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96화 (396/956)

레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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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올려진 조그만 미니 선풍기의 날개가 돌돌돌 돌아가면서 내는 바람이, 들이댄 얼굴에서 나오는 콧바람에 밀리는 기분이었다. 나윤은 좁은 보컬 연습실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신음을 내며 힘겹게 몸을 세웠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미칠 듯이 더워서 연습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더위도 없건만 어쩐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졌나?’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일 거라 생각하며 나윤은 구석에 놓인 텀블러를 집었다. 단유가 선물한 아이스 텀블러를 보며 기운을 얻을까 했지만 도리어 마음만 싱숭생숭해졌다. 물도 없었고.

연습실을 나와 복도로 향하니 마침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연습생들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연습생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 밥 먹고 오는 길이야?”

“네. 아까 연습 때문에 밥때를 놓쳤거든요.”

“열심이네. 수고해.”

“선배님도 수고하세요.”

기운찬 얼굴로 인사하는 이들을 위해 나윤이 좁은 복도의 벽으로 물러서며 먼저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를 외치며 얼른 나윤의 곁을 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 다시 정수기를 향해 가던 나윤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친구의 존재와 무관하게, 홀로 연습을 하는 이 순간이 외로웠다. 박 이사는 금방이라도 매치할 연습생을 데려올 것처럼 하더니,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어떤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나윤은 솔로 가수가 아니고, 솔로로 데뷔할 자신도 없었다. 그녀 자신의 역량을 키운다 한들, 지금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능력의 문제였다. 물론 회사에서도 솔로로 데뷔시킬 생각이 없음은 박 이사를 통해서도 들었고.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거론하기에 앞서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지금의 상황이 나윤은 외롭게 느껴졌다.

방금 지나간 아이들처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등을 두드려주는 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당연하게도 ‘수련’이 떠올랐다.

‘뭐 하고 있을까, 언니.’

솔직히 말해서 수련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유를 막론하고, 결과만 놓고 보자면 수련은 나윤을 ‘배신’한 셈이었다. 적어도 나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가끔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련을 떠올리면, 함께 연습할 때 그녀의 배려와 도움이 컸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연습생에 불과했을 때와 비교를 해도, 수련과 함께할 때 나윤은 ‘성장’을 했었으니까.

정수기의 파란 스티커가 붙은 냉수 출수구에 텀블러를 대고 물을 받으며 나윤은 생각에 잠겼다가 물이 넘치자 아차, 하며 얼른 물러섰다. 바닥에 흥건하게 쏟은 물을 보며 한숨을 내쉰 나윤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나윤이 고개를 돌리니, 남자 연습생 한 명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바닥과 나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아니요. 제가 할게요.”

나윤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종철이란 이름을 가진 그 남자 연습생은 나윤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나윤보다 일찍 회사에 들어왔다. 이전에 다른 기획사에 위탁 연습생으로 나가 있다가 데뷔가 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이였다.

나윤이 서둘러 대걸레를 가지러 가려 했는데, 그 전에 종철이 먼저 움직여 걸레를 가지고 왔다.

“볼일 보세요. 제가 이거 치우고 갈게요.”

“죄송해요.”

“아니요. 저도 정수기 쓰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렇게 말해도 미안한 마음에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바닥을 다 닦을 때까지 기다렸다. 얼추 다 닦은 듯 보였을 때, 나윤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제가 갖다 놓을게요.”

“괜찮은데.”

“주세요. 제가 할게요.”

종철이 무안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나윤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더 고마워요.”

나윤은 얼른 걸레를 들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려고 했다.

“저기요.”

“네?”

“선배님 이름이 정나윤 맞죠?”

선배님이란 호칭에 당황한 나윤은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선배님 무대 잘 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앞으로 기대 많이 할게요.”

“네? 네.”

종철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종이컵을 들고 연습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윤은 고개를 털어낸 뒤, 걸레를 제자리로 갖다 놓았다.

****

“심심하지?”

“네?”

갑자기 물어오는 통에 단유는 무슨 말인가 싶어 감독을 바라보았다.

“잠깐 서 볼래?”

연습하는 거 좀 보다 가라는 명수의 말에 그러겠노라, 하고는 그늘이 드리워진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던 단유를 유심히 바라보던 감독이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모르잖아?”

