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77화 (377/956)

돌아보지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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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었나?”

앞서가던 박 이사가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단유가 먹었다고 대답하자 박 이사는 말없이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숍의 점원이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지만, 박 이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칸막이가 있는 자리로 데리고 갔다.

“난 약속이 있어서 오래 시간을 내지 못한다. 그러니 짧게 이야기를 하지.”

나윤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긴장한 상태였다. 실장과 다르게 박 이사는 존재 자체가 카리스마였다.

“정 나윤.”

“네.”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넌 내가 뽑았다. 기억하지?”

“네.”

“가디스R의 처음을 내가 만들었듯, 끝을 내도 내가 낼 거야.”

나윤은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눈도 쳐다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나 아직 손 뗄 생각 없다. 비록 지금 당장 널 내보내기엔 시장 상황도 좋지 않고, 팀 문제도 있다. 솔직히 강 실장 말대로 너 혼자로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도 들고.”

솔로 가수로 성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현 가요계에 고등학생 시절 데뷔하여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인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워낙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터라 가능했던 것. 나윤은 스스로 돌아보건대 그 정도 실력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욕심을 낼 생각도 없었다.

“다음 팀 메이트가 될 사람을 물색 중이지만, 아마 ···수련이 걔 만큼은 안 될 거다. 그러니 그때는 니가 주축이 되어야 한다. 네가 수련이가 했던 역할을 해야 한단 소리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박 이사의 성에는 차지 않는 반응이었나보다.

“노래, 춤, 연기 모든 면에서 수련이보다 앞서야 함은 물론, 네 옆에 올 사람을 네가 끌고 나갈 만큼의 실력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느슨하게 하면 회사에서, 아니 내가 어떻게 널 믿을 수 있겠나?”

나윤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자신이 수련 언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그랬다.

“강 실장이 말은 험하게 했지만,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아. 회사가 너한테 기대하는 바를 네가 100% 부응해도 될까 말까인데 적당한 수준으로 컴백이 가당키나 하겠냐는 거다. 물론 너도 회사에 불만이 있겠지.”

“아뇨, 불만 없어요.”

“없다면 다행이지만, 있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때쯤에 박 이사는 단유의 눈치를 힐끗 본 뒤, 말을 이었다.

“갤럭시즈가 떠난 건, 솔직히 회사 차원에서는 오히려 잘 된 거라고 생각한다만, 수련이 떠난 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일이고 손해도 크다. 때문에 회사가 향후 전략을 짜는데 많은 차질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더더욱 너한테 기대하는 바가 많다는 점, 명심해주었으면 한다.”

말을 맺을 때쯤 다시 단유를 바라본 박 이사는 예전에도 단유가 갤럭시즈에 대해 꽤나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을 기억하기에, 자신의 발언에 어떤 반응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박 이사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침착한 단유였다.

“그리고 단유 군?”

“네.”

“너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일전에 말한 바와 같네.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은 오늘도 확인했어.”

박 이사의 칭찬에도 단유의 눈동자는 어떤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연성’이라는 이름은, 그래, 솔직히 말해서 ‘연성’이라는 이름에 기댔던 부분도 사실이야. 하지만, ‘연성’이 아니더라도 자네는 여전히 탐낼만한 구석이 많은 인재야.”

자기 딴에는 위트였다고 생각했는지, 박 이사가 입꼬리를 늘렸지만 단유는 그 뒷말이 본론이라고 생각해 여전히 침착한 자세를 유지했다. 과연 박 이사의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하지만, 나윤은 지금 조심해야 할 단계네. 아니 조심을 떠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될 상황이지. 솔직히 나윤이가 모든 걸 포기하고 공부만 하겠다고 해도 붙잡고 말려야 할 상황이란 말이지. 하물며 사적인 관계를 핑계로 시간을 낭비하는 꼴은 용납하기 힘들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네.”

“역시, 자네는 영민한 친구야.”

박 이사는 소매 속에 숨어 있던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

“그런데 이사님.”

단유의 부름에 박 이사는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무슨 일인가?”

“이건 순전히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야기여서 설득력이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전, 회사 입구 앞에서 실장을 대할 때의 모습과 달리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라 박 이사는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이야기해 보게.”

“예전에 저한테 해주신 말을 떠올려보면, 제가 이사님의 눈에 든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하셨어요. 첫 번째는 자기관리가 철저해서이고 두 번째는 컨텐츠를 만들 수 있어서라고 하셨죠.”

“그랬지.”

자신이 했던 말을 상대가 잘 기억하고 있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 이유들이 ‘크리에이터’의 자질이라고 말씀해주셨고요. 이를 근거로 생각해보면, 박 이사님이 지향하시는 아티스트는 모두 이런 자질을 가지길 원하시는 것이라 보이네요. 맞나요?”

“맞네. ‘크리에이터’가 이 시장에 오래 살아남을 유형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말씀은 나윤 누나 역시도 그런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가지길 원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박 이사의 웃음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굳은 입매를 들키기도 전에 눈을 아치형으로 기울이며 표정을 바꿨다.

“맞네. 나윤이 역시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지.”

“네. 그럼 분명 자기관리라는 첫 번째 이유에 근거해서 요구하는 박 이사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란 말씀이시겠죠.”

“그렇지!”

“그런데 두 번째 이유라면 조금 생각이 다르다 느껴집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 근거한 것이라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생각만 많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해봐야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24시간 365일을 연습실에서 연습한 들, 노래나 춤 실력은 좋아질지 모르겠지만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배양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단유의 합리적 지적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던 박 이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당시에도 제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그 부분이었거든요. 전 나이도 어리고 삶의 경험도 부족하고 제 생활 방식이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에 불과했는데, 제가 어떻게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던 거죠. 노래도 제대로 불러본 적 없던 저와 계약을 하겠다고 하시니, 당연히 확신이 없던 저로서는 이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요.”

