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는 어디인가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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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주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여자친구가 있음을 선포한 일은, 적어도 단유를 아는 이들에겐 꽤 놀라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딱히 그 전과 달라질 게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단유 뭐해? 여자 친구랑 통화하니?”
하은이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공부해요.”
하은이 들어오니 역시나 단유는 노트를 펴놓고 열심히 필기하고 있었다.
“더운데 방에서 뭐하니? 나와서 수박이라도 먹어.”
“괜찮아요.”
“하긴. 네 방은 이상하게 덥지가 않아. 에어컨을 따로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단유의 방을 두리번거리던 하은은 여념 없이 노트에만 집중하고 있는 단유를 보고 피식 웃었다. 침대에 턱 하니 걸터앉고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던지, 단유는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일? 없는데? 계속하던 거나 해.”
“무슨 할 말이 있으시니까 이러시는 거잖아요?”
하은은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단유를 바라보았다.
“우리 단유가 이제 다 컸다 싶어서.”
“설마 여자친구 이야기인가요?”
“역시 우리 단유는 사람 마음도 족집게처럼 잘 맞춰.”
“여자친구 있다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걱정스럽게 바라보세요?”
“아무리 잘난 너라도 연애는 또 다른 문제지. 너 연애 해 본 적 있어? 없잖아?”
“선생님은요?”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랬다. 뭐, 아무튼 말이야. 단유 너니까 솔직히 걱정이 덜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신경이 안 쓰일 순 없네. 당장 네 공부에 영향을 줄까 걱정이 되는 면도 있고.”
그리고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것들. 싸우면서 정든다지만,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감정의 진폭이 너무 커서 자칫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되는 게 하은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너 통화는 자주 하니?”
“예.”
“그런데 어째 맨날 책만 보고 있는 거 같니? 보통 교제 초반에는 서로 막 보고 싶고 그래서 통화도 자주 하고 만나기도 자주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자주 만나고 있어요.”
“맨날 집에만 있는 것 같더만?”
“선생님 일 나가시고 나서요.”
“이것들이 대낮부터 꽁냥꽁냥 하고 있었단 말이냐!”
“밤에 하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네.”
하은은 무릎을 툭툭 치며 일어섰다.
“애먼 짓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여자친구 너무 소홀하게 여기지 말고. 여자는 카드로 만든 집이야. 약간의 충격에도 쉽게 무너지는 생물이라고.”
“알겠어요.”
“그리고, 여기.”
웬일로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싶더니, 본론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데이트하려면 돈 많이 들 텐데 이거 써.”
“괜찮아요. 용돈 모아둔 거 있어요.”
“니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리고 연애하면 돈 많이 쓰게 되어 있어. 내가 돈이 많지 않아서 많이는 못 주니까 아껴 쓰고, 여자가 나이 많다고 그쪽이 계속 돈 내게 하면 그것도 꼴불견이야. 모름지기 여자란 가녀린 화초 같아서, 하루 종일 소중하게 보살피고 조심스럽게 대해도 자칫 실수로 금방 시들 수 있는 약한 생물이라고.”
“조금 과장이 심하신 것 같은데요?”
“과장이라니! 여자는 그렇게 약하다고.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남자들은 모른다고. 모르니까 쉽게 상처 주고, 그 상처에 여자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르고. 그게 연애할 때 얼마나 힘든지 아니?”
“개인적인 경험담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건 알아서 걸러들어, 이 녀석아!”
단유는 웃으면서 하은이 건넨 돈을 받아들었다. 하은은 단유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린 뒤, 방을 나섰다. 다시 고요가 내려앉은 방에서 단유는 손에 든 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긴, 그 날도 돈이 많이 들긴 했어.’
처음 교제를 인정한 날, 영화 표나 카페의 커피값 등을 나윤이 나서서 계산했다. 뒤에서 지켜보기에 그 돈이 만만치 않아, 이후 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면, 단유도 모아둔 용돈으로 밥값을 계산하는 등 부담을 나눴다. 하지만, 단유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출이 많아져서 고민이 될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돈, 돈 하는 이유가 있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돈의 지출을 체감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가끔 정말 보고 싶은 책이 있을 때만 지갑을 열었던 단유로서는 움직일 때마다 돈이 드는 일과가 꽤 낯설었다.
“돈이라···.”
