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86화 (386/956)

출구는 어디인가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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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당황한 기색이 핸드폰을 통해서 느껴져서 순간 나윤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이내 정색을 한 나윤은 좀 더 단유를 곤란하게 만들기로 했다. 딱히 악의가 있어 그런 거라기보다는, 평소의 단유와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장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쩌면 나윤은 단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울했던 기분이 풀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넌 여자친구가 힘들다는데 그런 이야기밖에 못 하니?”

과연 단유는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어, 저기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요?]

땡.

“꼭 말을 해야만 하니?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두 번째 문제. 내 마음, 알겠어?

[어,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니까 잘 모르겠어요.]

땡땡땡. 너무 안 좋은 대답인데?

“나한테 듣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게 너잖아? 그런데도 몰라?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니?”

세 번째 문제. 관심 있어?

[관심은 있죠.]

정말?

“얼마나? 매일 내 생각하니?”

이건 보너스 문제. 잘만 대답하면 앞에 거 다 용서해준다.

[···그럼요.]

뭐냐?

“뭐야? 그 뜸 들임은? 왜 바로 대답 못 해?”

용서해주고 싶어도 용서해줄 수 없는 ‘타이밍’이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매일 통화를 하는데 생각을 하냐고 물으니까 혹시 달리 대답해야 할 말이 있는 걸까 궁리하느라 그랬어요.]

“그럼 통화 안 할 때는 내 생각 안 해?”

또 잠깐의 뜸 들임. 이 남자 뭐지? 라고 나윤이 미간을 찌푸릴 때, 단유의 대답이 나왔다.

[누난 내 생각 많이 해요?]

어라? 날 뭘로 보고?

“그럼 당연하지! 네 생각 매일 하고, 한순간도 네 생각 안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나서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부끄럽네요.]

“왜 네가 부끄러운데?”

[매번 고백을 받기만 하는 거 같아서요.]

내 마음도 똑같아, 이 녀석아!

[누나.]

“응?”

[저도 누나 좋아해요. 많이.]

“······.”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유는 평소에도 대화를 나눌 때면 화려한 수식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밋밋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단유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고, 하더라도 꼭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니, 가슴에 쿡 박힌다.

이번에도 단유는 나윤의 심장을 정조준하여 피할 수 없는 치명타를 날렸다.

[보고 싶어요.]

“···나도 보고 싶어.”

[올라오면 연락해요. 바로 보러 갈 테니까.]

“알았어.”

몇 마디 사소한 이야기가 오간 뒤 통화를 마쳤다. 끝난 뒤에야 나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보고 싶다’는 단유의 달콤한 한 마디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오늘 뭐 했는지, 어떤 일을 보고 들었는지를 묻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잘못이었다. 괜히 투정부리고 억지 부리고 싶어 했던 욕심 때문이니까 누굴 탓하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굴었던 자신의 머리를 쿵쿵 쥐어박을 뿐이었다.

“괜찮아?”

커피 두 잔을 들고 온 광석이 자해 중인 나윤을 보며 걱정스런 기색을 비쳤다.

“괜찮아요.”

“자, 이거라도 마셔.”

“고맙습니다.”

시원한 커피를 손에 쥐니 열이 식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 괜찮지? 뭐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샀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커피 좋아해요.”

나윤은 커피를 입에 머금고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광석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광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풀 죽어 있던 나윤이 어떤 계기로 기운을 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보고하기도 좋아졌고.

“뭐 먹을래? 아니면 그냥 갈까?”

“그냥 가요. 빨리 가서 쉬었으면 좋겠어요.”

빨리 서울로 가고 싶었다.

****

단유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렸다. 통화로는 상대와의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단순한 언어 전달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몸짓과 표정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단유였다.

