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지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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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단유는 우선 샤워부터 했다. 사실 나윤을 만나러 가기 전 온몸을 감싸는 ‘냉풍’으로 땀을 바짝 말리긴 했지만, 그런다고 몸이 깨끗해질 리 만무했기에 종일 찝찝함을 참아야만 했다.
게다가,
“에휴.”
단유는 떠오르는 잡념을 한숨에 실어 보내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수도 레버를 가장 끝으로 옮겨도 여름이라 그런지 원했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아 아쉽긴 했지만, 몸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씻고 나올 무렵, 축구부 연습을 마친 명수가 집에 돌아왔다.
“어? 이제 씻었어?”
“응.”
점심도 고사하고 먼저 떠났던 단유가 이제야 씻었다? 욕실에서 몸을 불리고 때를 밀었다해도 남을 시간인데?
“뭐하다가 이제 씻는데?”
단유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물이 미지근하더라.”
“왜?”
“···여름이라서?”
단유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툭툭 털며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갔다. 뜻 모를 대화에 명수는 갸우뚱거리다 일단 씻자는 생각으로,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아이씨, 차갑잖아!”
욕실에서 들려오는 명수의 비명같은 불평쯤은 귀에도 들리지 않는 단유였다.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머리를 말리니 가만히 둬도 잘 마른다. 머리가 길었다면 모를까, 짧은 머리라 헤어스타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는 단유였다. 단유의 신경은 오로지 눈앞의 노트에 가 있었다. 아니, 노트 너머에 있는 선명한, 기억의 단상(斷想)에 붙들려 있었다.
****
나윤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누웠다. 이럴 땐 연습실이 지하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기획사에는 연습실이 위층에 있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연습하다가 지치면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보며 심신의 안정을 달랜다고 들었다. 과연 그게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에만 있다 보면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에 그런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같이 더운 여름날이면,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서늘한 이곳이 더 도움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에어컨이 있긴 해도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아픈 것보단 서늘한 지하실이 더 낫지 않을까?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미역처럼 들러붙었다. 얇은 티셔츠도 땀에 젖어서 곧 다른 옷으로 바꿔입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연습실에 올 때는 갈아입을 옷도 기본적으로 챙겨오는 편이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진짜 문제는 더위도 잊게 할 만큼의 고된 연습도 아니었고,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민망한 티셔츠도 아니었다.
천장을 봐도 떠오르는 얼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거울을 봐도 떠오르는 얼굴, 눈을 감아도 남아 있는 잔상(殘像)이 문제였다.
“아, 미치겠네.”
나윤은 벌떡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오프숄더 티셔츠도 아닌데 어깨가 살짝 드러나면서 숨겨져 있던 쇄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안 돼, 연습해야 돼!”
주문을 걸 듯, 자신에게 다짐하는 나윤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다시 음악을 틀기 위해 컴퓨터로 향했다. 컴퓨터를 조작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으려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왜 핸드폰을 잡고 그래!’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손가락은 이미 주인의 뜻을 거스르며 핸드폰 액정 위를 미끄러져 통화목록을 누르고 있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손가락은 선택의 순간에 ‘문자’를 선택했고, 이성이 나윤을 제지하기 전에 손가락이 재빠르게 메시지를 완성 시키고 있었다.
「어디야?」
나윤은 자신이 고심한 끝에 만들어낸 메시지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긴, 집이겠지. 집일 거야. 고작 물어보고 싶은 게 그거야? 스토커니? 어디냐고 왜 물어봐? 니가 진짜로 궁금한 게 그거야? 아니잖아.
「뭐해?」
뭐 하는지 알아서 뭐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고 싶은 거야? 미저리야? 왜 이렇게 질척거려? 니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아니잖아?
「보고 싶어.」
조금 전까지 계속 같이 있어 놓고 또 보고 싶다고? 그러고 싶니? 그러다 이상한 여자라고 욕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물론 그럴 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넌 자존심도 없니?
“연습 좀 하자! 좀!”
하라는 안무 연습 대신 모노드라마를 연습하는 듯 나윤은 혼자 중얼거리고 소리치고 팔을 휘젓다가, 제풀에 지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었다.
