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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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을 찾고 있던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먹었···니?”
아직도 관계가 서먹해서인지 말을 맺을 때가 어색한 어머니였다.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저녁 먹을래?”
“제가 같이 해도 괜찮은가요?”
“그럼. 괜찮지.”
단유의 되물음에 대답한 것은 어머니가 아닌 나윤이었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의 뻔뻔함에 돌아온 것은 어머니의 날 선 질타였다.
“넌 좀!”
비 맞은 강아지 꼴로 눈꼬리를 내리고 입을 다무는 나윤의 모습에 단유는 실소를 머금으며 나윤의 어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사이 식탁에 마주 앉은 나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괜찮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걸요?”
나윤은 만약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렇게 태평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웠다. 물론 단유에게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단유의 보호자라 할 수 있는 하은을 만나지 않은 상태. 비록 하은이 단유의 어머니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그래서 어려움이 느껴질 상대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하은을 직접 만나게 되면 또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었고.
“기집애가 저녁 준비하는 것도 안 돕고···.”
라는 중얼거림이 들린 듯해서 나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려. 맛있는 거 해줄게.”
“네.”
나윤이―이미 편해 보이는 상태였지만―더 편하게 기다리라는 의미로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을 훔쳐본 어머니가 혀를 찼다.
“지가 하지도 않으면서, 말은···.”
“엄마!”
나윤은 괜한 부끄러움에 벌컥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뭐 도와주면 돼?”
어머니가 칼을 세게 움켜쥐셨다.
“···그냥 식탁에 수저나 올려놔.”
“다른 건 할 거 없어?”
“그냥 가서 기다려, 이것아.”
‘진짜 내 딸이지만 창피하다’고 속으로 되뇌며 어머니는 채소를 채를 썰고 볶음 요리를 준비하셨다.
잠시 후, 다시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또다시 찾아온 어색함을 애써 누르며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잘 먹어.”
‘잘 먹을 나이니까’라며 바라보는데, 단유는 어머니가 정성 들여 요리한 채소볶음을 입에 오물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맛있네요. 채소가 신선해요.”
“그래? 입에 맞아?”
“네. 간이 적당해서 먹기가 좋은 데요?”
예전, 보육원 시절부터 단유의 먹방은 유명했다. 천천히 음식을 곱씹으며 먹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단유가 맛을 음미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어떤 음식이길래 저렇게 맛있게 먹을까 궁금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만든 사람으로서 그 맛을 제대로 느끼고 먹어주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을 정도.
“우리 엄마, 요리 잘하지? 내가 말했었나? 우리 엄마가 조리사 자격증이 있거든? 그래서 요리 되게 잘해.”
“쓸데없는 소리! 밥이나 먹어.”
나윤도 단유와 밥을 자주 먹었기에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다 여겼지만, 새삼 단유의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저렇게 정성 들여 먹으니 고맙지 않을 리 없었다.
“밥 더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사실 입이 길지 않아서 많이 먹진 않거든요.”
“덩치만 보면 두 그릇도 먹겠구만.”
“엄마, 얘가 매일 새벽마다 운동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몸이 좋아.”
엄마 앞에서 남자 친구 몸 좋다고 자랑하는 딸의 꼴이 어찌나 꼴불견인지. 어머니는 다시 한번 눈으로 딸을 질책했다.
‘적당히 해라, 이것아!’
‘뭐, 어때서?’
이제는 막가자는 건지, 아니면 단유가 실수 한 번 안 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덩달아 용기가 난 건지, 나윤도 어머니의 눈짓에 쉽게 기가 죽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다시 티타임을 가지게 된 세 사람. 어머니가 진중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니, 또 할 말을 찾아 머리를 굴리는 나윤과 평소처럼 편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어머니의 시선을 마주하는 단유였다.
‘어린 애가 기가 세네’라고 생각하며 어머니는 단유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아시니?”
나윤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첫 질문부터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저기, 있잖아? 엄마?”
“부모님이 안 계세요.”
나윤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단유의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안 계셔?”
집에 안 계시다는 건지, 아예 없다는 뜻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데, 단유가 ‘고아예요’라는 말에 어머니는 살짝 어지럼증이 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아’는 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제가 고아라는 게 마음에 많이 걸리시나 봐요?”
단유의 돌직구에 어머니는 당황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혹시라도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지어낸 표정이 어린 소년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최근에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력서를 몇 장 쓸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이력서마다 가족관계를 쓰는 칸이 있더라고요. 그때마다 궁금했죠. 왜 가족 구성 여부가 일을 함에 있어 영향을 주는 것인지 말이죠.”
당장 어머니가 생각나는 핑계는 ‘부모가 없는 아이는 삐뚤어지기 쉽다’는 편견과 ‘아무래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지 않겠냐’는 동어반복적인 선입견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당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가 그랬다.
“하지만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이 저에게 어떤 약점 같은 걸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죠.”
“우리 나윤이도 아빠가 없지만, 잘 컸잖니?”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해서 널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니란다’라는 뜻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한다는 말이 고작 이렇다. 어머니는 자신이 많이 당황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단유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맑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누나, 착하고 밝잖아요?”
