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는 어디인가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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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유?”
“네.”
“중학생이라고?”
“네.”
“중학생이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데.”
“그런가요?”
단유는 남자의 물음에 그저 웃음으로 때웠다.
“중학생치고 키가 크네? 키가 몇이야?”
“175㎝ 정도 되던 것 같던데, 최근에 재어보질 않아서 모르겠네요.”
“이야, 내 키···보다 조금 더 크네.”
평소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키가 175㎝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물론 키높이 깔창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던 터였으니, 당연히 본래 키는 아니었다. 때문에 175㎝라고 주장하는 단유가 자신보다 5㎝ 이상 눈높이가 올라가 있으니 부러울 따름이었다.
헛기침을 뱉은 남자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예상 문제집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거라도 좀 볼래? 난 다 봤거든?”
“괜찮아요.”
“자신이 많나 보네. 혹시 외국에서 살다 왔어?”
“아니요. 그냥,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학교 공부만으로 칠 수 있는 시험이 아닌데. 남자는 반은 안타깝고 반은 못마땅한, 복잡한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단유가 이 시험, 번역능력인정시험(TCT)을 치기로 한 것은 방학 전의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영어 시간만 되면 아예 기척을 숨기고 몸을 숙이는 단유에게 도하가 물었다.
“너 왜 영어 시간에만 유독 그런다?”
“응?”
“마치 선생님께 걸릴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역시 경험이 많은 친구여서 금방 단유의 몸짓이 가지는 의미를 눈치챈 도하였다.
“그냥.”
“너 그거 아냐?”
“뭐?”
“넌 숨으려고 해도 숨기 힘들어. 전교 1등인 애가 그런다고 선생님이 못 보겠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지, 설마 수업시간에 너 안 보인다고 지적을 안 하고 그럴 거 같냐? 순진하네.”
굳이 마지막 말은 붙이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단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영어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유학파 출신의 젊은 선생님이셨다. 나이가 30대 초반이라서 그런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영어 발음이 섹시하게 들린다고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너 영어 잘하잖아?”
“그다지···.”
영어 문장을 읽거나 듣고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덜 느끼지만, 문법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단유였다. 물론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수준의 문법이라 교내 시험에서 점수는 잘 나왔다.
“너 영화 볼 때 자막 안 보지?”
뜬금없는 도하의 질문. 영화관에 안 가더라도, TV 채널에서 영화를 볼 때가 가끔 있었으니, 그에 대한 대답은 가능했다.
“보는데?”
“자막 없으면 영화 이해 못 해?”
딱히.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혹시나 해서 자막을 보며 자신이 이해하는 바와 같은지를 비교하는 편이었다. 이를 이야기하니,
“어쩐지, 넌 그럴 거 같더라.”
고 말하던 도하는 관심이 없는 척 자리에 엎드렸다.
“야.”
“왜?”
“너 번역가 하면 잘하겠다.”
“도하야.”
“응?”
“내 미래 걱정하기 전에 니 미래를 걱정해야겠다.”
“걱정할 미래 따위가 없네요, 난.”
“What are you doing, now?”
도하가 고개를 들었더니, 여 선생님이 허리에 손을 얹고 도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후에는 언제나 그렇듯, 벌점을 부여받고 교실 뒤로 나가 서 있어야 했던 도하와, 그를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께 뒤에 서 있는 벌을 받아야 했던 단유였다.
“내 미래나 니 미래나 똑같네.”
도하의 말에 단유는 피식 웃었다. 도하가 말하려 한 의미와 무관하게 그 말 자체는 단유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단유는 ‘번역가’란 직업에 대해 관심이 가지게 되었다. 단유는 번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번역’이란 작업은 단유에게 ‘일’이라는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업으로 삼으면서 일을 한다는 게 흥미로웠고, 그 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알아보던 도중 그 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협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 업을 위한 자격증 시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지원하는 시험이라는 것과, 특별히 언론에 나올 일도 아니란 생각에 단유는 망설이지 않고 지원을 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주말을 맞아 지선이 놀러 왔음에도 단유는 시험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그저 이 일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고.
‘그나저나, 누나는 잘하고 있을까?’
문득 행사 때문에 지방에 내려간 그녀가 생각났다. 아마도 이 시험이 없었다면, 단유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내려갔을까?
피식,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듣기로는 주관식 시험이라고 들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렇고 주위에 앉은 사람들도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넉살 좋게 다가가서 뭘 보는 거냐고 물을 성격도 아닌지라, 그냥 관심을 끊고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단유였다.
과연 옆자리의 남자가 관심을 가질 만큼, 주변에 단유 또래의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이 2, 30대 이상으로 보였고 더러 50대 이상의 분들도 보였다. 그러나 그건 극히 소수였고, 단유 또래 학생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고등학생이 있을지도.’
어떤 이유든, 옆자리 남자가 만만하게 보고 말을 걸 상대는 단유가 유일해 보이긴 했다.
곧 시험장에 감독관이 시험지를 들고 입장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
“먹어.”
로드 매니저는 젓가락을 챙겨 나윤의 앞에 놓아주었다.
“물 줄까? 물 마실래?”
나윤의 대답은 없었으나, 광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컵에 차가운 물을 한가득 받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는 나윤이었다. 아마도,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충격받을 일이었을까?’
솔직히 광석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비록 데뷔는 했어도 경력이 짧기도 하고, 나이도 어린 친구라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한 얼굴로 하나하나 챙길 때는 도리어 본인이 더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할 정도였고.