‘거절하면 어쩌지?’
나윤은 단유가 언제 대답할지, 뭐라고 대답할지가 두렵고 기대됐다. 솔직히 ‘비장의 수’를 쓰긴 했는데, 통할지 모르겠다.
****
1시간 전.
“대답해.”
단호한 나윤의 태도에 단유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요···.”
“잠깐.”
나윤은 손을 들어 단유의 말을 막았다.
“생각해보니까, 지금 듣는 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너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할 거 같아.”
“아니, 굳이 시간을···.”
“아니야. 지금 안 들을래. 생각 ‘충분히’ 하고 대답해줘. ‘충분히’하고 ‘신중하게’ 대답해. 알았지?”
특정 단어에 강하게 악센트를 준 나윤은 단유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먼저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봐.”
“네?”
“집에 가서 생각해보고 연락해. 아니 와서 대답해줘. ‘충분히’ 생각하랬다. 대충 생각해보고 대답할 생각 하지 마.”
이런 문제를 대충 생각할 단유도 아니었지만, 나윤은 단유에게서 반드시 다짐을 듣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단유를 노려보았다.
“그, 그럴게요.”
“됐어. 그럼 일어나서 가봐. 나 연습할래.”
단유는 나윤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기분이었다. 대답하지 말라는 의미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집에 가라고? 괜찮은 걸까?
“니 말대로 꿈 포기하지 않을 거고, 이사님 말처럼 나 실력 모자란 건 아니까, 더 열심히 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죽을 각오로 연습할 거야.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연습만 할 거야. 그러니까, 방해되니까, 너 가. 가서 생각하고 생각 끝나면 연락해. 아니, 연락하지 말고, 직접 와서 말해. 전화로 듣는 거 별로 안 좋아. 얼른 일어나.”
계속 오락가락 하는 건, 나윤의 본심과 이성이 충돌하는 까닭일 테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단유는 나윤의 박력에 놀랄 따름이었고, 곧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이래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 갈피를 못 잡는 마당인데 나윤은 아예 등을 떠밀며 단유를 연습실 밖으로 몰려 했다.
“알았어요. 그럼 가볼게요. 나중에···.”
“그래, 나중에 연락하고 찾아와.”
“그럼, 언제?”
“생각이 정리되면.”
그러니까, 그게 언제까지라는 거지? 만약 생각이 정리가 안 되면 1년이 지나도 상관없다는 소리인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라고 단유가 생각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정확히 정해주는 게 서로에게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윤은 이미 몸을 돌려 전면 거울을 보며 손목을 이리저리 꺾고 있었다. ‘나 이제 너 안 보고, 연습만 할 거야’라는 의지를 손목에 담은 듯 꽤 격하게 꺾는 모습이 되려 걱정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단유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해도 나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거울을 통해 슬쩍슬쩍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가봐.”
결국 단유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연습실을 나섰다. 일부의 전등에만 불이 들어와 어둑한 복도를 지나던 단유는 대충 이쯤에서 ‘능력’을 이용하려 했다.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김단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마.”
응? 이건 또 무슨. 타닥타닥 복도를 총총걸음으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단유를 뒤에서 껴안는 나윤이었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헉’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나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입을 막았다.
“김단유.”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겨우 삐져나온 나윤의 목소리는 비브라토처럼 떨리고 있었다.
“용기 내게 해줘서 고마워.”
단유는 어둑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진심이야. 진심으로 고맙고, ···좋아해.”
그렇게 잠시 있던 나윤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다시 타닥타닥 걸음소리가 들리더니 연습실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는 정적만 남았다. 그런 와중에도 단유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시선은 어둑한 복도의 끝, 흐릿한 출입구를 향했다.
****
“선생님.”
“왜?”
“단유가 이상해요.”
“내가 봐도 그래.”
명수와 하은은 식탁에서 단유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도 단유는 멍한 눈으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씹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단유야.”
“예?”
“김치가 질겨?”
“네?”
