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지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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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상미가 원하는 팝콘과 콜라를 양손에 사 들고 상영관으로 향했다.
“무거워.”
“엄살은.”
상미는 명수의 품에서 팝콘만 골라 들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오물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명수는 이내 고개를 털고 뒤를 쫓았다.
작년 늦가을 무렵, 단유가 어디선가 어깨를 다쳐서 왔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울에서 함께 지내던 선생님이 무슨 이유에선지 일을 그만두고 떠나고, 대신 하은이 다시 돌아와 집안에 활기를 더했었다. 평소 과묵하던 단유도 그때를 기점으로 가끔 농담도 하고 친구들한테 더욱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변화는 좋은 점이었지만, 반대로 그 시기에 재훈은 돌연 후원을 끊겠다고 했다. 사정을 모르는 명수로서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이제 더 단단해져야 돼.”
단유의 언질이 없었더라도 명수는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별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겠다. 재훈의 후원 아래 너무 편안히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축구만 하면서 현재의 생활에 젖어 있었던 것이리라.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주변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 느끼지 못했던 것도 느껴졌다. 예를 들면, 상미의 시선. 솔직히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명수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미가 단유를 보는 시선이 다른 친구들을 볼 때랑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해?”
“응? 아냐.”
명수는 서둘러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더듬거리며 자리를 찾아간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다행이라면, 상미가 보고 싶어 하던 공포영화는 연령제한에 걸려 볼 수 없었다는 점이고, 불행이라면 그럼에도 이왕 온 김에 ‘영화 한 판 때리고 가야지’라며 발권한 영화가 연애물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었다. 다행이라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류의 뽀송뽀송한 색감으로 화면을 채워서 상남자 같은 상미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고, 불행이라면 연애의 1도 알지 못하는 상남자 명수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재밌네.”
“그래? 다행이네.”
빈 팝콘 통을 휴지통에 버릴 때였다.
“명수야.”
“응?”
명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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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 괜찮아?”
“저요? 좋고 말고가 어딨어요. 아직 내용도 모르는데.”
단유의 여상한 대답에 나윤은 괜히 이 영화를 고른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단유는 줄곧 자신에 맞춰주는 포지션이었다. 뭐든 나윤이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고,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계속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이런 애니메이션은, 특히 이런 연애물은 남자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액션 히어로가 나와서 우주를 넘나들며 부수고 소리치고 욕도 하고 주먹질하다가 키스도 하는 영화를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은 상식이잖는가?
“여기네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자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왜 그래요?”
주변을 둘러보던 나윤에게 단유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떨고 있잖아요?”
단유가 나윤의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나윤은 얼른 손을 뺐다가 ‘아’ 하고 탄식하며 후회를 했다.
“미안.”
“뭐가요?”
나윤은 고갯짓을 했다. 기껏 자신이 먼저 손잡자고 해놓고선, 또 이렇게 오해받을 행동을 하고 말았다.
“손에 땀이 많이 나서.”
“괜찮아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를 지닌 단유의 얼굴을 힐끔 보며 얼굴을 붉혔다. 곧 광고도 끝나고 극장에는 빗소리 같은 효과음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계속, 손잡고 있어도 괜찮아?”
몸을 기울여 물었더니, 단유가 피식 웃으며 나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무 여자가 매달리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되지만, 일단 그런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나윤은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손등에 와 닿는 단유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와 닿는 그의 온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기분이었다. 좋은 느낌이었다.
단유는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서사와 그 서사가 함축하는 의미들에 집중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상 표정과 행동에 과장은 있지만, 그 과장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의미는 보다 선명해지고 명확해졌다. 다만 진짜 사람이 연기를 통해 표현하는, 불명확하지만 호소력 짙은 감정의 전달이라는 측면은 많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의 한계이리라. 그 덕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화되고, 다소 일차원적인 의미 전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지만, 때문에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는 감상평을 늘어놓는 단유의 말에 나윤은 코웃음을 쳤다.
“아, 미안. 비웃는 거 아냐. 그냥, ‘너 답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요? 저답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은 기껏해야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꽃을 건네줄 때 가슴이 설레더라, 정도의 감상밖에 안 남았는데 말이다.
나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단유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우리가 제일 어린 것 같지?”
직역하면, 여기는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지 않냐는 물음이었는데 단유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외모만 보면, 저희도 별로 어려 보이진 않을걸요?”
잠시 생각을 하던 나윤이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그럼 내가 겉늙어 보인다는 이야기야?”
“누나만 그런가요? 저도 그렇죠.”
“넌 안 그래.”
“왜요? 저도 가끔 중학생으로 안 보인다는 이야기 들어요.”
“그건 네 키가 커서지. 넌 얼굴이 되게 동안이란 말이야.”
“칭찬인가요? 고맙습니다.”
“···아이 씨. 너 왜 말 돌려!”
“커피 맛있어요. 이런 커피 처음 먹어보는데?”
“야!”
“사람들이 돌아보는데요?”
나윤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려는 듯, 몸을 안쪽으로 기울였다.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것을 잊지 않는 나윤을 보며 단유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커피 한 잔씩을 시켜놓고 꽁냥꽁냥 거리는 두 사람의 기묘한 데이트는 영화 관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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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이런 영화도 보나?”
“아, 아뇨. 친구가 보자고 해서 따라온 거예요.”
“친구?”
옆에 섰던 상미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오, 여자친구가?”
“아, 그냥 여자 사람 친구예요.”
