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79화 (379/956)

돌아보지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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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상상과 번민 속에서 괴로워하다 악몽까지 꾸며 잠을 설쳤던 나윤은 창으로 들어온 밝은 햇살에 고문을 받는 투사처럼 괴로워하다 힘겹게 눈을 떴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감상과 연습실에 갈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초조함이 먼저 나윤을 덮쳤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윤의 볼을 붉히게 만든 것은 ‘단유’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든 나윤은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악몽은 악몽일 뿐이지.’

나윤은 입꼬리를 슬쩍 늘리며 문자들을 확인하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의 거울을 보며 탱탱한 피부를 톡톡 건드려보고,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세안을 하고, 눈썹이라도 제대로 정리해야 하나, 고민도 하다가 통통 튀는 걸음, 을 걷는 기분으로 욕실을 나왔다.

신중하게 옷을 고르고, 어제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화장도 했다. 혹시 모르니 가진 것 중 가장 예쁜 가방에다 이것저것 짐을 챙겨 넣고 어깨에 메었더니 뭔가 허술했다. 거울을 보니 역시 머리가 허전했다. 하지만, 활동 스케줄도 없는데 굳이 샵에 가서 요란을 떨 일까지는 아니라 생각해서 나윤은 그나마 예쁜 모자로 머리를 가리고 집을 나섰다.

****

단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운동을 나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스케줄로 하루 운동량을 소화한 후, 집으로 돌아와 씻었다.

전과 다른 점은, 욕실에 있는 동안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마음껏 능력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두 겹의 회오리를 만들어 하나는 단유의 몸으로부터 일정 범위 안에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물보라가 세차게 돌면서 단유의 몸을 감싸니, 마치 세탁기 안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또 다른 회오리는 바깥으로 물방울이 튀는 것을 막아주니, 단유의 샤워는 놀랍도록 깨끗해서 명수나 하은은 매번 놀랬다.

“명수 너도 좀 본받아라. 저렇게 욕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니까, 다음 사람이 쓰기에도 얼마나 마음이 편하니?”

명수의 투덜거림을 배경음으로 깔고 단유는 방에서 외출을 준비했다. 옷이야 집히는 대로 입을 뿐이었고, 애초에 옷이 많지가 않은 탓에 고민의 대상도 아니었다. 벽에 걸린 작은 거울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단정하다 싶으면 끝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어? 너 어디 가니?”

“약속 있어요.”

“그럼 점심도 밖에서 먹을 거야?”

거실에서 게임패드를 붙잡고 있던 명수가 고개를 뽑아 들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

“아까 상미가 피자 사 온다고 했는데?”

“너희끼리 먹어.”

“알았어! 안 남긴다?”

명수는 입 하나 줄었다고 좋아하며 손을 흔들어 단유를 배웅했다. 오피스텔을 벗어나자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지리를 잘 몰라서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할 생각이었던 단유는 우선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단유는?”

“약속.”

“무슨 약속인데?”

“몰라.”

‘관심 없어’라는 얼굴로 입에는 피자를 오물거리며 두 손으로는 연신 게임패드를 격렬하게 조종하는 명수였다. 상미가 화면을 보다가 피자 한 조각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느낌이 싸한데.”

“응?”

“그냥 느낌이 별로 안 좋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단유가 갑자기 일요일에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고 하니까, 느낌이 안 좋다고.”

명수가 피식 웃으면서 또 한 조각의 피자를 입에 구겨 넣었다. 너무 큰 덩어리였는지 씹는 데 힘이 들어 보였지만, 명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단유가 저래 봬도 은근히 바빠.”

“걔 친구 없잖아?”

“친구가 왜 없어? 지태랑 채윤이도 있고, 나도 있고, 너는 친구 아냐?”

“그런 친구 말고. 일요일에 밖에서 부를 친구 말이야.”

“에이, 모르지 그건.”

하지만 상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계속 의심스럽다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명수의 팔뚝을 힘차게 때렸다.

“아야!”

“야, 너 혼자 다 처먹냐!”

“그게 아니고, 넌 배가 불러서 안 먹는 줄 알았지!”

“이 돼지야!”

“야, 하나 남았네.”

“이 돼지야!”

괜한 화풀이를 한다며 명수가 투덜댔지만, 상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남은 피자 한 조각을 씹어댔다.

“야.”

“응?”

명수는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영화 보러 가자.”

“영화?”

갑자기 웬 영화, 라며 돌아보니 상미가 볼을 씰룩이며 말했다.

“공포영화나 보러 가자.”

“왜?”

“그냥 오싹해지는 영화가 보고 싶어.”