“그렇니?”
“네.”
어머니는 이때 단유의 표정과 말을 들으며 딸이 이 어린 소년에게 반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되짚어봐도 그랬지만, 이 소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꾸며진, 혹은 만들어진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비록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저런 태도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의아심을 품을망정, 저 미소가 만들어진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라는 것을 어머니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몇 마디 말 역시도 억지로 꾸며진 칭찬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니 귀에만 이로운 말이 아니라 가슴을 잔잔하게 울리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사실 아줌마가 마음에 걸리는 건, 넌 아직 중학생이고 학업에 정진해야 할 시기 아니니? 엄마 같은 마음으로 보자면, 아직 연애는 이르다고 보는데.”
“엄마!”
나윤은 끝내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어머니의 말을 막으려 했다.
“정히 두 사람이 좋다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나는 게 어떻겠니? 솔직히 나윤이 너도 지금 연애하면서 다른 곳에 시간을 쓸 때는 아니잖아? 안 그래? 불과 며칠 전에 너 엄마한테 뭐라고 그랬어? 컴백 때까지 연습실에서 나오지 않을 각오로 살겠다고, 그랬지? 그런데 지금 연애한다고 정신이 나뉘면 어떻게 집중을 하고 연습을 해?”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다. 자식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험한 시간도 버티며 뒷바라지했고, 잠깐 방황의 시간을 거치기도 했지만 다시 정(正) 궤도에 올라 길을 가겠다 했는데, 당연히 이런 일탈(?)은 어머니의 입장에서 막고 보는 것이었다.
단유에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야 어린 남자아이가 연상에다가 연예인이기도 한 여자에게 욕정(!) 혹은 동경을 품고 접근한 것을 순진한 딸 아이가 거절하지 못해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용납할 생각은 없었고, 만약 자신이 이 소년의 어머니라면 당연히 공부 잘하고 모범생 같은 소년이 연애라는 일탈을 하게 놔두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걱정은 잘 알겠습니다.”
단유는 얼굴을 붉힌 나윤을 대신해 대답했다. 잠시 뜸을 들여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 차라리 내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모습, 이라고 어머니가 생각할 때 단유의 입이 열렸다.
“저도 사실 연애라는 일이 제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하기 전에는 사실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나윤이 눈을 부라리며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는 어머니만을 바라보았다.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만큼의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네요.”
“어떤 도움이 있었다는 건데?”
“일단 제가 너무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어요.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공부만 하던 제게 더 많은 욕심과 상상을 펼치게 해주었죠.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찾아보게 해주었고···.”
뒷말을 생략한 것은 단유 개인의 능력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으니, 말 줄임의 여운이 듣는 어머니와 나윤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의문이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딱히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는 여겨지지 않아요. 오히려 누나의 기운과 응원이 제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줬고, 그래서 더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저 역시도 누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나의 지친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사람. 힘들고 지칠 때 옆에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연애는,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면, 그런 일을 해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는 반쯤 얼이 나간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아이를 누가 중학생이라고 볼까? 아니 요즘 학생들이 워낙 조숙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런 이야기를 마치 대본을 준비한 사람 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읊을 수 있는 걸까? 하마터면 나윤에게 ‘연기자 지망생’이냐고 물을 뻔했다.
그때 나윤을 살피니, 나윤의 눈에 하트가 수만 개는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라보는 자리라 차마 움직이지 못할 뿐, 당장에라도 단유를 껴안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니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어머니였다.
“에구, 이것아.”
어머니는 나윤의 이마를 향해 검지 손가락을 날렸다.
“아야! 왜!”
“니가 얘만큼 철이 들었으면 내가 이런 걱정도 안 했을 거다.”
“엄마!”
“왜, 남자 친구 앞에서 흉보니까 부끄럽냐?”
“아이, 참.”
투덜거리려던 나윤이 입을 다물었다. 눈치를 슥 보더니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확인을 요구했다.
“그럼 우리, 이래도 사귀어도 돼? 찬성? 콜?”
“찬성 같은 소리하네. 진짜 걱정이다. 니가 얘를 망쳐 놓을까 봐 걱정이야.”
나윤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찬성은 아니야. 더 솔직히 말하면, 그래, 연애는 나중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또 요즘 시대가 시대니만큼, 이런 연애도 유행이겠거니 생각하니까, 일단 지켜볼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지킬 건 지켜가면서 만나. 괜히 어른 흉내 낸답시고 허튼짓하면 안 된다.”
“아, 정말! 엄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고 그래!”
“니가 걱정이라고, 니가!”
두 모녀의 정겨운 모습에 단유는 또 한 번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인사를 하는 단유의 눈이 참 맑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그냥 편하게 단유라고 부를 테니까, 자주 놀러 오고 그래.”
“네.”
“그리고, 음, 앞으로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어머니, 요?”
여자 친구 어머니도 어머니잖아, 라는 나윤의 지원 사격에 단유는 조금 낯선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나윤의 어머니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나윤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단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가, 어머니의 눈총에 얼른 손을 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