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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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체력이 넘쳐나는 중학생도 아닌바, 결국 제풀에 지쳐 사그라들 즈음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바깥이 더운 탓에 나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마주 앉아 불편한 얼굴들과 기 싸움을 하려니 결국 못 이기는 쪽이 회의실 밖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나갔다. 어쩌면 그저 흡연을 위해 나간 것일지도.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모였을 때, 목살이 귀 옆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헛기침을 했다. 또 저 양반이 무슨 흰소리나 하려고 저러나 싶어 파란 넥타이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다들 진정이 좀 된 거 같으니, 이제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발전이요? 그럼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다 헛소리랍니까? 정당한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무슨 발전입니까?”
역시 전투적인 파란 넥타이라 생각하며, 목살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박 이사님. 계속 이러시면 기껏 마련한 긴급 이사회 현안은 다 챙기지 못하고 맙니다. 지난여름 내내, 구멍 난 이사회 조직 하나 챙기지 못했으면서 무슨 재단을 챙기고 학교를 챙기냐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조금만 침착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이야깁니다.”
파란 넥타이는 장 이사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그 속을 누가 모를까 봐 번드레한 말로 얼렁뚱땅 넘기려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목살이 나름 준비를 했는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이 줄곧 내세웠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학교의 실추된 명예입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그 점을 먼저 해결하고 나머지를 이야기하면 되겠죠?”
파란 넥타이를 비롯한 개혁파는 목살, 장 이사의 느긋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은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자유학기제에 대해선 들어보았을 겁니다. 전면시행이 된 지 꽤 됐지만 이를 채택한 학교가 많지 않은 까닭에 교육부에서 자유학기제 홍보하기 위한 홍보대사를 위촉할 예정이랍니다.”
목살은 영문을 모르는 이들을 둘러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여유를 부렸다.
“뭐, 사실 자유학기제 찬반논란이나 연예인 누가 홍보대사에 위촉된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우리랑 상관이 없고, 중요한 건 이겁니다. 향후 1년간 자유학기제 홈페이지와 SNS 등에 얼굴을 알릴 홍보모델을 각 중학교에서 공모전을 통해 선발한다는 이야기죠.”
파란 넥타이, 박 이사는 장 이사의 속셈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쉬는 시간에 잠시 나갔다 들어오더니 웬 서류 한 장을 손에 들고 나타나길래 뭔가 했었더니 이런 꼼수를 준비해 온 것이다.
“이 정도라면 지역 사회 한정으로 학교의 위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전국구급으로 학교의 이름을 알릴 기회도 되겠죠? 또 하나는 조금 이르지만, 학교 자체 광고 이야기입니다. 본래는 10월 정기 이사회 때 나눌 이야기지만, 이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자면 내년 새 학기 신입생 모집 때 쓸 학교 홍보 자료와 관련된 것인데, 우수한 학생을 내세워 학교를 홍보한다면 박 이사님이 걱정하시는 부분은 거의 해소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박 이사는 코웃음을 치며 장 이사의 말을 받았다.
“고작 홍보 모델 정도로 학교의 위신이 서겠습니까?”
하지만 장 이사는 박 이사의 반박을 자르고 대답했다.
“그럼요. 고작 홍보모델이지만, 무려 전국구급입니다. 당연히 박 이사님이 말씀하신 SNS상에서 활발하게 활동도 할 테고요.”
“하지만 그것도 우리 학교 학생이 꼭 홍보모델이 될 거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장 이사는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 학생 아십니까?”
박 이사는 그제야 장 이사가 들고 있던 서류가 사실 어떤 학생의 이력이 학생 기록부 사본임을 알았다.
“누굽니까?”
박 이사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록부를 보여주며 물었다. 자신이 교원도 아니고, 이 학생이 자신의 친척쯤 되는 것도 아니라면 일개 중학생을 자신이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일개 중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박 이사의 옆줄에 앉았던 사람 중 한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이 학생이요?”
“아세요?”
“네. 이 학생이 작년 그 폭력 사건 당시 인터넷에 동영상이 올랐던 아이 아닙니까?”