그런 이유였던가, 박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앞의 어린 친구는 남들과 다른 면이 있었다. 저 나잇대의 연습생들과 비교해봐도 저렇게 조리 있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뿐 아니라 생각이 빠르고 깊다. 저러니 ‘연성’이 아니더라도 탐이 날 밖에.

“그럼···.”

“물론 이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요. 이전과 같은 핑계지만, 공부가 더 재미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도 하고요.”

“그렇군.”

박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덩달아 나윤과 단유도 일어섰다. 박 이사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말했다.

“언젠가는 자네가 꼭 생각을 바꿔서 내게 찾아오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나윤.”

“네.”

“시간이 없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지. 그리고··· 단유군의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그 부분은 좀 더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보네. 현재의 나윤이 너에겐 경험을 쌓는 시간보다 실력을 쌓는 게 더 급선무라고 생각하니까. 변덕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내 판단은 그렇네.”

“네, 이사님.”

나윤은 조용히 이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적어도 누구처럼 윽박지른 것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 롤(role)까지 제시해 준 마당이 아닌가.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해도, 그 말대로 따르고 가 볼 만하다고 판단한 나윤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이사의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

박 이사가 약속을 위해 나간 뒤, 두 사람은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조용히 연습실로 들어왔다. 조용한 연습실 한쪽 벽에 마련된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그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윤은 생각이 너무 복잡했다. 먼저 고백한 마당인 데다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고, 박 이사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머릿속마저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복잡해진 탓이었다.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실장의 폭언에 자기보다 그가 더 상처받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나윤이었다. 하지만 박 이사의 말처럼, 실력을 향상시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보지 않고 달릴 필요가 있다는 것에도 공감하는 나윤이었다. 솔직히 회사의 미온적 태도에 불만이 있었지만, 박 이사의 말대로라면 그런 것과 무관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컴백을 시킬 요량이니 그렇다면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렇다면 단유와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단유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걸까?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굽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당장 이 ‘남자’를 내 곁에 두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누나?”

“응?”

“이사님 말씀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 뭐. 응. ···그래.”

나윤은 어쩐지 단유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오늘일까? 왜 오늘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

“누나는 꿈이 가수잖아요.”

나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단유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그 뉘앙스가 결코 듣기 좋은 내용을 아닐 것 같았다.

“비록 지금 힘들어도, 포기 안 할거잖아요?”

잠깐 주저함이 있었지만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고, 3년 전 기획사를 들어올 때부터 꺾이지 않은 미래였고, 작년 데뷔 이후 손에 닿았던 희망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누나의 의지가 중요한 거네요.”

‘나의 의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윤은 단유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래서 사귀지 말자고? 아니면 일도 사랑도 포기하지 말란 말인가?

“힘들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거죠. 이번처럼 말이에요.”

“이번처럼?”

“처음 저희 학교 앞에 왔을 때요, 그때 누나 얼굴이 정말 힘들고 지쳐서 쓰러질 것처럼 보였었는데, 지금은 얼굴에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있을지는 몰라도 훨씬 밝아졌어요. 역시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제 다시 누나의 꿈을 향해 달려요. 응원할게요.”

‘응원할게요’라는 말에 나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개를 홱 들어 단유를 바라보는데, 눈꼬리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말은, 나랑 사귀지 않겠다는 뜻이야?”

단유는 난감해하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일단 가정을 해서요, 만약 제가 누나랑 사귀자고 하면, 누나는 사귈 거에요? 지금?”

“당연히···.”

나윤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갈팡질팡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사귀면 좋을 것 같은데, 막상 사귄다 생각하면 이사님의 말이 걸렸다.

“당연히?”

“······.”

되묻는 단유의 말에도 역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윤은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를 움켜쥘 듯 손에 힘을 주었다.

나윤의 그런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유는 태연하게 대답을 기다리며 반응을 살피다가 피식 웃었다.

“누나.”

단유가 불러도 나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에게로 돌려진 물음에 대답할 용기도, 정답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단유를 보기 싫었다.

그때 단유가 나윤의 손 위로 자신의 한 손을 올렸다. 그 따뜻한 스킨십에 놀란 나윤이 황급히 손을 뺐다. 그리고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흠, 어쩐지 격한 반응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면 당연히 놀라지!

“사실, 전 사귄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예전부터 그랬거든요.”

예전? 나윤의 눈이 홱 돌아가며 단유를 째려보았다. 예전이라니? 예전의 여자 친구? 여자관계 복잡한 남자였어? 라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껏 누군가와 사귄다는 전제로 교제를 나눠본 적이 없네요. 아마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겠죠.”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너무 설득력이 떨어져!

“뭐, 그래서 누나의···‘고백’?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사귀자’는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고요. 대신 이렇게 해요. 아무 때나 전화해요. 힘들 때, 외로울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야기를 나눠요. 답답한 속이 풀릴 때까지. 그리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요. 만나는 거야, 뭐 어때요? 연습실에서 만나도 되고,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아니면 도시락을 사서 여기서 먹어도 되고. 안 그래요?”

나윤은 단유의 ‘천진난만’한, 아니 ‘순진한’, 아니 얄미운 입꼬리를 쭉 늘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고민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발끈하는 기분이 들어, 나윤은 단유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

“네?”

“그래서 사귀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네?”

“사귀자! 나랑 사귀자고!”

답은 정해져 있어! 넌 대답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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