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87화 (387/956)

지금, 우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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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한국의 풍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즐겼다. 한국처럼 높지 않은 산과 푸른 하늘, 청량한 시골의 한적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군데군데 금이 가고 깨진 부분은 있지만 대체로 깔끔하게 그린 듯이 정리된 포장도로와 푸른 햇볕 일렁이는 논두렁을 따라 걷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가옥 구조도 한국과 달라 이질적인 이국의 환경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 이런 재미가 있구나.’

라는 걸, 단유도 느꼈다. 그동안 너무 좁은 곳에서만 생활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인 공간 위로 유난히 넓은 하늘의 광활함이 모처럼 단유의 눈을 탁 트이게 하니 그동안 쫓기듯 살았던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누나랑 이곳에 오면 좋겠다.’

피식, 미소를 머금은 단유는 자기 속에 나윤이 이렇게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이유라니.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솔직하게 다가오는 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더군다나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뭐가 이상할까?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감상을 정리했다.

‘또 다음에 오지 뭐.’

나중에 책을 들고 여기에 와서 공부하면 왠지 잘 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남들이 독서실 갈 때, 자신은 공기 좋고 조용한 이곳에서, 남들 방해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책을 읽어야 할까, 라는 물음은 단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단유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곳까지 오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은 듯했다. 정확하게 시간을 재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체감상 그 정도 걸린 것 같으니, 어쩌면 좀 더 무리해서 더 멀리 가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여기에서 동쪽으로 가는 건 무리이리라. 태평양을 건넌다는 건 아직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단유는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노인이 가르쳐 준 ‘나가이 시’로 ‘이동’했다.

****

나윤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6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여름이라 해가 긴 탓에 주변은 여전히 밝았지만, 피곤함은 어느 때보다 심했다. 아마도 마음고생을 한 탓이라 생각하며, 나윤은 차에서 내렸다.

“수고했고, 월요일에 보자.”

“네.”

광석은 다시 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지친 얼굴의 나윤은 얼른 집에 들어가서 씻고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누나?”

“어?”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돌아본 나윤은 맑게 웃고 있는 단유를 발견했다.

“단유야? 나 기다린 거야?”

“아니면 뭐 때문에 여기 있었겠어요? 당연히 누나 기다린 거죠.”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나윤의 다리를 재촉했고,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단유를 껴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성의 힘은 생각보다 강해서 껴안기 직전, ‘집 앞이야, 이 년아!’라는 경고를 듣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기껏 달려간 나윤은 단유 앞에서 쭈뼛대며 주위의 시선을 살폈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나 지금 막 차에서 내려서 엉망인데.”

“별로. 오히려 무대 행사용이라 그런지 화사한데요?”

“화장 뜨지 않았어? 너무 오래 차에 있었단 말이야.”

“괜찮아요. 정 마음에 걸리면 씻고 나올래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윤은 잠시 갈등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상태가 무대 행사를 위해 꾸며진 모습이라 씻고 나온다면 이보다 예쁘게 보이진 않을 것 같았으니까. 또 한편으로는 새벽부터 지금까지, 거의 차 안에만 있었고 행사 이후 씻지도 못했으니 아무래도 땀 냄새도 좀 나고 그럴 것 같았다. 피곤하고 냄새나는 꼴로 남자친구 앞에 있고 싶지 않았으니, 고민을 끝낸 나윤은 결국 씻고 나오는 것을 선택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릴래? 금방 씻고 나올게.”

“그래요.”

나윤은 돌아섰다가 우뚝 멈췄다. 생각해보니 비록 6시라 해도 날이 덥긴 마찬가지인데, 밖에 세워두는 것도 나쁜 짓이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남자를 집 안에 끌어들이는 것도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고. 또 한 번의 갈등과 솔로몬의 지혜를 필요로 하던 나윤은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에···들어가서 기다릴래?”

“그럴까요?”

이 남자,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워서 다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진 나윤은 어색한 얼굴로 단유를 초대했다.

“잠깐만.”

집에 들어가 혹시나 집 안이 어질러져 있지는 않은지 살폈으나, 다행히도 집안은 깨끗했다. 어머니는 아직 오직 않은 듯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오시려면 조금 더 걸릴 테니, 빨리 씻고 나오면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고 외출을 감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려.”

“누나 방에서요?”

“···그래.”

“음, 깨끗하네요. 누구에 비하면.”

“누구?”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했다.

