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76화 (376/956)

돌아보지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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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껌뻑거리던 단유가 볼을 긁적였다. 매끈한 볼이 살짝 붉어진 것 같은데 부끄러워서 그런지, 난감해서 그런지, 아니면 해가 뜨거워서인지 알기 어려웠다.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 단유를 보며, 나윤은 괜히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저기···.”

단유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뭔가를 이야기하려 하는 순간, 그 입술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울 때였다.

“거기서 뭐 해?”

나윤은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회사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이는 바로 실장님이었다. 실장 곁에는 같은 사무실 직원 몇몇이 뒤를 따르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나윤은 혹시나 자신이 고백하던 장면을 들킨 게 아닐까 싶어 창피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슨 정신으로 회사 입구에서 그랬던 걸까?

“실장님.”

살짝 떨리는 나윤의 음성을 실장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너 연습한다고 내려가더니 여기서 뭐 해? 어, 넌?”

실장은 단유를 알아보았다.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넌 또 웬일이냐? 혹시 정산 때문에 왔어?”

단유라는 애가 올 일이 몇천 원도 안 될 정산금 때문일까 싶지만 그 외의 이유는 생각나지 않던 실장이었다.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나윤을 가리켰다.

“누나 보러 왔어요.”

실장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왜? 설마 너희들 연애하냐?”

나윤의 얼굴이 신호등 정지 신호처럼 붉게 변했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단유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요. 같이 밥이나 먹으려고요.”

나윤은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라는 단어에 놀란 탓이리라.

“왜 같이 밥 먹어? ···야, 정나윤! 너 여기 놀러 왔어? 연애하러 왔어?”

이상한 방향으로 정곡을 찌르는 실장에게 단유가 말했다.

“연습하고 있던 걸, 제가 데리고 나왔어요. 어차피 점심시간이기도 했고요. 혹시 그게 잘못이라면 사과드릴게요.”

“당연히 잘못이지!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얘는 연예인이야. 연예인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잘못 오르면 그 날로 연예계 활동은 끝이라고. 나윤이 너도 몸가짐을 조심해야 시기란 거 몰라서 그래?”

실장은 마침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독한 혀를 휘둘렀다. 뻔뻔한 실장의 말에 나윤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 눈이 신경 쓰였다면 제대로 관리나 해줄 것이지, 가디스R 앞으로 배정되었던 밴도 렌트 회사에 돌려주고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이제껏 별말 없다가 이제 와서 사람들 시선을 걱정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라 나윤이 볼을 부풀릴 때, 단유가 한 발 나서며 실장에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은 거리에서 이러면 입방아는 물론이고 사진도 찍힐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실장의 얼굴이 살짝 굳으며 주위를 눈으로 둘러보았다. 넓지 않은 회사 앞 골목은, 비록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진 않았지만, 공개된 장소인지라 충분히 주위의 이목을 끌 장소였다. 게다가 1층은 커피숍이어서 비록 회사로 직행하는 계단 입구와 거리가 있지만, 큰 소리를 내서 좋을 건 없었다. 실장은 나윤을 향해 말했다.

“난 이들이랑 점심 먹고 올 테니까, 나윤이 넌 연습실로 가 있어. 단유는 이만 돌아가고.”

“조금 있다 돌아갈게요.”

“뭐?”

단유의 대답에 실장은 다시 쌍고리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밖에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 걱정되신다니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겠다고요. 그것도 안 되나요?”

“뭐 이런 개념 없는 경우가 다 있어? 방금 안 된다고 이야기했잖아?”

“그 개념부터 설명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뭐?”

단유의 대답에 실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실장님이 두려워하시는 게 만약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라면, 전 두 가지 모두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겁니다. 회사 내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니, 사람들의 시선에 띌 일도 없고요, 그렇다면 딱히 우려하실만한 상황도 없을 것 같네요.”

“허, 나, 참.”

실장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어린데, 키는 실장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인지라 아래로 내려다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인 실장은 기를 죽일 요량으로 한껏 눈에 힘을 주었다.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말을 못 알아듣는 거냐,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냐? 응? 만나지 말라고. 이야기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왜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른다고 기가 죽을 단유가 아니었다.

“이상하네요. 제 귀에는 굉장히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들리는 요구를 하시는군요.”

“이 새끼가.”

