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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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이사장이 된 장성웅 이사장은 교장을 찾아갔다.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됐습니다. 교장 선생님.”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년까지 무리 없이 이 자리를 지키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이었으니 장 이사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교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새로 마련된 교장실은 깨끗하지만, 마치 새 건물에서 나는 접착제 냄새가 옅게 맡아졌다. 교장실을 둘러보는 장 이사장의 눈치를 알아챈 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도배풀이 마르지도 않았나 봅니다.”
“뭘요, 깨끗하게 기품이 느껴지는데요. 교장실이란 거 아무래도 이 정도의 기품와 위엄은 있어야지요.”
어떤 기품과 위엄이란 말인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치레였으니까. 곧 교장은 이사장과 마주 앉아 차를 나누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임 이사장께서 운동장 환경 개선을 약속하셨다지요?”
“네. 그래서 적당한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그 문제는 곧 처리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사장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자유학기제 말인데요.”
“···예.”
교장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유학기제는 꽤 민감한 문제였다.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사안이라지만, 그 제도를 선택하는 것은 학교의 자율에 맡긴 바였고, 학생들의 성적이 우선이 돼야 할 사립학교의 특성상 자유학기제를 채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년부터 바로 시행이 되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상 상급자의 ‘명령’이나 다름없으니 싫어도 해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고, 고등학교 진학 후의 학생들의 적응도에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은 교장이 져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장 이사장이 선출되게 하려고 수를 먼저 쓴 것은 교장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채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홍보 모델 건은 문제없겠지요?”
“네. 학생 3명을 뽑는다고 하는데, 아마 그 3명 중에 무난히 뽑힐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행이군요.”
장 이사는 교장의 장담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야 그 학생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전국의 학생들 중 3명을 뽑는다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싶지만, 교장이 ‘뽑힌다’고 이야기하니까 걱정할 바가 없다. 이사장의 입장에서야 그 아이가 뽑히든 말든, 이제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만약 홍보 모델이 되지 못한다 하면, 그냥 교장을 바꾸면 되는 일이다. 비록 온건파의 라인을 붙잡고 자신이 선출되도록 돕긴 했지만, 전임 이사장의 라인이었던 사람이니 여차하면 바꿔도 마음에 걸릴 일은 없을 것이다.
교장도 장담을 할 만한 근거는 있었다. 당장에 그 아이가 보여준 성적이 그랬고, 여러 선생님에게서 들은 증언들이 근거가 되었다. 연예계 활동을 한 이력도 판단의 근거가 되었지만, 가장 큰 근거는 역시 그 아이의 뒤에 있는 ‘연성’이란 그림자였다.
교장은 작년 폭력 사건 당시, ‘연성 재단’의 부장 직함을 맡고 있던 여자에게 연락을 받았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홍보 모델이 되겠다고 하면, 연성 측에서도 도움을 주리라.’
그래서 교장은 담임을 비롯한 몇몇 선생님들에게 ‘설득’을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한편, 교장의 ‘착각’을 모르는 담임 선생님은 지시를 따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단유를 설득했다. 틈이 나는 대로 단유를 불러 ‘자발적’으로 홍보 모델이 되고 싶게끔 설득을 하는 담임의 노력은, 결국 성공했다.
“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담임은 무척 기뻐했다.
“니가 이 학교를 살리는 거야!”
기쁜 나머지 너무 나갔다.
“살리다뇨?”
“아니, 그러니까 니가 이 학교의 체면을 세워줬다 이 이야기지. 아무튼, 잘 생각했어.”
단유가 승낙한 이유 중 하나는 담임 때문이었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저자세로 단유를 설득하려는 담임의 태도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라, 굳이 ‘군사부일체’를 지키려는 마음이 아니더라도 미안해서 더는 거절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니가 자라서 돌아보면 다 추억이고 경험이 될 거다.”