갑자기 전화를 하는 통에 텅 빈 시험장에 홀로 남았던 단유는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곧 ‘이동’을 사용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오후 수업이 있던 하은은 학원에 있을 것이고, 지선이와 명수도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외출을 한 모양이었다.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에 누워있던 호빵만 달려와 단유를 반겼다. 마실 물을 챙겨주고 거실에 떨어진 털들을 치운 뒤, 단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신문배달을 하고는 있지만,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고 특별히 ‘경험’이라고 생각될 만한 일도 아닌지라, 단유는 남는 시간에 또 할 만한 일들이 있는지를 검색해 보았다. 모처럼 마음먹은 김에 이번 방학 동안 이것저것 해보며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계산에서였다. 게다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일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적당히 사용하는 재미도 있었고, 숙달되면서 능력이 점점 발전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을 해봐도 적당한 일은 찾기가 어려웠다. 대부분 성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고, 청소년, 특히 중학생이 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비록 단유가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면 성인 이상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있지만, 그 능력을 드러낼 처지도 아닌 데다가 고용주 측에서는 ‘중학생’이라는 간판만 보고 채용을 거부했다. 심지어 건설현장 막일을 하기 위해 간 인력시장에서도 거절당했다!

이력서를 쓴다 해도 이력서에 쓸 간단한 이력 따위가 전무한 단유였기에, 공란이 넘쳐나는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결정할 업체는 없다고 봐야 했다.

“일 구하기 어렵다고 하더니.”

몇몇 이력서 양식을 받아 살핀 단유는 그 어마어마한 칸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이 많은 빈칸을 모두 채워야 업체가 관심을 가질 거라는 사람들의 조언이 있었다. 관심을 가질 뿐, 그게 또 면접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하니, 과연 어떤 이력을 채워 넣어야 채용할 수 있다는 이야길까?

사실 단유가 예전 약초점에서 한 일도 ‘아르바이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때를 떠올려보면 특별히 많은 능력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저 숫자 계산만 잘해도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가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만 있으면 일을 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데도 영어 공인 능력 시험의 점수를 채워야 하고, 고용주에 눈에 들기 위한 특별한 이력이 공란을 채워야 했다.

결론은, 단유가 할 만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단유는 모니터에 열려 있던 창을 닫던 중, 한 광고에 눈이 들어왔다.

『발리 3박 4일, 파격특가!』

여름 성수기를 맞아 여행사에서 게시한 광고였다. 하지만 광고의 문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광고 사진의 한 장면에 저절로 눈이 간 단유는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가능할까?’

가능한지 아닌지는 실행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여태 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였으니까.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한 단유는 더 시간이 늦기 전에,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컴퓨터를 끄고 창가에 섰다. 그의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단유가 본 광고 사진은 바다에 몸을 반쯤 잠근 한 여자가 수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 크기만 한 진주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진주는 컴퓨터 그래픽이었고, 진주 안에는 발리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엉뚱하게도 단유가 그 사진에서 생각해 낸 것은 ‘채집’이었다.

능력을 이용해 남의 것을 뺏는 것은 안 되더라도, 자연의 것을 ‘채집’하는 용도라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도 없고, 지능도 떨어지던 과거의 인류가 먹고살기 위해 취한 행동이 채집이었듯, 내세울 기술도 없고 공란을 채울 이력도 없는 단유가 돈을 벌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은 ‘채집’이었다.

그 전에 우선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단유는, 최대한 먼 거리를 이동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도 숙달된 능력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예전에는 이동을 곧바로 쓰지 못했다. 한 번의 이동 후 다음 이동을 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좌표 연산의 계산이 빨라지고 숙달된 탓인지, 그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그래서 이번에 단유가 선택한 방법은 초장거리 이동.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동시에 시야에서 다음 좌표를 확인하기 좋은 곳은 역시 하늘이었다. 마치 어느 게임의 마법사처럼, 하늘 위를 ‘블링크’처럼 이동한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다행히 단유가 이동을 할 때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마나’나 또는 특별한 ‘에너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머리로 계산만 할 수 있다면, 무한정 이동도 가능한 것이 단유의 마법이었다. 다만, 고정 좌표가 아닌 순간적으로 변하는 좌표였기에 끊임없이 계산해야만 하고, 그 계산이 쉬운 일은 아닌지라 집중력이 흩어지면 능력을 쓸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아직 그런 일이 크게 문제가 된 경우는 없었다.

