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89화 (389/956)

지금, 우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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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단유 배웅하고 올게.”

말릴 새도 없이 현관을 빠져나가는 나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어머니는 식탁 위에 올려진 잔들을 치우며 생각에 잠겼다.

끝까지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그저 어린 애들의 소꿉장난 같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컸다. 출신을 떠나 반듯한 인상과 예의 바른 언동에 살짝 마음을 놓은 이유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이들의 만남을 반길 수만은 없는 건, 역시 딸의 미래가 걸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의 연애에서 손해를 보는 건 주로 여자 쪽, 이라는 어머니의 생각이 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딸의 직장 문제로 한동안 힘들었는데, 이제는 딸의 연애 문제로 또 오랫동안 마음을 졸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부모인 게 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그동안 딸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을 뿐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것.”

만약 단유가 나윤과 나이가 같거나 많았다면?

‘차라리 그랬으면 듬직한 마음에 더 예뻐했을 거야.’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며 고무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어땠어?”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윤은 단유에게 붙어서 궁금하다는 얼굴로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좋으신 분 같았어요.”

“그래? 무섭진 않았고?”

“무서워요? 왜요?”

‘그러게? 우리 엄마가 무서울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윤은 변명처럼 대꾸했다.

“여자친구 어머니 보면 무섭, 다고들 하니까 너도 그런가 해서.”

“아뇨.”

밥도 챙겨주시고,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배려도 해주신 분이 왜 무섭겠냐는 단유의 말에 나윤은 히죽 웃으며 단유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앞뒤로 크게 흔들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발을 통통 튕기듯 걸어갔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어느새 해가 저물어 어둑해져 있었다. 다만 근처의 재래시장의 환한 불빛들 때문에 오히려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장을 보는 사람들로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그렇고. 비록 모자를 쓰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알아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알아보더라도 상관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지금 나윤은 마음이 들떠있었다.

“들어가세요.”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발걸음만큼이나 통통 튀는 나윤의 목소리에 흥겨움이 묻어있었다.

“집에 어머니 기다리시잖아요.”

나윤은 걸음을 멈추고 단유를 흘겨보았다. 왜 좋은 기분 망치려 드냐고 핀잔 주려는 듯.

“나랑 같이 있기 싫어? 나 몰래 딴 데라도 가려고?”

피식, 단유는 웃으며 나윤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가끔 나윤이 이런 투정을 부리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알았어요. 같이 있어요.”

비록 날이 덥지만, 단유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더 세게 쥐여주니 그만큼 자신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았다.

“아, 오늘 뭐 했어? 문자도 늦게 보내고, 전화도 안 받고.”

단유는 오후에 있었던 ‘번역능력인정시험’에 대해 말했다.

“그런 시험도 있어?”

“네. 그냥 호기심에 지원해 봤어요.”

자기 또래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더란 이야기. 시험 시작 전까지 요약집과 노트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사람들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 시험이 끝나고 아쉬워하던 사람의 표정과 후련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윤은 별세계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냥 즐거워하며 단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 영어도 되게 잘하는구나? 못 하는 게 없네?”

“못 하는 게 왜 없겠어요? 못 하는 것도 많아요.”

“뭘 못하는데?”

“···아, 저 요리 못 해요.”

단유가 끓였던 맛 없는 라면을 먹고 인상을 찌푸리던 하은과 명수의 반응을 설명하자 나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요리는 못 하지만, 라면은 잘 끓여. 아, 아쉽다. 오늘 엄마가 늦게 왔으면 내가 라면 끓여 주려고 했었는데.”

손가락을 튕기며 많이 아쉽다, 고 눈치 보는 나윤의 모습에 단유가 미소를 머금고 제안했다.

“아쉽네요. 다음에 끓여주세요.”

“그럴래?”

순간 나윤의 머릿속에 ‘라면 먹고 갈래’라는 명문장이 스치고 지나갔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얼른 다른 화제로 돌렸다.

“내일 뭐 해?”