단유는 그런 추억 따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드러나지 않으려 하는데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일들이 생기니, 그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단유의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위촉’ 프로젝트는 학교 차원에서 진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자유학기제 채택과 시행에 관련된 서류가 작성되어 교육부에 올려짐과 동시에 홍보 모델 지원까지 착착 진행되니, 당장에 단유가 할 것은 별로 없었다. 있다면, ‘수학 경시대회’ 준비 정도나 될까?
“홍보대사 후보 지원서에 쓸 이력 정도는 만들어야지.”
라는 이유였지만, 승민은 교장의 말을 단유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오빠, 이거 더 먹어.”
“아이고, 우리 지선이가 단유 보더만 살아나네, 살아나.”
지선의 병문안을 이유로 승민의 집을 찾은 단유와 명수였다. 병원에서는 감기라고 하지만, 열이 너무 높아서 이틀 정도 응급실에서 지내기도 했었다. 지선이 퇴원한 이후에야 승민의 집을 찾게 된 두 사람은 혈색이 좋지 않은 지선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반기는 지선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지선아, 단유 얘 임자 있어.”
명수가 초 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자 지선이 명수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무식한 오빠는 왜 왔어? 그냥 떡이나 먹어.”
명수는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그러니까 나 오기 싫었다니까? 얘가 날 끌고 와서 온 거지, 내가 너 같은 애 보고 싶을 거 같아?”
“그럼 오지 말든지. 줏대 없이 끌려다니냐?”
“와, 이게 오빠를 무시하네? 야, 나도 오빠야?”
“흥.”
실은 명수가 지선의 소식을 듣고 가장 안타깝게 여겼다. 지선을 보기 전까지 ‘지선이 많이 아프면 어떡하지’를 연발하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막상 지선을 보더니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지선 역시도 단유와 명수가 오기 전까지, ‘단유 오빠, 명수 오빠 언제 와’라고 아빠, 엄마를 닦달해 놓고선, 지금은 명수에게 먼저 시비를 걸며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러니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에 미소가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 승민이 단유에게 물었다.
“준비는 잘하고 있나?”
승민이 말하는 공부란 경시대회를 말함이었다.
“네. 집에서 선생님이랑 기출문제 풀어보면서 하고 있어요.”
“그래, 서울대 수학과 나온 선생님이라고 했제? 그라믄 내보다 더 잘 가르키겠네.”
“요즘 선생님이 되게 피곤해하세요. 보통은 학원 마치고 돌아오면 피곤해서 바로 주무시는데, 요즘은 얘랑 거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느라고요.”
명수의 증언에 승민이 미소를 지었고, 곁에 있던 승민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 선생님이란 분이 참 수고가 많네요. 전에 보니까 그 선생님 예쁘기도 하시던데, 마음도 참 착하시고.”
“우리 선생님이 정말 착하고 예쁘시죠. 누구랑 다르게.”
명수가 시선을 흘깃 던지자, 냉큼 받아먹는 지선이었다.
“누구랑 달라? 누구?”
“누구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냐?”
“그럼 왜 날 쳐다봐? 기분 나쁘게?”
“왜? 찔리냐?”
“찔리긴 누가 찔린다고 그래?”
“흥, 찔리니까 그러는 거 다 안다?”
“웃기지 마라, 시커먼 오빠야. 얼굴만 시커먼 게 아니라 속도 시커먼 오빠네.”
“내 속이 시커먼지 하얀지 어떻게 아냐?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 봐도 안다. 옛날에 나 죽이겠다고 쫓아올 때부터 알았다.”
“아놔. 내가 죽이긴 또 뭘 죽인다고 그래! 다른 사람 오해한다고!”
“흥, 오해 아니다, 뭐.”
두 사람의 만담에 또 한 번 웃음꽃이 피었다.
****
홍보대사 후보 등록 마감일은 9월 25일이었지만, 교내 경시대회는 9월 22일이었다. 본래는 더 늦게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홍보대사 이력서에 ‘교내 경시대회 1등’이라는 한 줄이라도 첨가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시행한 일이었다. 학교의 입장에서는 다행히,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단유가 1등을 했다.
“이제 시(市)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만 거두고 오면 되겠네.”