“선생님이요. 저희 선생님 아침에 출근하고 나면 방이 꽤 어지럽혀져 있더라고요. 치워주려고 했더니 자기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해서, 손 안 대고 있는 형편이거든요.”

단유의 말에 나윤은 얼굴을 붉혔다가 얼른 옷가지 몇 개를 챙겼다.

“내 것도 손대지 말고, 그냥 여기 앉아 있어.”

“책은 읽어봐도 되죠?”

“읽을 만한 책이 없을 거 같은데?”

“왜요? 여기 이렇게 책이 많은데.”

단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책장이 있었고, 그곳에는 몇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아니 읽을 시간이 없어 내버려 둔 지라 잊고 있었던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저 책들이 저곳을 벗어난 게 언제였더라.

“그래, 그럼 읽고 있어. 대신 다른 건 보면 안 돼.”

“네.”

단유는 옅은 미소를 베어 물고 고개를 돌려 이내 자신이 읽을 만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속에서 올라왔다.

‘남자 친구를 방안에 끌어들이다니.’

게다가 그 남자가 자신이 늘 자는 침대 옆에 서서 책장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은밀한 곳까지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나윤은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나윤이 욕실로 들어간 뒤에도 단유는 책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고, 곧 적당한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책들은 주로 자기계발 서적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사실 그런 책들은 단유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좋은 내용인 건 맞지만,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서 계도하려는 목적이 강한 성향을 드러내거나, 혹은 너무 작가 개인의 경험에 기준한 편향성이 강한 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밖에 오래된 소설책도 있었고, 시집도 있었지만, 단유가 고른 책은 고등학교 교과서였다. 물리, 수학, 사회 기타 여러 가지 교과서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요즘 고등학생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공부를 하는지를 살폈다. 5년 전, 기웅의 교과서를 빌려 읽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솔직히 지식도 짧았고 학교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던 때여서 눈으로 봐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수준에 오르기도 한데다 상위 교육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 책을 집어 든 단유였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을 나온 나윤은 들고 갔던 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뭐해?”

“책 보죠.”

“왜 그걸 봐.”

나윤은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이 누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나 봐’라는 생각을 할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책, 깨끗하지?”

“그렇네요. 조심해서 봤나 봐요.”

단유의 말에 놀리는 듯한 기색은 없었지만, 더 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됐어. 그만 봐. 창피해.”

창피하다는데 고집해서 볼 이유는 없었다. 단유가 책을 덮고 나윤을 바라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머리 말려야 하죠?”

“응?”

“제가 말려 드릴까요?”

“니가?”

나윤의 얼굴에 토마토 터져 물든 것 같은 홍조가 떠올랐다.

“드라이기 어디 있어요?”

“진짜 하게?”

“싫어요?”

싫긴. 로망인데.

단유에게 드라이기를 들려주고 화장대 앞에 앉은 나윤은 거울을 통해 뒤에 선 단유를 훔쳐보았다. 키가 큰 단유여서 얼굴이 다 보이진 않았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과 ‘남자다움’이 느껴지는 턱의 보일 듯 말 듯 한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너무 뜨거우면 말씀하세요.”

“으응.”

곧 자신의 심장 두근대는 소리를 감쳐줄 정도의 소음이 울리며 머리카락 끝에 바람이 와 닿았다. 나윤의 긴 머리 아래를 한 손으로 받치고 그 위로 거리를 두어 드라이기를 가볍게 흔들며 바람을 보내는 단유를 훔쳐보며 즐거움을 느낄 때였다.

‘어쩐지 바람이 시원한 거 같은데?’

분명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이 느껴지지만, 그 가운데 시원함이 드문드문 느껴지는 기현상은 본인의 착각인가 싶었다. 어쩌면 남자 친구가 머리를 말려주는, 마치 드라마 같은 상황 때문에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단유는 집중해서 자신의 머리를 말려주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머리 말려준 적 있어?”

“아니요. 왜요?”

“너무 잘하는 것 같아서.”

“칭찬이죠? 고마워요. 그래도 실수하면 말해요. 뜨거운 바람이 머리카락에 좋지 않다는데, 실수해서 머릿결 상하면 안 되잖아요.”

글쎄다. 지금이 좋아서 감히 방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윤은 속내를 감추고 이 로맨틱한 상황을 즐겼다.