단유는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책상 위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단유는 거실로 나갔다.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상미와 명수가 단유를 흘깃 보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주방 식탁에 앉아 있던 하은이 단유에게 ‘수박 먹으려고?’라고 물었지만, 단유는 간단하게 거절하고는 창가로 향했다.
“뭐해?”
창가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는 단유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명수가 물었지만 단유는 ‘별거 아냐’라는 말을 얼버무렸다. 잠시 후, 단유는 조심스럽게 손에 들린 잎사귀를 들여다보았다. 그 잎사귀는 조금 전까지 거리 양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가로수의 잎들 중 하나였다. 마음만 먹으면 가로수의 잎뿐만이 아니라,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은행 금고 속 돈뭉치도 가볍게 빼낼 수 있는 게 단유의 능력이었다. 물론 아직 단유의 능력이 시각적으로 확인한 물건에 대해서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응용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결국, 세상 모든 재화가 단유의 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조금만 마음을 나쁘게 먹는다면 돈 걱정? 나라를 사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마법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물론 제윅처럼 살인을 저지르는 마법사도 있지만, 제윅은 살인이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을 테니 문제 될 게 없었다.
요는, 마법사란 자신의 마음을 배신하는 행위를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돈과 재물을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탐하려는 행위는 ‘지금의’ 단유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수단이었다. 계속 마법사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아니면 아예 ‘악(惡)의 마법사’쪽으로 마음을 돌려도 되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던 단유는 뒤로 돌아서며 하은을 보았다.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던 하은이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물었다.
“왜?”
“저 아르바이트 할게요.”
단유의 선언에 하은은 물론, 명수와 상미도 놀란 얼굴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
단유의 아르바이트 선언이 있을 무렵, 나윤은 에어컨 바람으로도 식혀지지 않는 더위와 싸우고 있었다. 하긴 1시간 이상 몸을 격렬하게 움직였으니 에어컨 바람이 다 무슨 소용일까.
“아이고, 죽겠네.”
나윤은 혀를 빼물고 연습실 한쪽 벽에 위치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얘는 왜 이렇게 연락을 안 해?’
가끔 먼저 연락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 먼저 연락하는 쪽은 나윤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투덜거림이 쉽게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나윤이 굽히고 들어간 까닭, 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려보지만, 쉬이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이럴 때 먼저 연락 주고 그러면 얼마나 힘이 되고, 응? 기운이 나고 그러겠어? 응? 안 그래?”
마치 발성 연습을 하듯 힘주어 외치니 되려 열만 더 나는 상황이라 나윤은 입술을 삐죽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거울을 보니 한심한 표정의 얼굴이 보여, 나윤은 거울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코가 조금만 더 높으면 예뻐 보일까? 이 정도면 괜찮다고 단유가 그랬지만, 예쁘다고는 안 했으니 조금 높이는 게 좋을지도···. 눈썹은 왜 이렇게 짧대? 어머, 이마에 뭐가 났나 봐? 언제 이랬지? 아침에 세수할 땐 못 본 거 같은데?’
한참 얼굴 여기저기를 살피며 단유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찾으려 애쓸 때, 연습실 문이 열리며, 실장이 들어왔다. 나윤은 실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아, 그래, 됐어.”
실장은 대충 인사를 받은 뒤, 괜히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별거 없음에도 시선을 돌리는 이유는 아마도 어색해서이리라.
그 날, 나윤을 향해 거친 발언을 했다가 박 이사에게 들켜 호되게 당한 이후, 진짜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던 실장은, 그날 오후 퇴근 무렵 박 이사에게 다시 한번 강한 질책을 받은 뒤 경고를 받았다.
“한 번만 우리 애들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게 들키면, 그때는 그냥 안 봐준다. 알겠나?”
실장은 두 번 세 번 허리를 굽혀 사과한 뒤에야 이사실을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실장이 일적으로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거나 무능력한 사람이었다면 바로 잘렸겠지만, 현시점에서 나쁘지 않은 업무 수완을 가진 이라 박 이사라도 함부로 자르기 어려웠다. 그만한 인력을 다시 수급하는데도 어려움이 뒤따르는 형편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실장 역시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이 바닥은 어떤 일로 갈려 나갈지 알 수 없었다. 당장에 자기 자리를 노리는 매니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방송국 로비만 가도 알 수 있었다. 비록 중소기획사라 해도, 실장급이라면 침을 흘리며 탐내는 매니저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중에서도 실력이 돋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박 이사가 실장을 자르지 않은 건 진짜로 ‘봐 준’ 셈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실장이 저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진 영향이 있었고, 평소 허세 끼가 다분하던 실장이 얌전하게 지내니 같이 근무하는 사원들로선 환영할만한 변화였다.