“내일요? 뭐, 평소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신문 배달하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신문 배달 힘들지 않아?”

“아뇨, 별로요. 오히려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좋던데요.”

“너무 시간 뺏기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엄마 말대로 공부하기 바쁜데 엉뚱한데 시간 뺏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나윤의 입장에서 단유의 성적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해서 고백도 했고, 사귀고는 있지만, 자기 때문에 단유의 성적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결코 마음이 편하지는 못하리라.

“아까 누나 교과서 보니까 깨끗하던데요?”

“야!”

단유의 장난스런 농담에 짐짓 삐진 척하며 단유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던 나윤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번역도 할 정도면 영어 듣기나 말하기도 잘해?”

“음, 뭐 어렵진 않게 하는 것 같아요.”

원어민 수준, 이라는 비교 개념을 떠나 그냥 원어민이나 마찬가지인 언어니까.

“그럼 나 영어 회화 가르쳐 줄래?”

“회화요?”

“솔직히 수학 같은 것까지 너한테 배우면 너무 자존심 상할 것 같고, 영어는 어차피 회사에서 가르치는 과목이기도 한데, 너한테 배우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음, 그게 쉬울지 모르겠네요. 누굴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지만, 단유의 언어 구사 능력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맞춰 변환되는 능력이어서 본인이 자의적으로 제어하며 구사하는 게 쉽지 않았었다. 그나마 영어는 오랜 학습에 의해 자의적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게 가능했지만, 오늘 일본에서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와 같이 상대가 일본어를 사용해야 단유도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은, 게임으로 치면 패시브 능력과도 같았다. 그래서 만약 상대가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단유가 능숙하게 영어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어로만 대화를 한다면 맞춰줄 수는 있는데, 대신 뭘 가르치거나 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좋다면, 한번 해보죠.”

“그래. 만약 하다가 힘들면 관두지 뭐.”

영어로 하든, 한국어로 하든, 단유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는 게 중요하지. 나윤의 속셈을 알 리 없는 단유는 그저 나윤이 공부에 대한 욕심이 없진 않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아직까진 여자의 속마음을 쉽게 파악할 정도로 능통하지 못한 단유였다.

버스정류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단유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착하면 전화해.”

“그럴게요.”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우리 엄마 앞에서 멋있는 모습 보여줘서 고맙고.”

“멋있었어요?”

나윤은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며 대답을 대신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봐줘서.”

“그렇게 봐준 게 아니고 넌 원래 멋져. 내가 괜히 반했겠니?”

“오늘따라 많이 업이 되신 것 같은데요?”

“그래? 나도 모르겠어. 오늘 되게 기분이 안 좋았었는데, 너 때문에 꿀꿀했던 기분이 싹 다 날아갔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버스가 앞에 서고, 단유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손 놓기 싫다.”

나윤이 끝까지 단유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단유의 미소를 보며 배웅한 나윤은 차가 출발하고 사라질 때까지도 버스 정류장에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차가 사라진 뒤, 곧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라보기를 한참, 나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확실히 연애가 서툴러.”

이럴 때, 단유가 먼저 ‘심쿵’할 만한 메시지를 보내주길 바라는 마음은 아마도 이기적인 거겠지.

그때, 기적적으로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책상 위에 선물 두고 왔어요.」

‘선물?’

나윤은 얼른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부서져라, 열고 들어오는 나윤을 향해 어머니가 좀 조용히 다니라고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책상을 보는 순간, 나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생일이나, ‘만난 지 100일’ 같은 특별한 기념일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해줬다는 사실이 나윤을 기쁘게 했다.

나윤의 책상에 놓인 것은 들꽃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들꽃들이 신문지에 돌돌 말린 채 놓여 있었는데, 들꽃의 끝이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걸 보면 아마도 직접 꺾어 모은 꽃 같았다.

‘예쁘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아니란 점에서 신기하고 예뻤다. 꽃의 출처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사실 더 궁금한 점은 따로 있었다.

‘이걸 어디다 숨겨두고 있었던 거지?’