그러나 의외로 나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때는 딱히 실수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무대를 이어나가기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나 2번째 노래를 부를 때부터 자신감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 의아하게 여기다, 3번째 노래를 부를 때 심하게 손을 떠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나윤은 무대를 끝까지 마치고 내려왔다. 다만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이, 노래가 끝난 뒤 무대 진행자가 올라가 다시 한번 가수를 소개할 때,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해야 함에도 나윤은 마치 못 들었다는 듯 정신없이 무대를 내려올 뿐이었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던지 무대를 내려오는 계단에서 한번 휘청거릴 정도였다.
“괜찮아?”
광석의 물음도 들리지 않는지, 눈을 꼭 감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윤이었다. 왜 저럴까, 싶은데 같이 있던 다른 가수의 매니저가 혀를 찼다.
“무대 공포증 같은데?”
공포증? 갑자기? 회사에서도 그런 병이 있다고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나윤의 곁에 서 있을 뿐인 광석은 회사에 전화해서 상황을 보고해야 할지도 고민하고 있는데, 나윤이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오빠.”
“어? 어. 왜?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어?”
“네. 괜찮아요.”
“그래, 그래. 다행이다. 어, 저기. 일단 밥부터 먹을래?”
나윤이 물끄러미 광석을 바라보았다. 광석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다음 말을 찾았다.
“그래, 너 배고프지? 아까 거기 가서 밥 먹을래? 거기 맛있는 거 있을 거야. 찾아보면 그런 음식들이 있을걸?”
경력이 짧은 것은 나윤 뿐만이 아니었다. 매니저도 경험이 적은 이라서, 이런 상황에서 침착함을 잃고 같이 당황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모습이 나윤에게 침착함을 가져다주었다. 나윤의 눈에 ‘나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와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를 고민하는 광석의 모습이 잘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나윤이 일어서는데 광석이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나윤은 손을 뻗어 부축을 거절했다.
“괜찮아요.”
나윤은 접혀서 주름 잡힌 치마를 툭툭 쳐낸 뒤, 천막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전히 그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예인’이라서 호기심에 보는 것이지, 그 외의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눈치였다.
식당을 찾아가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식당마다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무대는 그렇게 텅 비어있더니, 다들 밥 먹으러 왔던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서 먹자.”
결국 정한 곳은 시장 중국집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침착하게 버텼지만, 식욕이 없음은 물론이고 젓가락을 들 힘도 없었다. 광석이 애써 짜장을 비벼주면서도 연신 나윤의 눈치를 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일단 먹자. 먹어야 힘이 나지.”
빨리 먹고 바로 올라가자, 는 광석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나윤은 억지로 몇 젓가락 정도를 들었지만 곧 티슈로 입을 닦았다.
“일어나자.”
결국 광석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로드 외의 업무까지 맡았는데 이런 결과를 맞이하니 스스로도 싱숭생숭했다. 게다가 아직도 회사에는 보고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과연 이 이야기를 전화로 해야 하는 건지도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조용하고 어둑했고 무거웠다. 광석은 눈치를 보는 대신, 오로지 전방만 보며 운전에 집중했고,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윤은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바깥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문득 나윤은 단유의 위로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단유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행사 끝났어.」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는 걸까? 토요일인데? 단유의 답장은 2시간 뒤에 왔다.
「일이 좀 있어서 늦었네요. 지금 올라오는 길이에요?」
이번에는 나윤이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단시간에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나윤은 잠이 들었고 급기야 핸드폰의 알림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잃은 채 서울로 ‘실려 갔다’.
정신을 차린 것은 휴게소에 도착해서였다. 잠깐 쉬었다 가자는 광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광석이 화장실을 간 김에 차에 홀로 남았던 나윤은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단유의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 바빴어?”
[아, 조금요. 누나는 어땠어요?]
어땠냐는 단유의 물음에 답을 쉽게 하지 못하자, 곧 단유의 물음이 뒤따랐다.
[무슨 일 있어요?]
“···너 때문이야.”
목소리가 많이 젖어 있었던 탓일까? 단유는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위로를 받을 생각이었는데, 괜히 단유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나윤이었다.
“너 때문에, 니가 가르쳐 준 것만 아니었으면, 그럴 일 없었을 텐데.”
단유는 달리 대꾸하지 않고 나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니가 가르쳐 준 보는 법, 그거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거야. 그럼 그 사람들이 날 동물원 원숭이 보듯, 길가에서 파는 흔한 장난감 보듯 하는 시선의 의미를 몰랐을 텐데. 아무런 관심도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른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다고···.”
투정이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왜 내가 여기 무대에 서 있는 걸까? 내 노래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내가 노래를 불러도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걸까? 내가 거기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눈물이 섞인 불평과 투정을 단유는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느낌도 전달하지 못하는 내 노래가 쓸모없다고 여겨지고,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고민도 되고 그래.”
흐느끼는 소리를 듣던 단유가 말했다.
[많이 힘들죠?]
나윤은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다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죠.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일들,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봐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보고 싶지 않다.
[거울을 봐요.]
거울?
[거울 속의 자신을 봐요.]
차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는 나윤은 얼룩덜룩한 얼굴을 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을 보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보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자신을 보고 자신이 어디로 바라보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보세요. 그리고 물어봐요. 과연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나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고 바보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