비록 시대회 성적은 올리지 못하겠지만, 향후 면접을 볼 때라도 언급할 기회가 온다면 분명 좋은 점수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장은 결과지를 받아들고 웃음을 지었다.
“만약 전국 대회까지 나가서 성적을 거둔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낙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경시대회 문제라는 게, 일반 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에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전교 1등이라 한들, 중학교 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수준에서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성적이라고 한다면, 경시대회는 수학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야만 가능한 수준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전교 석차에 들어가는 아이들이라도 경시대회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했다.
“뭐, 그건 그 아이에게 달린 일이니 우리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요.”
교장은 여전히 입술을 말아 올린 채로 결재 서류에 결재를 했다. 그리고 앞에 선 교감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학교 홍보 모델 건 말인데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내년 신입생 요강 홍보 자료에 쓸 모델로도 쓰자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나온 바 있었다.
“며칠 뒤 정기 이사회 때 나올 안건이긴 합니다만, 교감 선생님도 알아두시면 좋을 거 같아 말씀드릴게요.”
교장은 흐뭇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아마, 새 교복을 지정할 거 같아요.”
역시나. 교감은 속내를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돈 나올 구멍은 일부러 찾아 만드는 승냥이 같은 일족들이니, 교복 따위야 예상 가능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새 교복 업체를 알아보는데, 교감 선생님이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제가요?”
말인즉슨, 떨어지는 콩고물 나눠주겠다는 소리?
“빨리 지정해야 내년 홍보자료에도 쓰고, 학부모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교감은 흔쾌히 대답했다. 비록 학기가 시작된 지 겨우 한 달인 데다 이사회 교체 등의 문제로 어수선했던 탓에 업무가 밀려있는 형편이지만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 나가실 때 이거 가지고 가세요. 이번에 이사장님이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고 가신 선물입니다.”
책상 위에 올려둔 고급 차 한 세트를 가리킨 교장은, 마치 자신이 선물을 주는 것인 양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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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경시대회를 마친 직후, 이제 2주 뒤 있을 시(市)대회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려던 단유는 또 어디론 가로 불려갔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되지?”
명수와 나란히 걷던 중, 명수가 물었다.
“시간은 되지.”
“잘됐네.”
명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명수와 함께 간 자리에는 축구부 감독이 언제나와 같이 굳은 인상을 지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된대요.”
“잘됐네.”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에 추계대회 예선전이 있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자리만 지켜다오.”
“경기는 안 나가는 거죠?”
“···원칙적으로는.”
뭔가 여운이 느껴지는 대답에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 역시 무안했던지 슬쩍 고개를 비틀어 시선을 피했다.
“불상사만 없다면, 나갈 필요가 없지. 후보일 뿐인데.”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는 그저 단유와 같이 시합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싱글벙글이니, 그 기대감을 짓밟기도 미안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감독은 돌아서서 몸을 풀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네. 더위가 많이 풀려서 말이야.”
“뭐 그것도 다행이고, 니가 도와준다는 것도 다행이고.”
명수는 손뼉을 치더니 좋은 아이디어가 났다는 듯 말했다.
“누나도 오라 그래라. 여자 친구 응원을 받으면 더 기운 나지 않을까?”
“나 시합 안 나가는데?”
“혹시 모르잖아? 그리고 시합 끝나고 데이트하면 좋잖아? 얼마나 좋아? 축구장에서 경기를 보며 데이트라니!”
아마도 명수는 그런 로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너도 상미 불러.”
“어? 상미를 왜?”
“요새 둘이 잘 붙어 다니더구먼?”
“뭘 붙어 다녔다고 그래? 늘 똑같이 집에서 게임만 하는데.”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을 젓는 명수를 보다 단유는 그만 놀리기로 했다.
“알았다. 그리고 누난 안돼.”
“왜?”
“바쁘니까.”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중일 테다. 생각난 김에 잠깐 들러볼까? 단유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명수도 생각에 잠겼다.
‘부르면 오려나?’
예전에는 그냥 생각 없이 초대했었는데, 괜히 단유의 말 때문에 심란해진 명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