줄곧 같이 있었는데, 이런 선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곧 나윤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 그런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직접 만든 거야? 아까 안 들고 있었잖아? 어디에 숨겨뒀던 거야?」

문득 꽃을 보던 나윤은 꽃을 싸고 있던 신문지가 우리나라 신문지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어?”

그때 문자가 들어왔다.

「비밀이에요.」

그리고 끝이었다. 갑자기 호기심 수치가 상승하면서 이것저것 캐묻고 싶은 마음이 오븐 속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

「뭐야? 뭐야? 말해줘~」

한껏 애교 섞인 문자를 보내놓고 부끄러워하는 타이밍에 답장이 왔다.

「비밀은 비밀로 둬야 신비로운 법이죠.」

역시, 이 남자. 신비로움이 가득한 남자다. 나윤은 단유답다, 고 생각하며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의 문자 대화는 끝이 날 줄 몰랐다.

****

단유의 방학은 그의 말처럼 평상시와 같이 흘러갔다. 아침에 하던 신문 배달은 결국 한 달을 넘어 방학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크게 만족한 보급소장이 가능하면 방학 끝나고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할 정도였다.

“내가 몇만 원 더 붙여주마.”

신중하게 고려하겠다며 보급소를 나선 단유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공원에 들러 운동을 했다.

“왔어? 오늘도 일찍 끝났나 보네?”

명수랑 상미가 등을 맞대고 스트레칭을 하던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단유가 신문 배달을 한다는 사실만 알지, 몇 부나 돌리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다만 신문 배달을 일찍 끝내고도 힘이 남아돌아서 공원에 온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했을 뿐이었다.

“진짜 니가 운동선수를 했으면, 다른 애들은 운동 접어야 했을 거야.”

라는 명수의 말에 상미가 격하게 공감했다.

“내가 공부를 접은 이유가 그거랑 비슷해. 저런 애들이 공부하는데 내가 어떻게 의욕을 가지겠어.”

“그거랑은 다른 문제 아니냐? 게다가 넌 여중이고, 우린 남중인데?”

“시비거냐?”

상미가 이를 갈며 노려보자 명수는 딴청을 피우며 스트레칭하는 척을 했다.

“연애 사업은 잘 돼 가고?”

“그게 무슨 사업이야?”

단유의 고지식한 답변에 상미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애랑 사귀는 언니가 불쌍하지.”

“넌 또 왜 시비냐?”

명수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상미를 몰아붙이자 역시 매서운 눈으로 명수를 째려보았다.

“잘 사귀고 있어.”

“그래, 그래. 보기 좋네.”

명수는 입술을 삐죽이며 상미와 단유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도 갈 거지?”

“응.”

단유는 매일 나윤의 회사로 갔다. 핑계는 나윤의 영어 회화를 돕기 위함이었지만, 사실은 오후의 시간을 빼서 ‘장거리 외출’을 시도하는 단유의 알리바이였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가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가보고 싶었지만, 몇몇 제약이 걸려 가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한국은 여름이라서 단유의 복장도 반소매에 가벼운 면바지가 기본 복장이었는데, 이 복장으로 러시아를 돌아다닌다면, 추위는 고사하고 누군들 이상하게 보지 않을 리 없었다. 미국의 경우는 날씨와 상관없이 너무 멀어서 아직 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몇 차례 시도해본 바에 의하면 대략 10분 정도면 단유의 집중력이 거의 바닥을 내보였다. 보통의 공부라면, 책을 읽고 학습하는 수준에서는 한 시간 넘게 집중할 수 있지만, 정밀한 연산을 거쳐 자신이 이동해야 하는 곳의 ‘공간적 위상’을 계산해는 일은 일반적인 집중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래도 가까운(?) 중국이나 멀리 인도와 터키까지는 갈 수 있었다. 터키에서 잠시 쉬었다가 좀 무리해서 유럽을 가볼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시도해봐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볼까?’

운동을 하면서 하루의 스케줄을 구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단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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