“무서운 거 별론데.”

“가자.”

“그냥 이거 하면 안 될···.”

“일어나.”

“응.”

시무룩한 얼굴로 패드를 내려놓은 명수는 상미를 따라 집을 나섰다.

****

어제보다 더 뜨거운 햇살에, 비록 선크림을 발랐지만, 혹시라도 얼굴이 타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모자라도 가지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탄 나윤은 곧 가장 안쪽에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핸드폰의 잠긴 화면을 풀고 어제의 문자들을 확인했다.

「집 주소라도 알려줄까?」

「지금 오라는 말씀이신가요?」

「올래?」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요?」

「그럼 집은 왜 물어본 건데?」

「보고 싶다고 하시니까 그랬죠.」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오겠다는 거야?」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나윤은 연습실에서 단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 나 좋아해?」

「예.」

어? 이게 아닌데? 이렇게 쉽게 답이 나오나? 나윤은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단유의 마지막 메시지만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진짜?」

「좋아하죠.」

「그럼 사귀는 거야?」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 아닐까요?」

이게 진짜 누굴 놀리나? 나윤은 미간을 좁히고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눌렀다.

「나랑 그렇게 사귀기 싫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말씀드렸다시피 사귄다는 관계 설정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래요.」

무슨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니?

「사귀는 게 별거니? 서로 좋아하고 만나고 같이 지내는 게 사귀는 거잖아.」

「단순히 그런 의미로 교제를 이야기해선 안 될 것 같은데요. 제가 비록 이성관계에 대해 잘 모르긴 해도, 이성의 교제가 단순히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떠나 서로를 배려하는 의무와 존중받을 권리에 동의해야 가능하다고 봐요.」

와, 얘 뭐야? 살짝 입을 벌린 나윤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이어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런 것들이 합의되지 않은 사항에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밖에 되지 않을까요? 일방적인 배려나 존중되지 않는 관계는 서로를 미워하게 될 테니까요.」

나윤은 잠시 손을 놓았다. 만약 단유가 저런 것들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이 너무 가볍게 사귀자고 말한 건 아닌지 반성이 됐다. 그의 말처럼 상대를 존중할 마음을 가졌던가, 서로를 배려할 준비를 했던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안해.」

「뭐가요?」

「내가 너무 가볍게 굴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안 그래요.」

「아니야?」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씀해주셨다는 거 알아요. 눈에 보이던걸요.」

「그런 것도 보여?」

「보려고 하면 보여요. 특히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면.」

나윤의 심장이 덜컥 멈췄다. 이 남자, 꽤 고수다.

“좋아해?”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중얼거려 보던 나윤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좋아해?」

「네. 좋아해요.」

나윤은 다 집어 던지고 침대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내일 만나자.」

「어디서요?」

장소 따위가 중요할까? 어디서든 만나면 그만인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에라도 만나고 싶은데. 그래도 일단은 정확한 장소를 지정하는 게 좋겠다. 어렵사리 고민해서 나윤이 장소를 정하고, 단유가 이를 받아들였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가다, 내일을 기약하며 문자 ‘데이트’를 종료했다.

잠드는 순간까지, 나윤의 마음은 단순히 좋지만은 않았다. 혹시 이게 꿈은 아닐지, 아니면 자신만의 착각은 아닐지.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어야 실감이 날 것 같았다.

****

나윤을 만난 단유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 쪽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안녕?”

“인사가 왜 그렇게 어색해요?”

“그걸 꼭 집어서 말해야겠니?”

단유의 웃음에 나윤의 심장이 또 한 번 덜컥거렸다. 사랑을 하면 심장이 고장 난다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나윤의 심장이 계속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이러다 진짜 병이 날 것 같았다. 심근 경색 뭐 이런 거로.

“밥은?”

“같이 먹자고 했잖아요?”

“아, 그렇지. 먹어야지, 밥.”

“어디 안 좋아요? 얼굴이 하얀데.”

“···너 나 놀리는 거지?”

“아닌데요? 진짜 누나 얼굴이 너무 핼쑥해 보여서 그래요. 배고파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잠을 못 잤어요?”

“그러고 보니, 넌 얼굴색이 ‘참’ 좋다?”

“비꼬는 말투처럼 들리는데요?”

나윤은 얼른 정색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들렸어? 아니야, 내가 뭘 비꼰다고 그래. 맞다, 얼른 가서 밥 먹자. 배고프지?”

“별로 배는 안 고픈데, 일단 자리를 잡죠. 누나 너무 피곤해 보여요.”

하나도 안 피곤하지만, 나윤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가볍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너무 긴장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단유 말대로 몸이 안 좋은 것인지,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제 뭐 하지?”