박 이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장 이사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장 이사님! 폭력이나 휘두르는 아이를 홍보모델로 내보내잔 말입니까?”
하지만 장 이사는 미소를 지은 채로 여유를 부렸다. 대답 역시 장 이사가 아닌 박 이사 옆의 사람이 알려주었다.
“그런 게 아니고, 당시 싸움을 적극적으로 말리던 학생이라고 소개된 학생입니다.”
물론 처음에야 ‘폭력설’이 먼저 퍼지긴 했지만, 이후 정확한 내용이 정정되면서 한때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화제가 박 이사의 관심 사항은 아니었던지 얼굴을 봐도 알지 못했다.
“흠, 어쨌든, 박 이사님? 좀 더 자세히 기록부를 살펴보시지요.”
박 이사는 조그만 사진 밑에 기록된 학생의 성적 등을 보다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전교 1등?”
“그렇죠. 단 한 번 전교 3등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입학부터 지금까지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란 겁니다. 게다가 실제 외모도 괜찮아서 모델 활동을 하기도 했다더군요.”
어릴 때 이야기지만 기록부에는 ‘도서관 홍보모델’ 이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유명 연예인과 같이 음반 활동도 했다더군요.”
정확히는 뮤직비디오에 ‘참여’를 했을 뿐이고, 음원을 내기는 했지만 ‘공식 활동’은 없는 이벤트성의 활동이었을 뿐이다.
“그럼 연예인이란 말이잖아요?”
학교에 연예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만약 연예인과 같은 화제성 인물이 학교에 있다면 벌써 보고가 올라왔었을 테니 말이다. 학교 홍보가 아니라 재단 홍보에도 이용했을 것이고.
“연예인은 아니랍니다. 뭐, 아무튼 이런 이력을 가진 친구이니 꽤 경쟁력이 있지요? 또 설령 떨어지더라도,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SNS를 이용하여 학교 자체 홍보모델로 이용할 가치가 있지요. 내년이면 3학년이니, 신입생들의 롤모델로 홍보해도 좋고요.”
흐뭇한 미소를 짓는 장 이사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기세등등한 눈빛을 보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10월 정기 이사회 안건인 내년 신입생 홍보 자료 건까지 꺼낸 것이리라.
“좋은 생각이십니다만, 겨우 그 정도로 학교의 위신이 채워지리라고는···.”
박 이사의 반발은 힘을 잃었다.
“아직 한 학기 남았지만, 무려 2년 내내 전교 1등입니다. 홍보 자료상에 기술할 내용으로 압도적이죠. 게다가 교사들에게 물어보니 이 아이가 여간 똑똑한 게 아니라더군요. 특히 수학 선생님의 칭찬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마 수학경시대회 같은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하던데요? 마침 올 가을에 있을 수학경시대회에 맞춰 교내 경시대회를 열 거라죠? 만약 이 학생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만 한다면, 꽤 기대해 볼만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결국 학교의 위신이란 뭐니 뭐니 해도 우수한 학생을 배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봄 중등부 축구대회 우승으로 예체능계의 우수함을 드러냈다면, 이번 가을은 수학경시대회 우승자 배출로 주목을 받고, 이어서 교육부 산하 자유학기제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활동한다면, 학교의 위상?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박 이사는 장 이사의 제안에 두 가지를 잃었다. 한 가지는 자신을 위시한 개혁파가 내세운 명분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장 이사 개인의 발언력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개혁파 내부에서 박 이사의 위치가 소폭 하락하는 결과도 있을 것 같았다.
회의실에서 나름 격렬했던 논쟁은 장 이사의 ‘제안’과 보수파의 안정적 지원 덕에 일단은 보수파의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온건적 개혁을 약속하며 장 이사가 차기 이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두꺼운 목살이 더 두꺼워지겠지, 라고 박 이사는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며칠 후,
“단유야, 종례 마치고 교무실로 따라올래?”
담임 선생님은 단유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꺼냈다.
“홍보모델이요?”
단유는 이상하게도 홍보모델과 같은 이런 활동 쪽으로 연계되는 게 신기했다. 특히나 자신을 크게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요즘인데, 나윤네 회사나 학교에서나 이런 식으로 제안이 들어오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싫은데요.”