‘가 보자.’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이동을 시작한 단유는 지상의 건물이 점으로 보일 정도의 하늘로 이동했다. 방향만 잘 설정해서 이동하면 될 일이다. 가로막는 벽도 없으니, 최대한 먼 지점까지 좌표를 순간 연산하여 이동한다.

수십 번의 이동이 이루어졌을 때, 단유의 발밑으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아슬아슬한 느낌이랄까, 만약 자칫 실수하거나 계산을 잘못한다면 그대로 바닷속에 빠져 해조류와 해양 어류들의 생태계를 감상하다 생을 마감해야 할지도 몰랐다.

단유를 방해하는 요소는 기온과 기압과 날씨였다. 너무 높은 곳에서 이동하는 탓인지, 마치 고산병을 앓는 사람처럼 머리가 살짝 어지럽기도 하고 숨쉬기가 불편한 느낌도 있었다. 7월임에도 서늘한 까닭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단유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동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또 수십 번의 이동 끝에 육지를 발견했다. 단유는 일단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주변을 살피며 내려온 단유는 인적이 드문 숲 속에 발을 디뎠다.

숨을 고르고 컨디션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던 단유는 가까운 인가를 찾아 이동했다. 그리고 곧 농사를 짓는 이로 추정되는 한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흙이 묻은 장화를 신고 수레에 이것저것 잡다한 집기들을 담아 이동하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간 단유가 물었다.

“저기요?”

“···誰ですか(누구시죠)?”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일본어였다. 단유가 이곳이 일본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노인은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놀라기도 했고, 낯선 언어에 당황하기도 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여쭤보려고요. 여행 중이거든요.”

곧 단유는 ‘능숙한’ 일본어로 물었다.

“여행? 여기가 여행할 만한 곳은 아닌데. 이런 시골에 볼 것이 없어요. 여긴 ‘가와라자와(川原?)’라고 하는데.”

야마가타 현 나가이 시에 위치한 ‘가와라자와’라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관광객이 올 만한 곳도 아니었고, 딱히 마을에서 내세울 만한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서의 풍취를 즐기기 위해 왔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좀처럼 외부인이 찾을 이유가 없는 마을이었기에 노인은 소년을 향해 경계심을 품었다.

가끔 뉴스를 보면 10대 청소년들이 힘없는 노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기사를 보곤 했었다. 그런 일은 대도시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생각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겼던 노인이었기에 비록 얼굴은 어려 보이지만 덩치가 좋은, 낯선 소년의 접근을 꺼렸다.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수레에 든 뭐라도 집어야 하나를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 그럼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어디인가요?”

멍청한 소리. 당장 동쪽으로 가면 나가이(長井)시가 있다. 거기서 온 게 아니라면 이 마을로 어찌 왔을까? 노인이 의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길을 알려주었다.

“저기가 나가이신데, 어디서 오는 길인가?”

단유가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넓은 평야와 하늘이 가득한 게 마치 ‘이세계’의 그곳을 떠올리게 하였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곤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피했다. 어차피 노인도 자신을 꺼린다는 기색이 역력하니 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노인에게도 좋을 것이다. 반면 노인은, 단유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나 자신을 배려하여 자리를 피해주려는 모습에서 경계심이 조금 풀렸다. 아니, 그보다는 주변에서 보기 힘든 훤칠한 외모와 신중함이 깃든 목소리에 소년에 대한 인상이 처음보다 풀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가이역으로 가려면, 저쪽으로 가야 해.”

“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유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얼른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떠났다. 노인은 단유의 뒷모습을 보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카메라도 없는데.’

여행 중이라는 사람이 가방도 없고, 복장도 딱히 관광객답지가 않다고 여겨져서 혹시 ‘몰래카메라’처럼 예능 촬영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탓이었다. 물론, 주변에는 그저 따뜻한 바람이 푸른 논 위를 달리다 노인의 옷깃을 한 번 흔들고 지나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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