무슨 말이냐고 묻는 단유에게 하은이 김치를 가리켰다.
“김치 한 조각을 그렇게 열심히 씹고 있으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언제부턴가 단유가 신김치를 좋아한다고 느껴져서, 슈퍼에서 신김치만 골라 사놓고 있긴 했지만, 저렇게 곱씹을 정도인가 싶었다.
“아.”
단유는 자신이 얼이 빠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뒤, 얼른 식사를 마칠 요량으로 서두르기 시작했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니?”
“아뇨.”
“아, 맞다.”
명수가 손뼉을 치자 단유가 흠칫 놀란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하은은 명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명수는 씩 웃음을 지었다.
“단유, 이제 축구부에요.”
명수는 오늘 감독님이 단유에게 했던 제안과 단유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하은에게 알려 주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걱정이었니?”
“아뇨, 뭐 그런걸 가지고···.”
“만약 너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하지 마. 니가 이것저것 잘하는 팔방미인이라도 결국 정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으니까. 니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시간이 모자라니까, 만약 그런 게 걱정이 되는 거라면 다시 감독님께 이야기 해. 혹시 미안해서 못하는 거라면, 선생님이 가서 대신 이야기해줄 수도 있고.”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감독님도 꼭 연습에 참여 안 해도 된다고 했고, 시합 있을 때도 이름만 올릴 뿐이라고 했으니까요.”
진짜 골키퍼가 부상을 입지 않는 이상은 단유가 경기장 위로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뭐, 니가 알아서 잘 할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 되니까 그래.”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하지만 전혀 문제 될 거 없으니까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이후로는 단유도 머릿속을 비우고 식사에만 전념하려 했다. 하지만 가끔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단유의 젓가락은 허공에서 멈칫하곤 했다.
****
나윤은 그날 레슨까지 모두 받은 뒤, 회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나윤이 연습실을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한창인 11시 무렵이었다. 1층의 커피숍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지만, 손님은 많지 않아 보였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나윤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다 혹시 전화나 메시지가 온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렇지만 부재중 통화도 없는 조용한 핸드폰이었다.
“생각하랬다고 백날천날 생각만 할 거야?”
불과 하루도 안 지났건만, 나윤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애초의 제안은 본인이 했지만, 당장 말을 얼버무리는 단유의 태도에 불안감을 느껴 상황을 반전시키고픈 마음에서 즉흥적으로 저질렀을 뿐이었다. 그 시점에서 만약 단유가 ‘싫다’ 고 했다면 그 충격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사실 단유 정도로 ‘잘 생기고’, ‘머리 좋고’, ‘멋이 있는’ 남자라면 나윤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예쁘고 잘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윤의 자기 비하와 단유의 대답에 대한 두려움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울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무심코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어?’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보내질 때 나는 기묘한 효과음이 나윤의 정신을 깨웠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낮에 이것저것 문자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었다. 하지만 겁이 나서 보내지는 못하고 그냥 뒀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여태 남아 있다, ‘실수’로 ‘보내기’가 된 것이다.
「보고 싶어.」
미치겠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꾹 눌러도 보고, 밀어도 보고, 여러 번 누르기도 해봐도, 취소는 되지 않았다. 입에서 ‘어떡해’만 연발하는데, 갑자기 메시지 도착 알람음과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요?」
“악!”
나윤은 핸드폰을 침대 이불에 집어 던지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거실에 계시던 어머니가 나윤의 비명을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후 입속에 이불을 집어넣고 소리를 질렀다. 읍읍 소리를 질러도 속이 안 풀렸다.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핸드폰 알람음. 차마 보기가 두려웠지만, 나윤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들었다.
「누나 집이 어딘지 몰라서 가지를 못하겠네요.」
알면 오려고? 이 무슨 답인가 싶어 나윤은 눈만 꿈뻑꿈뻑 거리며 메시지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의미가 파악이 안 된다. 자기도 보고 싶은데 정말 집을 몰라서 아쉽다는 뜻인지,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집을 핑계 대는 것인지.
“얘는 왜 이렇게 매번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나윤은 다음 메시지로 집 주소를 알려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