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84화 (384/956)

출구는 어디인가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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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은 이제껏 오일장이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어 막연히 동네 주변의 재래시장 정도를 상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느낌은 마치 축제가 벌어진 것 같아 살짝 들뜨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양한 색의 천막들이 길 양편으로 줄지어 서 있고, 때문에 좁아진 길 위를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지나다니고 있었다.

“저기 구경해도 되요?”

“별로 볼 거 없을 거 같은데?”

로드 매니저, 광석은 이왕 시간도 남는 김에 조금 쉬고 쉬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보는’ 즐거움에 눈을 뜬 나윤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눈에 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결국 투덜대면서 나윤을 끌고 거리로 나선 광석은 혹시 모를 사고가 벌어지지 않을지 걱정을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면 나윤은 천막 점포에서 파는 다양한 물건들과 먹을거리들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빠, 저기 봐요. 저거 하나 사서 갈까요?”

“우와, 나 저거 좋아하는 건데.”

“저거 먹고 싶지 않아요?”

치킨 두 마리에 6천 원, 모듬 과자 한 봉지에 5천 원, 한입에 먹기 좋을 풀빵과 아기자기한 화분, 싸구려지만 편할 것 같은 츄리닝. 과연 탐이 나지 않는 게 없다 할 정도였다.

“넌 저런 게 먹고 싶니? 사람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곳에서 위생도 제대로 안 지켜질 것 같은데?”

“에이, 그런다고 안 죽어요. 그렇게 따지면 명동 길거리 음식들도 다 못 먹게요?”

광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가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여기 있는 것들이 토산품일 거 같지? 아마 다 중국산일걸? 저기 고춧가루도 그렇고, 니가 먹고 싶다던 젓갈도 다 중국산일 거야. 저게 자연적으로 나올 색깔이 아니거든. 그리고 저 옷도 다 중국산일 게 분명해.”

“잘 아시나 봐요?”

광석의 부모님이 그런 물건들로 오일장을 돌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속으로 삼키며 대충 얼버무린 광석은 끝내 나윤에게 군것질거리로 들깨강정을 한 봉지 사주고 출연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무대가 끝난 뒤, 만약 시간이 남는다면 다시 돌아가서 점심이라도 가볍게 해결하자고 달랬더니, 나윤도 그에 동의한 참이었다.

“오빠 거울 있어요?”

방송용 카메라는 없더라도 무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나윤은 광석이 건넨 거울을 보고 헤어 스타일과 화장을 고쳤다.

“다음 무대니까 준비하세요.”

연출팀의 누군가가 와서 공연이 임박했음을 알리자, 나윤은 갑자기 하지 않던 걱정들이 들기 시작했다.

“오빠, MR은 다 준비됐어요? 의상 괜찮아요? 화장 너무 뜨지 않았어요? 사람 많이 와 있어요? 리스트가 이거 맞아요? 혹시 바뀐 거 아니죠?”

“괜찮아. 바뀐 거 없고, 리스트대로 하면 돼. 올라가자, 시간 됐다.”

나윤은 쿵쾅거리는 가슴께에 마이크를 부여잡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곧 마주칠 관객들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예뻐 보일지를 고민하며.

****

“어머, 오랜만이다! 너, 나 기억나니?”

“예.”

“어쩜, 이렇게 예쁘게 컸대? 진짜 애들은 하루만 지나도 몰라보게 큰다더니.”

“고맙습니다.”

“어쩜, 이렇게 인사도 잘해? 부모님이 뿌듯하시겠어. 엄마, 아빠가 많이 예뻐해 주시나 보다.”

지선은 하은의 칭찬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예전 하은이 단유의 과외를 위해 보육원을 들락거릴 무렵, 단유를 졸졸 쫓아다니던 여자아이를 기억했기에 이 기막힌 만남이 하은은 신기하고 흥분됐다.

“몇 학년이니?”

“5학년이요.”

“벌써? 와, 시간 진짜 빠르다.”

함께 지내던 단유와 명수가 어느새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오랜만에 만난 지선에게서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 하은은 지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물었다. 지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오빠, 뭐 먹고 싶어?”

하은은 지선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보게? 전혀 변하질 않았네? 야, 김단유. 너 조심해야겠다?”

“뭘요?”