단유는 감독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이신지 시선을 피하지 않으셨다. 속으로 한숨을 쉰 단유는 운동장을 한 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킬 때 단유가 대답했다.

“제발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잠깐 정도는 괜찮겠죠?”

“10분 동안 명수만 막아봐라.”

물이 오른 건지, 명수는 연습시합 20분 동안 벌써 두 골을 넣었다.

“골키퍼요?”

“수비수. ···장훈아! 잠깐 와봐.”

중앙 수비를 맡고 있던 소년을 불러들인 감독은 그 자리를 단유에게 맡겼다.

“장훈이 넌 단유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서 배울 건 배우고, 잘못된 점은 눈에 담았다가 그런 실수를 똑같이 하지 않도록 해라.”

보는 것도 교육이고 연습이다, 라는 감독의 말에 장훈은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단유가 운동장으로 천천히 뛰어갔다.

“몸 좀 풀어야 하지 않을까?”

날 막으려면 힘들 텐데, 라고 웃는 명수에게 단유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널 막는데 몸을 풀어야 할까? 내가?”

다른 이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오직 명수에게만 격의 없이 보이는 단유의 능청이었다.

“너의 오만함을 오늘 부셔주마. 각오해라.”

“너야말로 반칙하면 지선이에게 이를 거다.”

“야, 그걸 왜 지선이한테 말해!”

“그럼 반칙하지 마.”

웃기는 놈이네, 라며 투덜대면서도 눈으로는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한 빛을 보이는 명수였다.

곧 명수가 중앙 지점에서 공을 잡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단유는 곁눈질로 주변 아이들의 위치를 확인한 뒤, 명수의 공격을 눈에 담았다. 명수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주변 아이들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큰 단유였기에 높이도 무시할 수 없고, 덩치나 힘으로도 감히 맞상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순간 속도에서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조금 더 빠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며 접근했다.

“수비가 몸을 너무 세우고 있는 거 아냐?”

말로 단유를 흔들어보려는지 명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단유는 대답 대신 명수를 지켜보며 방향을 가늠할 뿐이었다. 명수가 몸을 살짝 흔들며 보일 듯 말 듯 페인팅을 구사했으나, 단유는 우직하게 진로를 막아나가며 명수의 스피드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명수 역시 당장은 단유를 뚫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보지도 않고 옆으로 패스했다. 그리고 그 공을 사이드에서 따라오던 같은 편 동료가 받아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저건 아마도 약속된 플레이 중 하나이리라. 그보다도 명수와 팀 동료 간의 호흡이 꽤 좋았다.

단유는 흘러가는 공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감독도 명수를 막으라고 했지, 공격을 막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수비수라면 공격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적어도 명수를 막는 일만 하면 공격의 반 이상은 막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단유는 옆 선을 따라 올라가는 공격수를 막기 위해 지원을 나가는 대신, 명수를 따라 움직였다.

“나 따라오면 빈틈이 생길 텐데?”

명수의 말마따나, 명수의 움직임은 중앙에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공간으로 중앙 미드필더가 올라오면서 수비의 허점을 찔러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건 그쪽 사정이지.”

단유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다른 학교의 팀이었다면 곤란했으리라. 공간을 비게 만들어 상대 공격수가 올라오게 하는 것과 명수를 프리로 놔두게 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게 만들 테니까.

명수는 오프사이드를 피해가며 전진했고, 곧 사이드에서 올라오는 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에 앞서 단유가 높은 키로 공중을 선점했다. 단유의 머리에 맞은 공은 앞으로 튀어나갔다. 만약 단유가 좀 더 축구 스킬에 재능이 있었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뺐을 테지만, 그런 기술까지는 습득하지 않았기에 그저 공에 머리를 갖다 대고 명수에게로 가지 않게 하는 데까지가 단유의 최선이었다.

“잘해요.”

코치의 감탄에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격도 재능이야.”

만약 학교에 농구부라도 있었다면, 농구부에서도 탐낼 만한 인재였다. 저 덩치에 불구하고 느리지 않고, 운동신경도 좋은 편이니 기술만 있으면 어느 운동 분야에서든 두각을 드러낼 만하다고 감독은 생각했다.

“수비까지 검증을 했으니, 전천후인가?”

“그런 셈이네요.”