물론, 이런 상황들이 나윤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다만 실장의 얼굴을 계속 봐야 한다는 게 불편할 뿐이지만, 그런 일은 나윤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했다. 박 이사도 그런 식으로 나윤을 달랬고.
“무슨 일이세요.”
나윤의 물음에 실장이 힐끔 나윤을 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다른 게 아니고, 여름 행사가 하나 잡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나윤으로선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니 무대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래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자기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어떤 무대든 오를 수 있었다.
“서해 용두 해수욕장 근처 오일장에서 하는 조그만 행산데, 괜찮지?”
괜찮고 자시고, 어차피 위에서 잡은 행사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 나윤으로서도 딱히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5일장이라고 하니, 말로만 듣던 시장통 한가운데 간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괜찮아요.”
“행사곡은 3곡 정도 부르면 되는데, 한 곡은 ‘리모트’고 두 곡은 트로트 커버로 해야 할 거 같다.”
오후에 있을 레슨에서 커버곡을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 실장은, 3일 뒤 새벽에 출발, 이라는 말을 끝으로 연습실을 나갔다.
실장이 나간 후, 나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빠졌다. 트로트든 뭐든, 지금은 일단 무대에 오르는 것만 생각하자. 회사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 바라보자. 하긴 회사입장에서도 데뷔까지 시킨 가수를 연습실에 박아두고 있지는 않겠지. 투자한 만큼 수익을 거둬야 할 테니까.
나윤은 얼른 일어나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단유에게 문자를 남기려다 손을 멈칫했다. 곧 수신자를 어머니로 바꾸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사실 가디스R의 활동 중단 이후, 나윤만큼 어머니도 마음 아파하셨다. 다만 딸이 보는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심한 표정을 짓지만,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느꼈던 나윤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윤과 어머니는 되도록 집 안에서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러니 이런 내용이라면 분명 어머니도 좋아하시리라.
문자를 보낸 뒤, ‘잘 됐다, 우리 딸’이라는 답문에 미소 짓던 나윤은 곧 단유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자판을 두드리는데, 때마침 문자가 들어왔다.
“어?”
그토록 투덜댔더니 그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단유에게서 문자가 왔다. 하지만 내용을 읽자마자 나윤은 문자를 보내던 걸 취소하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무슨 소리야?”
[뭐가요?]
“문자 말이야.”
[아, 아르바이트 한다고요.]
“왜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해? 너 공부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설마 나 때문이야?”
[음,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네요.]
뜨끔한 표정을 짓던 나윤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야! 그런 게 어딨어? 하지 마. 그냥 공부해. 방해 안 할 테니까 넌 그냥 공부만 해.”
[방해라뇨?]
“그러니까···앞으로는 덜 만나고···뭐 그러면 너 공부하는 거 방해도 안 하고 돈 쓸 일도 없을 거 아냐.”
핸드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어?”
[혹시 지금까지 만나면서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나 해서요.]
“아니, 아니! 그런 생각을 왜···. 아, 몰라. 아무튼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할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해.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게 남는 거야.”
[누나가 그런 말 하니까 너무 이상한데요?]
“야, 내가 그래도 너보다 오래 살았어. 공부해서 출세하는 게 지금 아르바이트한다며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낫다고. 내 말 들어.”
[공부랑 담쌓은 고3 여고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 않아요?]
“놀리니?”
[아니에요. 아무튼, 아르바이트는 해 볼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그동안 제가 너무 편하게 지낸 거 같아서요. 방학인데 경험 삼아 해 볼 만한 거 같아서 말이죠.]
“방학 때 만?”
[일단은요. 그리고 솔직히 아르바이트 좀 한다고 떨어질 성적은 아닌 거 같고요.]
“와, 너 방금 되게 재수 없는 이야기 한 거 아니?”
[부러워요?]
“그래, 되게 부럽다.”
나윤은 잠시 핸드폰을 붙잡고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단유의 웃음소리를 감상했다.
“고마워.”
[뭐가요?]
“이런 이야기, 해줘서.”
뭘 하는지, 무슨 생각 하는지를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너에 대한 이야기들, 들을 수 있어서 고마워.
[별 말씀을.]
단유의 덤덤한 대꾸에도 나윤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