단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얼굴이 드러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요.”
담임은 단유가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일을 언급했다.
“그때는 그냥 돕고 싶었던 마음에서 했던 거였어요.”
“그럼 이번엔 우리 학교를 돕는 게 어떻겠니? 나중에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그러니까 니가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니 뒤에는 늘 ‘장계 중학교’ 출신이란 꼬리표가 붙을 거다. 이왕이면 장계 중학교란 이름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학교라면 너에게도 좋지 않겠니? 그런 차원에서 니가 이 학교의 이름을 떨칠 수 있게 해준다면 윈윈(win-win)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떠니?”
딱히 선생님의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간절함은 단유의 예상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육부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여주며 설득을 계속했다.
“여기 보면 홍보모델 공모전이라고 되어 있지? 그 말은 니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일단 여긴 경험 삼아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
“경험 삼아서요?”
“그래. 진짜는 내년 신입생들을 위해 제작될 학교 홍보 자료 모델이야. 사실 니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잖니? 담임으로서 그 점이 매우 뿌듯하다만. 아무튼, 니가 학교 홍보모델이 되어 우리 학교를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써줬으면 싶구나.”
본래라면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릴 이유가 없는 담임이었고, 예상도 못 했었다.
“정 선생. 꼭 설득하세요.”
라고, 교감 선생님이 따로 불러서 담임에게 지시했고,
“정 선생, 부탁해요.”
라고, 장 이사가 학교 밖에서 따로 부탁할 정도였다. 위기감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온 단유의 단호한 거절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심 곤란해 하면서도 단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만, 미처 단유가 이렇게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담임선생님이었기에, 단유를 설득할 말을 찾지 못해 어영부영했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을 못했다. 딱히 단유를 유인할 만한 이야기가 없었으니까.
“학교 홍보 팸플릿이랑 SNS에 모델로 나서는 거야. 그 외는 딱히 활동이 없으니까 너 공부하는 데도 방해가 되지 않을걸?”
어쩌면 단유가 홍보모델로 나서기를 꺼리는 것은 지난해 겪었다던 SNS 소동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진이야 그런 쪽으로 관심이 없어 몰랐는지 몰라도, 학생과 학교에서는 꽤 큰 사건이었고, 대부분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그 일이 전개된 과정과 마무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때 일로 SNS 등에 자신의 얼굴이 팔리는 걸 꺼리는지도 몰라.’
만약 그런 이유라면, 담임은 어떤 유인책을 써야 할까?
“생각해보고 결정할게요.”
단유는, 그저 곤란해 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본 후,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대답을 미뤘다. 그게 차라리 선생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 자신에게 조언해 줄 조언자들이 단유에겐 많았다.
「해 봐. 괜찮을 거 같은데?」
라고 나윤이 통화로 이야기해 주었고,
“그걸 왜 하니? 다 쓸모없는 짓이야. 그리고 자유학기제? 웃기고 있네. 자유학기제를 하기 전에 우선 교육 시스템 전체를 바꿔야지. 오히려 자유학기제를 선택한 학교의 학생들에게 불리한 점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라며 시사상식을 뽐내던 하은의 반대가 있었다.
“돈 준대?”
“소정의 지원금, 이라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게 다 이력 아냐? 너 이력서 걱정했었잖아? 이런 활동 있으면 이력서에 쓰기 좋은 거 아냐?”
만약 연예 활동이나 그런 계열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라면 모를까,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경우라면 홍보 모델의 이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지?
“수학 경시 대회 있는 거 알제?”
“네.”
“···잘 해라이, 응?.”
수학 선생님은 경시대회 출전을 권했다. 단유는 어차피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 크게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수학 선생님이 자신을 응원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야 했다. 지나가던 교감 선생님의 눈초리도 특별해 보였고, 아침저녁으로 단유를 부르는 선생님도 특별해 보였다.
일련의 흐름이 단유에게 계속 어느 쪽으로 몰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유는 창밖을 보며 언제 더위가 한풀 꺾일 것인지, 그저 지켜보고만 싶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