“단유야. 그만해.”

기가 죽은 건 오히려 나윤이었다. 단유의 팔을 붙잡고 단유를 말리려 했지만, 단유는 그저 실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윤 누나랑 알고 지낸 지가 1년 가까이 됩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나눌 정도입니다. 게다가 실장님의 말씀처럼 외부 사람들의 눈에 오해를 살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혹시 오해를 살 일이 있다는 실장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회사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실장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들은 대부분 해소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무작정 안 된다고 하시면 저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야, 김단유. 어디서 못된 것만 처배워서 주둥이를 나불대는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시키면 얌전히 따라, 이 새끼야. 오냐오냐해주니까 아주 겁도 없이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어, 이 새끼가.”

나름 험한 세계에서 밑바닥부터 헤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자부하는 실장은 단유의 행동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누구한테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개기는 거야?

“방금 하신 말씀은 꽤 불쾌하네요. 그저 제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실장님의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허, 진짜 이 새끼. 고아 새끼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악질인 줄은 몰랐네.”

특정 단어에 사람들의 얼굴이 싹 굳었다. 말한 당사자만 의식하지 못하는지 분에 찬 얼굴로 단유를 노려볼 뿐이었다.

“실장님, 그만 하세요.”

“실장님이 참으세요.”

실장 뒤에 있던 직원들이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실장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어설픈 부채질이 불길을 더 키우는 법이다.

“놔봐, 내가 오늘 이 새끼 버릇 제대로 가르쳐야겠어. 대체 어디서 이런 종자가 나타나서 말이야, 어른한테 꼬박꼬박 말대꾸나 하고 말이야, 응? 사람들이 오냐오냐해주니까 아주 기가 올라서 말이야. 야, 어디 니가 잘나서 사람들이 오냐 오냐 해준 줄 알아?”

‘연성만 없었으면 넌 죽도 밥도 안 될 놈이었어, 알아!’라고 말을 잇는 실장의 폭언에도 단유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연성이요?”

“그래, 새끼야? 이제 정신 좀 차리겠냐? 고아 새끼가 운이 좋아서 돈줄을 잡았던가 본데, 이제는 아니라며? 그럼 새끼야,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 생각을 해야지, 어디 버릇없게 거만이나 떨고 지랄이야. 혹시 박 이사님이 너한테 스카우트 제의도 하고 그러니까 그게 네 실력 때문에 그런 줄 알아? 웃기지 마. 너 같은 얼굴, 이 바닥에 널리고 널렸어. 아, 그렇네. 너 박 이사님 만나려고 왔지? 그래서 회사 근처에서 기웃거린 거지? 괜히 나윤이 핑계 대고 회사 안으로 들어와서 얼쩡거리다가 박 이사님 만나면 한 번 빌어보려고? 꺼져, 거지새끼야. 너 같은 놈은 줘도 안 써.”

“실장님!”

나윤이 먼저 폭발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닥쳐!”

나윤은 너무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키다 딸꾹질을 했다.

“너도 지금 정신 못 차리고 이러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 후속곡? 야, 네가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어느 회사가 후속곡을 만들어줘? 응? 가디스R? 웃기고 있네. 솔직히 수련이 그년 아니었으면 말이야, 너···.”

“실장님. 실장님!”

주위 사람들이 허겁지겁 실장을 말렸다. 하지만 실장은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기에 그들의 만류에도 말을 계속 이었다.

“됐어, 놔봐. 할 말은 해야 애가 정신 차릴 거 아냐? 정나윤, 네가 네 실력으로 가디스R이 된 거 같아? 웃기지 마. 너 혼자로는 10년이 지나도 턱도 없는 일이야. 고작 그런 실력으로 니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말이야. 뭐? 일정 변경을 해 달라? 고3이라고? 차라리 공부해. 다 때려치우고 공부나 해. 그게 더 낫겠네. 응? 이럴 거면 차라리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가시라고.”

실장의 폭언에도 직원들은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나마 한가한 오후 시간대라 골목을 지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터였지만, 주변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이 듣지 말란 법도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만 궁리하며 눈치를 보았다.

나윤의 빨개진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입술을 너무 꽉 깨물어서 입술 아래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솔직히 그동안 실장에게 심한 말을 여러 번 듣긴 했어도, 오늘처럼 심한 말은 평생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자신에게 한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유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저토록 무자비한 언어로 폭력을 행사함에도 자신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고 화가 났다.