“몰라서 물어? 이거 큰일 날 놈이네. 주변 여자들한테 그렇게 쉽게 마음을 줘서 어떡하니? 니 여자친구가 불쌍하다야.”

단유는 ‘그만 놀려요’라고 간단하게 대꾸하고는 지선을 향해 몸을 숙였다.

“먹고 싶은 거 없어? 어차피 우리도 점심을 시켜 먹을 거라서 말이야. 보시다시피 저분이 요리는 전혀 못 해서 말이야.”

“야, 김단유! 누가 요릴 못해? 할 시간이 없어서 안 할 뿐이지, 못 하는 건 아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뭐 드실래요?”

“정말 날이 갈수록 능청스러워지는 것 같아. 안 그러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한 명수의 반응에 하은은 콧방귀를 뀌며 두 사람을 째려보았다.

“친구라고 감싸는 거 봐? 그래, 니들이 날 따돌리겠다 이거지?”

“에이, 선생님, 따돌리긴 누굴 따돌려요?”

명수가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삐친 척하는 하은을 달랬다. 지선이 그 모습을 보다 단유에게 말했다.

“저 오빠는 아직도 덩칫값을 못해.”

“야! 공지선!”

명수가 버럭 소릴 지르자, 지선이 단유 뒤로 돌아가며 고개만 내밀었다.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다?”

“아우, 저걸 그냥? 너 왜 왔어? 나 놀리러 왔어? 내 속 터지게 만들려고 왔지? 내가 처음 널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저건 진짜 원수다, 원수.”

“명수야! 동생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사과해, 얼른.”

“아우, 선생님! 진짜, 저게···.”

단유는 웃음을 터뜨리며 명수를 달랬다.

이후 중국집에 간단한 요리를 시켜서 먹은 이후, 지선을 명수에게 맡겼다.

“오빠는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나가봐야 할 거 같거든?”

“여자친구랑?”

단유는 웃음으로 때우며 몸을 일으켰다.

“너 보겠다고 온 건데, 같이 놀지?”

명수가 대놓고 싫다는 말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희 둘 사이 좋잖아? 지선이한테 게임도 가르쳐주고 하면 되겠네. 상미도 불러서 같이 놀던지.”

명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지선을 바라보자, 지선도 명수를 바라보았다. 곧 동시에 시선을 돌리는 두 사람을 보며 단유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나윤은 침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나윤이 행사를 다녔던 곳은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 행사나, 혹은 작은 클럽에서 진행되는 소규모 행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적어도 ‘가디스R’이라는 이름 정도는 아는 이들이 많았고, 가끔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해주는 이들도 있어, 떨리지만 신나게 무대를 꾸밀 수 있었다.

물론 오일장이라는 특성상, 연령대가 높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좁은 무대 위에 올라 바라보니, 무대 앞에 가지런했을 게 분명한 플라스틱 의자들은 줄을 이탈해서 뒤죽박죽인 채로 비어있는 모습들이었다. 아주 텅 빈 것은 아니었다. 무대에 가까운 줄은 그래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무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해를 가리기 위해 넓은 챙의 모자를 쓰고들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대부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었다. 50대? 60대? 그보다 더 많아 보이시는 분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지팡이를 앞에 쥐고 앉아 계신 분들도 있었다. 그것도 앞의 3줄이나, 4줄 쯤이었고, 그 뒤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텅 비어있었다. 빈 의자들 바깥으로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잠시 시선을 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더러 몇 사람은 뒷짐을 지고 무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구경’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관람’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마치 재롱 한번 부려 보라며, 동물원 철장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랄까?

“안녕하세요.”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먼저 저희 노래···들려드릴게요.”

MR버전 CD가 돌아가며 싸구려 스피커에서 조악한 음질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나윤은 차라리 눈을 감고 부르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눈을 감고 노래가 들어갈 타이밍에 맞춰 입을 벌리고 노래를 했다. 하지만 노래의 흐름 상 눈을 감고 부를 부분도 아니었고, 몇 안 되는 이들이라도 반응이 궁금해서 눈을 떴다.

그리고 하마터면 노래를 멈출 뻔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목석처럼, 표정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 당황스러울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끄럽다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무슨 노래냐며 옆 사람에게 묻는 이도 있었다.