“뭐 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건 많다.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고, 손잡고 거리를 활보하고도 싶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라는 남산 타워 전망대에 올라가 보고 싶기도 했다.

나윤은 눈을 돌리다 마침 들어오는 광경에 손가락을 뻗었다. 단유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나윤에게 물었다.

“영화요?”

나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도 나쁘지 않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나윤은 가만히 앉아서 쉴 필요가 있지 싶었다. 심하게 떨리는 동공과 가쁜 호흡이 불안하게 보인 탓이었다.

무인 판매대에 서서 볼 만한 영화를 고르고 있자니,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뭐 보고 싶어요?”

나윤이라고 딱히 눈에 들어오는 영화는 없었다. 이럴 땐, 빨리 시작하는 영화를 고르는 게 나으리라. 하루는 짧았고 할 일은 무척 많았으니까.

“팝콘 먹을래?”

“팝콘이요?”

“혹시 영화 볼 때 뭐 안 먹어?”

단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딱히 그런 건 없는 거 같아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라서요.”

“두 번째?”

“처음은 예전 초등학교 시절에 보육원에서 다 같이 관람하는 거였거든요. 이렇게 보고 싶은 영화 골라서 보는 건 처음이네요.”

아까는 심장이 덜컹거리더니, 이번엔 목이 울컥 막히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뭐가요?”

“혹시 아픈 기억을 건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에이, 아니에요. 그렇게 슬픈 추억도 아닌걸요.”

단유는 연한 미소로 나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가요. 시간 보니까 곧 시작하겠네요. 아, 팝콘 먹을래요?”

“아냐, 방금 밥 먹었는데, 별로 생각이 없네.”

“그래요. 그럼.”

단유가 몸을 돌릴 때였다. 나윤이 단유의 손을 붙잡았다. 단유가 손을 내려다보고 나윤을 바라보니, 나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손잡고 가자.”

단유는 나윤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요.”

****

“이거야?”

“여기 봐봐. 올해 가장 무서운 영화라고 되어 있잖아?”

“그건 광고잖아? 광고는 늘 그런 식인걸?”

“모르지, 난. 사실 난 이번이 두 번째인걸.”

“뭐가 두 번째야?”

“영화관에 오는 게 두 번째야.”

“진짜?”

“응.”

“처음은?”

“옛날에 보육원에 있을 때, 아이들이랑 단체 관람한 거.”

“아, 그렇구나.”

상미는 잠시 명수의 눈치를 보다 씩 웃으며 명수의 팔을 툭 쳤다.

“짜식, 그럼 누나 덕분에 좋은 구경 하게 됐네? 고맙게 생각해라.”

“웃기네. 나 무서운 거 안 좋아하거든?”

“괜찮아. 무서우면 누나가 눈 가려줄게.”

“웃기시네. 그리고 니가 무슨 누나야?”

“오구오구, 우리 명수 무서워요?”

“하지 마라.”

상미는 키득거리며 명수를 뒤에 두고 매표소로 향했다. 그 사이 명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영화관을 살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붐비는 영화관 매표소 앞은 한쪽에 만들어지고 있는 팝콘 탓에 고소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피자 한 판을 거의 혼자 먹다시피 했음에도 괜히 팝콘으로 눈이 가던 명수였다.

“어?”

명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무리 가운데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도 아는 ‘여자’의 손을 잡고 가는 모습도 발견했다.

“명수야!”

뒤에서 상미가 명수를 불렀다.

“이제 곧 시작이라는···.”

명수가 상미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뭐냐?”

“어? 아니 그, 무서운 영화 꼭 봐야겠냐고.”

“왜? 그렇게 무서워?”

명수의 시선은 상미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어깨너머로 힐끔거렸다.

“바꿔줄까?”

“아니, 그게 있잖아.”

곧 상미도 명수의 시선을 알아챘다.

“뭔데? 뭐 있어?”

“아니, 잠깐만!”

명수가 급히 상미를 불러세웠다.

“돌아보지 마.”

“왜?”

“···보면.”

상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주위를 살피던 상미가 천천히 명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뭔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굴어?”

명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 사실은 저기 팝콘 말이야. 보면 괜히 먹고 싶어질까 봐. 아예 보지 말자고.”

피자도 한 판 먹고 왔는데, 팝콘까지 먹으면 살찐다, 는 명수의 변명에 상미가 피식 웃으며 명수의 팔을 툭 쳤다.

“먹기는 니가 다 먹었지, 돼지야.”

상미는 시크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팝콘 대(大)자로 하나 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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