한편 단유는 꽤 즐겁게 머리를 말려주었다. ‘바람’을 드라이기의 바람 사이에 불게 해서 드라이기의 열기를 중화시킬 뿐만 아니라, 적당한 세기의 바람을 조종해서 젖은 머리가 말라가는 느낌을 손으로 느끼는 재미가 있었다. 또, 간간이 거울을 통해 살피니 기분 좋아서 웃고 있는 나윤을 보면, 또 즐거웠다.

“다 됐어요. 한 번 봐요.”

“너무 좋은데? 이렇게 편하게 머리를 말리니까, 마치 샵에 온 거 같아.”

“그래요?”

“고마워.”

“별말씀을.”

“다음에 또 부탁하면 해 줄 거야?”

“그럼요. 뭐 별거라고요.”

나윤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선물로 뭐 줄까?”

“선물이요?”

“이렇게 좋은 서비스도 받았는데,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글쎄요?”

아무거나 말해봐. 아무거나. 콩닥거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나윤은 다시 고개를 돌린 후, 로션을 바르는 척하며 단유를 훔쳐보았다.

잠시 궁리하던 단유가 입을 열려는 찰나, 현관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헛바람을 들이킨 나윤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을 때, 지친 얼굴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써 와 있었네? 행사는 잘···.”

“왔어? 엄마?”

어머니가 딸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이상을 못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면 나윤의 오산이었다. 그리고 나윤이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리고 어머니가 현관에 놓인 신발 들 중 낯선 남성의 신발을 찾기도 전에, 단유가 방에서 나오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얼음이 된 모녀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

“남자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에 생소한 감정이 실려 있음을 느낀 나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그게··· 사실은 빨리 말하려고 했는데···.”

나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잘못한 일도 아닌데, 괜히 어머니에게 일찍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죄를 지은 것만 같고, 또 연하의 남자 친구라는 사실이 어머니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킬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좌불안석이었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동갑?”

과연 어머니가 보기에도 단유의 얼굴은 어려 보였나 보다. 단유는 앞에 놓인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15살입니다.”

어머니는 앞에 놓인 잔을 만지작거리다 나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가수가 되겠다고 공부도 내팽개치고 연습에 매진한다더니, 고작 나가서 하는 짓이 연애냐?’라고 따지는 눈빛이었다.

“엄마, 얘 기억 안 나? 우리, 가디스R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앤데.”

기껏 생각해낸 게 단유의 출연 경력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시 단유를 돌아보더니 놀란 눈으로 가볍게 탁자를 내리쳤다.

“아, 맞네.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그때 뮤직비디오에 나오던 잘생긴 친구가 이 친구였구나. 그래서···그때부터 사귄 거야?”

“응? 아니, 그건 아니고. 사귄 건 얼마 안 됐어.”

어머니라고 이 상황이 편할 리 없다. 딸의 얼굴이 당황에 물들어 있음은 이해를 하겠는데, 정작 남자 친구라는 저 아이는 너무 편안한 얼굴이지 않은가? 너무 어려서 철이 없는 걸까?

“15살이면 중학생이지?”

“네. 장계중학교 다니고 있고, 이제 중학교 2학년입니다.”

그때 또 하나 자랑할 만한 게 생각난 나윤이었다.

“엄마, 얘 공부 되게 잘해. 전교 1등이다?”

어머니는 한심한 눈으로 나윤을 바라보았다. 기가 죽은 나윤이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피할 때, 어머니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연애하면 방해가 안 되겠어···요?”

“방해는 안 됩니다. 남는 시간에 공부해도 충분히 시간이 남거든요.”

어쩐지 재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누구 딸내미는 남는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아예 접은 마당이니까.

‘하긴 중학교랑 고등학교는 다르니까, 중학교에서 전교 1등 쯤이야.’

정작 자기 딸이 중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 없었다.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네? 응? 아, 그, 그래요. 천천히 말 놓지, 뭐.”

하긴 15살이면 자기 딸보다 4살이나 어린데 말을 높이는 것도 우습다. ‘4살’이라는 나이 차를 떠올리는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서로 나이 차가 너무 나는 거 아닐까?”

‘하필 연애를 해도 어떻게 이렇게 어린 애랑 연애한다고···’라는 질타의 시선이 나윤에게 꽂혔다.

나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 남자가 비록 어리지만, 훌륭한 남자 친구란 사실을 어필해야 돼.’

나윤은 필사적으로 단유를 변호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 단유는 오랜만에 마시는 오렌지 주스의 맛을 음미하며 편안한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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