경력이 많은 가수였다면, 오히려 이럴 때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하련만, 나윤은 더욱 어깨를 움츠리고 마이크만 두 손으로 꼭 붙들 뿐이었다.

어떻게 노래를 끝냈는지도 모르게 노래가 끝이 났다.

“다음 노래는, 장윤정 선배님의 노래입니다.···아시는 분은 따라···불러 주세요.”

다른 애드립은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무대에 오르기 전 보았던 행사 진행 멘트를 그대로 읊었다. 그마저도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불러 주세요’라는 말은 관객들이 제대로 들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떻게 마음을 수습할 새도 주지 않고, 반주 음악이 나왔다.

나윤은 울고 싶었다.

****

주말이지만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외출을 갔다 돌아온 승민은 문 앞에 마중 나온 아내에게 지선에 대한 일부터 물었다. 오전에 외출을 나갈 때 지선도 함께 데리고 나갔던 승민은, 직접 단유네 집에 지선을 데려다준 후 약속장소로 갔었다. 돌아올 때 지선을 데리고 돌아가려 했지만, 지선이 이미 집에 도착했다는 아내의 전화에 바로 집으로 돌아온 승민이었다.

“명수가 직접 데려다주고 갔어요.”

“그래? 그놈아가 속정이 깊은 놈인 거 같더라고. 투덜투덜하면서도 친구들 제일 잘 챙기는 놈이거든?”

승민은 욕실에 들어가 손을 먼저 씻은 뒤, 거실로 향했다. TV를 보던 지선이 벌떡 일어나 쪼르르 다가와 인사했다.

“어이구, 우리 딸내미? 잘 놀았나?”

“네.”

“그래, 오랜만에 오빠들이랑 노니까 좋드나?”

“네. 좋았어요.”

“너무 놀지만 말고 공부도 좀 배우고 그래라. 단유 그놈이 공부머리는 기가 막히게 좋으니까, 그놈한테 공부하는 법도 좀 배우고 그래라, 응?”

“아이구,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여보, 우리 애, 이제 초등학생이에요.”

애초 두 사람이 지선을 입양할 때, 서로 다짐한 것은 아이가 밝게 크기만을 바라자는 것, 그리고 무리하게 공부를 시키지 말자는 것이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인성 교육, 이라는 개념보다는 그간 고생했을 지선이 좀 밝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지선의 성적보다 교우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어머니였다.

“알았다, 1절만 해라. 그래도 지선아,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제? 그래, 단유네 집에 자주 놀러 가서 놀기도 많이 놀고 공부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노? 맞제?”

지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구, 우리 딸내미가 아빠 말은 기똥차게 알아듣는다.”

승민과 그의 아내는 지선에게 애정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일부러 더 ‘가족’을 강조하고, 지선이 자신들의 ‘딸’이라는 사실을 계속 주지시켜서 혹시라도 지선이 입양된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승민의 경우, 처음에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경상도 남자였던 승민에게 애정 표현이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 버릇하면 된다는 아내의 요구에 절치부심하여 노력한 끝에 지금은 지켜보는 아내가 닭살이 돋을 정도로 ‘딸바보’가 된 승민이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손부터 씻는 버릇도 그렇게 생겼다. 손을 씻기 전에는 결코 지선을 안거나 만지지 않았다. 그만큼 지선을 소중히 생각하는 승민이었다.

“식사해요.”

“아이구, 우리 딸? 아빠 때문에 저녁도 못 먹고 기다린 거 아니제?”

“아빠랑 같이 먹으려고 일찍 온 건데?”

“진짜? 아이고, 우리 딸. 이리 착해서 우야노? 응?”

“두 사람 다 그만하고 빨리 앉아요. 괜히 섭섭해지게 하지 말고.”

아내의 너스레에 승민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식탁으로 향했다.

“우리 딸, 많이 먹자, 알긋제?”

아내는 지선이 다 못 먹을 줄 알면서도 밥그릇에 가득 밥을 채워 주었다. 지선은 또래 아이들보다 몸이 작고 약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점이 가슴 아프던 두 사람은 지선을 먹이는 일에 꽤 열을 쏟았다. 하지만 입이 짧은지 지선은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묵자.”

승민은 눈웃음을 지으며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본 뒤, 숟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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