그때 단유가 언제 뒤를 돌아섰는지, 자신을 향해 돌아보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괜찮아요?’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으니, 더 심한 감정의 격류가 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감정을 제어해보려 했다. 사람도 많은 이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단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장님의 말씀 중에 단 한 마디도 제가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할 부분이 없네요.”

“하, 이 새끼 진짜···.”

“솔직히 저한테 하신 말씀은 그냥 참을 수 있어요. 본인이 그렇게 느끼신다는데 제가 뭐라고 말할까요. 하지만, 누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정말 참기 힘드네요.”

“안 참으면 어떡할 건데? 응? 어떡할 거냐고?”

“소속 연예인에게 이렇게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시면서 어떻게 실장이라는 직함으로서 회사를 위해 일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이 새끼, 듣자 듣자 하니까.”

“그렇죠, 박 이사님?”

나윤은 얼른 눈을 떴다. 단유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뒤로 돌린 실장과 어쩔 줄 몰라하는 직원들, 그리고 그 직원들 뒤로 멋들어지게 머리를 뒤로 넘긴 박 이사가 굳게 입술을 다문 채로 실장과 나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강 실장. 아니, 강 동수 씨.”

“아니, 저기 이사님, 그게 아니고요.”

“강 동수 씨 말이 맞아요.”

실장은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박 이사를 보는데, 박 이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단유 저 아이, 연성이라는 연줄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죠. 저런 얼굴? 널리고 널렸어요. 굳이 내가 저 아이를 스카우팅해야 할 이유가 없죠.”

자기 말이 맞다는 이사의 말에 실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려야 했다. 말의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이 나온 타이밍이 중요했다. 즉,

‘저기서부터 듣고 있었구나.’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런데, 나윤이는 아니지. 지금 나윤이까지 우리 회사 나가면, 그 대신 누굴 키워? 응? 니가 수련이를 내쫓은 거로도 모자라서 나윤이까지 내보내겠다고?”

실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수련은 제가 내보낸 게 아닌데.’

“니가 뭔데 애들을 나가라 마라야? 내가 뽑은 애야, 내가 키운 애야. 근데 숟가락 얹는 것도 모자라서 어디서 밥투정이야? 응? 아예 밥그릇 빼앗아 줄까? 방구석에서 숟가락만 쪽쪽 빨게 해줄까? 그러고 싶어?”

박 이사가 이 바닥에서 구른 시간에 비하면 실장은 하룻강아지도 못 된다. 게다가 위계 상으로도 한참 위에 있는 분이다. 실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다.

“그게 아니고요, 이사님. 말이 좀 헛나오긴 했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나윤이만큼 하는 애 찾으라고 시켰더니, 나윤일 내쫓겠다고? 너 스파이지? 그치? 우리 회사 망하게 하려고 들어온 놈이었지? 그러고 보니까 너 들어오고 나서 엉망이 됐네. 아, 이제 알겠다. 우리 회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너 때문이었네. 그렇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지들? 됐네, 너만 나가면 되겠네. 되겠어.”

“이사님···.”

“지금 어디 가는 길인가? 점심 먹으려고? 그래 먹고 와. 먹고 와서 짐 싸. 마지막 점심인데 내가 사줄게. 법인 카드 빌려줄까? 거하게 먹고 올래?”

“이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더위를 먹어서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태 시원한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 있다가 나온 주제에 더위는 무슨.

박 이사는 끌끌 혀를 차며 실장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너희 둘.”

단유와 나윤을 바라보며 박 이사가 불렀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고. 자네들은 밥을 먹든, 짐 싸는 걸 도와주든 알아서 해.”

“이사님, 그게···.”

“정 남길 말이 있으면 기다려. 난 이 애들이랑 먼저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까.”

박 이사는 두 사람을 데리고 1층 커피숍 입구 쪽으로 향했고, 실장과 직원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돌아보았다. 돌아본들, 답은 없었다.

실장이 주차장을 향해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때, 대리 한 명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렸고, 잠시 후, 직원들은 실장을 남긴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회사 입구 앞에서 실장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복잡한 상념 속을 헤맸고, 뜨거운 7월의 햇살에 얼굴이 푹푹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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