“에이, 그런 친구랑 단둘이서 극장 데이트를 하나?”
“그런 거 아닌데요.”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장계 중학교의 수학 담당이신 김승민 선생님이었다. 도대체 극장에서 학교 선생님을 만나는 우연은 다 뭐람. 게다가 친하지도 않은 수학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승민은 하하 웃으며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명수가 축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연애도 잘하네?”
아니라고 몇 번을 대답한 들,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인사해라. 얘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로 축구 잘하는 애다.”
“어머, 잘생겼네. 반가워요.”
선생님의 곁에 있던 여자분이 인사를 하자, 명수는 또 한 번 마주 고개 숙여 인사하다가 두 사람 사이에 조그맣게 생긴 여자애가 멀뚱멀뚱 명수를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내 딸이다, 이쁘제?”
가족끼리 영화를 보러 왔다는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명수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하지만 여자애는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얘가 낯을 가리나? 원래 인사성이 밝은 앤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조금 그런갑다. 니가 이해해라.”
이해고 자시고, 명수는 볼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여자애도 명수에게 관심이 사라졌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거 밥 묵읏나? 이제 저녁시간인데 밥 안 묵었으면 같이 할까?”
“네? 아니, 저기···.”
명수는 머리가 복잡해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라고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상미가 나섰다.
“저희는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으면 되는 걸요.”
그러자 이번에는 사모님이 선생님의 팔을 찰싹 치며 말렸다.
“그러지 마요. 자기들끼리 있고 싶어하는 데 눈치 없이 끼어들고 그래요?”
“아, 글나? 미안타, 내가 눈치가 쪼매 없어가지고.”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진짜 집에서 먹으려는 거예요. 저희 집이랑 명수 집이랑 가까워서요, 자주 같이 먹거든요.”
“맞나? 아, 그라믄 니 단유도 알긋네?”
“네. 단유한테 공부도 배우는데요?”
“공부를?”
상미는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있을 때 단유의 도움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덕에 성적도 올랐다는 이야기에 선생님이 손바닥을 힘차게 마주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기가 막히네! 전교 1등하는 애한테 과외를 받으이 성적이 오를 수밖에 없겠네. 가가 선생들보다 실력이 더 좋다 아이가. 맞제, 명수야?”
“네? 네.”
“맞다고? 그럼 가가 나보다 더 실력이 좋다 이 말이가?”
명수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근데 야는 또 와이리 쑥스럼을 타노? 학교에서는 천방지축처럼 동분서주하는 놈이 여자친구 있다고 얌전 빼는기가?”
“이이도 참.”
사모님은 선생님이 너무 학생을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선생님을 말렸다. 그때였다.
“오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애가 불쑥 나서며 명수에게 말을 걸었다.
“응?”
명수가 놀란 눈으로 여자애를 바라볼 때, 선생님과 사모님도 무슨 말인가 싶어서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오빠 어딨어?”
“야, 뭐라 하노?”
‘딸내미가 갑자기 무슨 소리고’라며 사모님에게 묻지만, 사모님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몸을 낮추며 여자 아이의 시선을 따라 ‘여기 오빠 말고 다른 오빠 찾니?’라고 물었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이 계속 명수를 향하자, 명수는 쭈뼛대면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나 혼자 왔어···.”
명수의 대답에 선생님과 사모님이 ‘갑자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고’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모님이 먼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하지만 말은 끝을 맺지 못했고, 사모님의 입술은 그저 달싹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걱정되는 판이라 그런지 말을 잇지 못하는데, 명수 역시 난처한 얼굴로 사모님과 선생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명수 곁에 선 상미도 영문을 몰라 그저 상황을 지켜볼 뿐인데, 여자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유 오빠 불러줘.”
여자아이의 뜬금없는 요구에 놀란 부모와, ‘단유’라는 이름에 반응한 상미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니, 니가 단유를 어째 아노?”
여자 아이가 돌아보며 선생님에게 말했다.
“나, 단유 오빠랑 같이 살았어, 아빠.”
여자 아이, 지선이의 대답에 선생님과 사모님, 상미가 서로의 놀란 표정을 확인하다 명수에게로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이 닿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던 명수는 난처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같은, 시설에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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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단유에게 전화가 왔다.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 후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응?···알았어. 어딘데? 아, 그래?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누군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단유에게 나윤이 물었다.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명수요. 밑에 와 있다네요.”
“밑에?”
“네. 아는 사람이랑 같이 있나 본데 얼굴 좀 보자고 해서요.”
“그런데, 명수는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대?”
“영화 보러 왔나봐요. 왔다가 저흴 봤나 보더라고요.”
“그래? 난 못 봤는데?”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윤도 덩달아 일어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번화한 거리가 나타났고, 주말 저녁시간 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기래요.”
단유가 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먼저 앞장섰고, 그 뒤를 나윤이 총총 따라 걸었다. 그리고 곧 명수가, 초조한 얼굴을 하고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먼저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늘 유쾌한 웃음과 호탕한 성격으로 수업 시간 학생들을 쥐락펴락 하시던 선생님이 어쩐 일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학생이 단유?”
선생님 곁에 있던 여자, 사모님이 묻자 단유는 명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명수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이를 알아 들은 단유가 다시 사모님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 단유는 입꼬릴 올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지선아.”
그러자 아빠와 엄마 사이에 서 있던 지선이 특유의 시크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안녕, 오빠.”
두 사람 모두,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구니,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그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