌아보기에 나윤이 핸드폰을 가리켜 보였다.

“아, 통화하세요.”

종철은 신경 쓰지 말고 통화하라며 거리를 띄었다. 그 사이 핸드폰 액정의 발신자를 확인한 나윤은 가슴이 철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나야. 응? 아니 별일 없어. ···저녁?”

절로 나윤의 시선이 앞서있던 종철에게로 향하자, 종철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그래. 응. ···10분? 근처야? 알았어. 기다릴게.”

나윤은 핸드폰을 끊으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기대하지 않았던 남자친구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에 기뻤고, 그다음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적어도 나윤은 자신이 결코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남자친구 몰래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편의점을 가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쩐지 잘못된 행동을 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우선 이 상황을 먼저 정리해서 ‘오해’를 살 만한 일을 안 만드는 게 중요할 거 같았다.

“저기요.”

“네?”

종철이 나윤의 수줍은 부름에 성큼 다가왔다. 나윤은 한 발을 뒤로 빼면서 거리를 떨어뜨렸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경계였지만, 종철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요. 혼자 가셔야 할 거 같아요.”

“방금 전화?”

“네.”

종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남자친구예요?”

나윤은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회사의 누구도 나윤이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딱히 나윤에게 연애 금지라는 조항이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연예인에게 연애는 금지라는 분위기가 있어 차마 밝히기 어려웠다.

다만 이 조건이 연습생이라고 다르지는 않지만, 데뷔 조에 비하면 다소 약하게 통용되는 면이 있었고, 데뷔하기 전이라면 연애를 한다더라도 연습이나 레슨에 지장을 주지 않는 이상 회사에서도 크게 터치를 하지 않았다. 나윤이 연습생으로 있을 때도, 내부에서 몰래 연애하는 커플을 본 적이 있었다.

종철은 나윤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별로 안 좋은데.”

뭐가 안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윤은 회사에서 알면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좋아서 사귀게 되었는데, 이를 부정한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그럼 뭐, 나중에 또 보도록 해요, 우리.”

“네. 조심히 가세요.”

고작 편의점 가는 길이 험하면 얼마나 험할까. 나윤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대로 주워 삼긴 뒤에야 자신이 이상한 소리를 했음을 깨달았다.

종철은 별로 개의치 않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윤은 핸드폰을 가슴에 꼭 쥐고 다시 돌아섰다. 나윤이 회사 지하 계단으로 내려갈 때, 종철이 뒤를 돌아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편의점에 들렸던 종철은 담배 한 갑을 샀다. 노래와 춤을 연습하는 연습생에게 담배는 극독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미 입에 붙어버린 흡연 습관이 절로 담배에 손을 가게 만들었다. 처음 입사를 할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종철이었지만, 다른 기획사에 위탁 연습생으로 가 있었을 시기에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데뷔 조에 끼었다가 무산이 되는 등의 일을 겪으며 힘들어할 때, 같이 연습하던 동갑내기 친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따라 피우다가 결국 흡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후―.

깊게 들이마셨다가 하늘로 길게 뿜어낸 담배 연기가 편의점 간판 너머까지 올라가며 흩어졌다.

‘인생무상이라더니.’

이제 겨우 20살이 된 종철이 인생무상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재의 심정은 딱 그랬다.

데뷔를 위해 달려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자신감에 가득 찼던, 그래서 더 오만했던 날들이었다. 연습생으로 발탁이 될 때만 해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언제라도 데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이 그러하듯.

하지만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오기, 집념, 열정이 남들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다. 실력과 열정, 노력이 뒷받침해주니 곧 무대에 서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3년, 4년이 지나고 지금 이런 모습으로 담배를 꼬나물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종철은 나윤을 처음 보았을 때,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녀를 좋아했다. 연습생으로서 부럽고, 데뷔하지 못한 선배로서 질투도 나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기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포기하지 말자, 고 생각하면서 위탁을 끝내고 본래 회사로 돌아온 이유였다. 그녀와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아, 다시 데뷔의 꿈을 꾸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녀가 ‘남자친구’에 대해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 속에서 저도 모르는 어둠이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둠을 하얀 담배 연기에 섞어 하늘로 실어 보내려 했지만, 더 시커멓게 커져만 가는 감정에 종철은 담배를 바닥에 짓이겼다.