후보가 꼭 골키퍼만 하란 법은 없잖은가? 치밀한 전략과 세밀한 기술을 배우는 고교축구가 아닌 이상, 저 정도면 충분히 중학교 레벨에서 먹힐 만하다. 어느 포지션에 넣든 말이다.

“이번 추계대회가 기대되네요.”

감독 역시 모종의 루트로 이사회에서 나온 발언을 들었다. 이번 이사회는 학교의 위상을 올리는 일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난 춘계대회 우승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역시 예체능 계열에 대한 무시이거나 무관심일 것이다.

‘한 번이 모자라? 그럼 두 번 하면 되지.’

춘추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은 쉽게 따기 힘들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팀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이틀을 얻으면 감독 본인 역시도 새롭게 주목받게 될 것이다.

“감독님, 10분 지났는데요.”

장훈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배웠어?”

뭐라고 해야 할까?

“명수만 쫓아다니는 거요?”

“상대 에이스 선수를 붙잡아 두는 것도 좋은 전략이지.”

감독은 팔짱을 풀고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단유가 천천히 운동장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감독이 장훈에게 한 마디 더했다.

“하지만, 저렇게 무식하게 뛰어다니면 금방 지치고 말 테니까 따라 하진 말아라.”

중앙 센터 라인 부근까지 따라 나와서 명수를 졸졸 쫓아다니던 단유의 수비는 좀 과했다고 감독은 지적했다.

****

저녁 시간이 되기도 전에 나윤은 허기를 느꼈다. 점심때, 집에서 싸서 온 도시락의 양이 적기도 했고, 식욕이 없어 남기기까지 했던 탓이었다.

다른 연습생들이 있는 안무 연습실을 지켜보던 나윤은 갈등하다 이내 포기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가깝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연습생들이 먼저 자신과 거리를 두니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부터가 ‘쟤는 우리랑 달라’라는 시선을 보내는 마당인데, 먼저 다가가려 한들 ‘왜 저러지’라는 시선만 받을 거라 여겼다.

소심한 자신을 탓하며 연습실을 나오던 중에 나윤은 또 한 번 종철과 마주쳤다.

“연습 끝나셨나 봐요?”

나윤은 종철이 나오던 방향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옆방에 계셨어요?”

비록 방음시설이 된 보컬 연습실이라고 해도 옆방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아, 그냥 노래 듣고 있었어요.”

나윤은 듣는 것도 중요하지, 라고 생각하려다 순간 다른 의미를 깨달았다.

“제 노래요?”

“네. 죄송해요, 훔쳐 들어서.”

훔쳐 듣는 게 무슨 죄가 되겠느냐마는.

“별로 들을 것도 없는데.”

“아뇨. 공부 많이 됐어요. 사실, 제가 나윤씨 팬이거든요.”

“팬이요?”

종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위탁 연습생으로 비스(B.I.S Ent)에 있을 때요, 되게 힘들었어요. 데뷔조에 들었다가 무산되고 그래서. 아무튼, 내가 계속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나윤씨와 수련 선배가 한 팀이 돼서 나오는 걸 보게 됐어요. 수련 선배야 워낙 잘하시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윤씨 목소리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노래도 잘하시고.”

부끄러워서 몸을 돌리고만 싶은데 종철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손가락만 비틀 뿐이었다.

“뭐, 아무튼 그때 나윤 씨 목소리 듣고 위로가 많이 됐어요. 나윤 씨 팬으로서 응원도 하고. 음원 차트 오를 때는 마치 제 노래가 올라가는 것처럼 기분 좋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종철의 이야기에 답례한 나윤은 잠시 망설이다 곧 말을 이었다.

“종철···씨도 금방 데뷔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제 이름 아시네요?”

“네?”

나윤은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얼른 변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말이 빨라졌다.

“제가 이 회사 들어올 때, 선배님이 먼저 계셨었어요. 그래서, 그때 인사도 하고···.”

후배는 선배들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 그래서 외웠다, 는 내용인데 이 말을 하는 동안이 어찌나 부끄러운지 나윤은 눈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종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윤 씨한테 선배라고 들으니까 이상한데요? 먼저 데뷔하셨으니까, 나윤 씨가 선배죠.”

종철의 웃음소리에 귀까지 빨개진 나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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