‘연애 따위.’

지금 이런 유치한 감정에 놀아날 틈이 없다고, 다시 시작하려고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종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나윤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뭐 하세요?”

단유가 맑은 웃음을 띠며 나윤을 보고 있었다.

“왔어? 너 씻고 왔니?”

“네. 축구부 연습 좀 하느라고요.”

“축구부? 축구부였어?”

“아뇨. 사정을 말하면 좀 긴데···.”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드릴게요.”

“그래.”

나윤은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가 돌아서서 보컬 연습실을 나가려는데, 나윤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단유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니, 나윤이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그를 연습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연습실 문까지 닫고 섰더니, 좁은 연습실이 금방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왜 그러세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남자친구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나윤 역시도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자신도 뭘 어쩌고 싶은 계획 따위는 없었다. 다만.

“잠시만.”

나윤은 단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손을 둘러 그의 등을 감쌀 뿐이었다. 정말 방금 씻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향긋한 바디워시 향이 났다. 뜨거운 햇살 아래 마른 듯한, 뽀송뽀송한 티셔츠의 질감마저 산뜻해서 마치 단유만 다른 계절에 있다 온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단유가 손을 들어 올려 나윤을 가볍게 안아주자, 포근함과 안락함이 느껴졌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의 배려는 따뜻했고 위로가 되었다.

잠시 후, 나윤이 단유에게서 떨어지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럴 땐 마치 단유가 큰 오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유 많이 좋아졌네.”

나윤이 히죽 웃으며 말하자 단유가 무슨 뜻이냐며 되물었다.

“예전 같으면 이것저것 막 물어보고 그랬을 텐데, 이제는 말없이 가만히 있어 줄 줄도 알고.”

아하, 단유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여자 친구분께서 계속 가르쳐 주신 덕택이죠. 이럴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어때요? 가르친 보람이 있어요?”

“너무 보람차서 벅찰 정도인데?”

“다행이네요.”

단유는 나윤의 손을 잡았다.

“가죠. 배 많이 고프다면서요?”

하지만 나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또 단유가 의아하게 바라보며, ‘이번엔 뭔가요?’라고 묻자, 나윤이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유를 본 순간부터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그냥 가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픈 나윤이었다.

단유의 목을 두 팔로 두르고, 까치발을 들더니 쪽, 단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얀 얼굴의 단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나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당황하는 모습을 보긴 했어도 얼굴이 붉어진 단유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상이야. 말 잘 들어서 주는 상.”

첫 입맞춤이라는 건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되리라.

“나가자.”

나윤이 먼저 연습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단유의 손을 붙잡고 끄는 손에 기백이 느껴졌다.

담배를 피운 뒤, 몸에 밴 담배 냄새가 옅어질 때까지 주변을 방황하던 종철이 회사로 돌아올 때, 걸음을 멈추고 회사 입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회사 입구에서 나오는 두 사람, 나윤과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를 보니, 눈에 익은 얼굴이라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곧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에서 봤던 소년임을 떠올렸다. 뮤직비디오에서는 키가 큰 줄 몰랐는데, 실제로는 나윤보다 10㎝는 더 커 보였다. 자신보다도 더 키가 클 것 같고, 덩치도 작지 않아 ‘듬직’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는 흔해 빠진 스타일이었지만, 소년의 몸이 워낙 좋은 탓인지 시쳇말로 ‘핏이 산다’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멋진 이의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나윤을 보니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종철아, 정신 차리자.’

눈을 감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망막 속에 새겨진 두 사람의 실루엣이 그의 결심을 뒤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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