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75화 (375/956)

돌아보지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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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어.”

“다친 거 아니에요?”

“···괜찮아.”

“그런데 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나윤은 붉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오늘 단유를 만날 거라고 전혀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집을 나올 때 아무런 준비도 안 했다. 화장도 안 한 ‘진짜’ 민낯이란 말이다!

“어디 봐요.”

“괜찮아.”

단유는 나윤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윤은 자신을 향한 시선이 여간 뜨거운 게 아니라 생각하며 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하은이 말한 ‘여자 친구’란 단어가 떠올라 단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어?”

나윤의 목소리가 바늘처럼 뾰족했다. 엉망인 꼴로 연습실에 주저앉은 모습을 보고 단유가 웃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술이 나고 그가 미워졌다.

“오전에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선생님’이란 단어에 잠시 의아해하던 나윤은 곧 ‘하은’의 존재를 떠올렸다.

“뭐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뾰족한 나윤의 대꾸에도 단유는 개의치 않았다.

“여자 친구 생겼냐고 묻더라고요.”

나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100m, 아니 500m 상공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 같았다.

“어제 누나랑 오래 통화했었잖아요? 그걸 선생님이 들었나 봐요. 아, 선생님만 아니라 명수도 같이 엿들었나 봐요. 통화 끝내고 방을 나섰더니 문 바깥에 명수랑 선생님이 잠들어 있더라고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단유의 목소리였다. 듣기 좋아서, 계속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오늘 오전에는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여자 친구 생긴 거 아니냐고. 그 말이 생각나서 웃었어요.”

“뭐라고 했어?”

“네?”

나윤은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 아니, 입안에 재갈이라도 물려서 말을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쁜 입, 나쁜 손, 나쁜 핸드폰.

그런데도 대답은 듣고 싶었던지, 나윤은 고개를 들어 단유의 눈을 쳐다보았다. 연습실에 들어올 때 본 이후, 두 번째로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어리둥절해 하는 눈. 마치 ‘그 대답이 중요한가’라고 되묻는 표정이었다.

“선생님께 뭐라고 대답했냐고.”

“···여자 친구 없다고, 했죠.”

대답하기 전 잠깐 주저함이 있었지만, ‘거짓말 아님’이라는 눈빛으로 나윤을 보는 단유였다. 그래서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아까 500m라고 했던가? 이번에는 1㎞에서 자유 낙하하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요?”

“됐다.”

나윤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단유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혹시 2층 사무실 가려다가 그냥 들어와 본 거야?”

스스로가 듣기에도 꽤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였다. 나윤은 기운 빠지게 만드는 단유의 대답에 섭섭함을 금치 못하는 한편, ‘나 삐졌어’를 눈치채게 만드는 목소리처럼 들릴까 봐 걱정되었다.

반면 단유로서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뇨, 그러니까 그냥 왔어요.”

라는 말 외에는.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낸 것도 나윤이었고, 통화를 하다 갑자기 쿵, 하는 큰 충격음이 나 걱정시켰던 것도 나윤이었다. 어디 있냐는 물음에 ‘회사’라길래 회사 지하실로 ‘이동’을 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됐어, 그럼 이만 돌아가.”

등 돌린 나윤은 더욱 쌀쌀맞게 단유의 말을 받아쳤다.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나윤이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단유는 비록 나윤이 등을 돌렸어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윤이 마주 선 쪽이 연습실의 거울이 있는 방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거울 속,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나윤의 얼굴은 말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왜 슬퍼해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성에 대해 무지한 단유라도 그 말을 내뱉으면, 더 나윤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상대의 아픔을 모른 척해줄 필요가 있었다.

“저기 그럼 먼저 가볼게요.”

‘운동하고 나서 아직 씻지도 못했거든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연습실을 나가는 단유였다.

‘이 씨!’

나윤이 고개를 홱 돌리며 나가는 단유의 등을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다. 하지만 단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연습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설마 설마 했는데, 끝내 나가버렸다.

평소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며, 똘똘한 아이라며 칭찬받던 나윤은 왜 자기 할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답답했다. 게다가,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냐!’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저 ‘키만 큰’ 남자애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보면 보인다며! 들으면 들린다며! 그런데 왜 난 안 보는데!’

사기꾼같이 ‘목소리만 좋은’ 남자애가 남긴 말이 전부 거짓말 같았다.

“야!”

결국 분을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연습실 문이 열렸다.

“왜요?”

단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밀고 나윤을 바라보았다. 나윤은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정겹게’ 웃으면서 물었다.

“점심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드실래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얼굴을 가진 남자애가 능청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냥 가버릴까 봐, 차마 ‘싫다’고 당당하게 소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주방 안쪽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가게 안을 메운 맵고 구수한 향이 식욕을 한껏 돋우고 있었다. 모퉁이의 칠이 벗겨진 낡은 식탁 위에 올려진 반찬들은 소담하게 쌓여 당장에라도 젓가락을 가져가 맛을 보고 싶게 만들었지만, 나윤은 젓가락은커녕 테이블 아래로 숨겨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라는 거니?”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낸 사람은 누나였잖아요? 그래놓고 왜 말이 없대?”

나윤은 확신했다. 지금 단유는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안···.”

“누나가 보낸 거 아니었어요?”

“······.”

그러니까 그렇게 곤란한 질문만 하니까 할 말이 없는 거 아니야! 나윤의 곤란함을 해결해준 건 식당 아주머니였다. 황동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의 비쥬얼도 입맛을 돋우었지만, 그 안에 든 커다란 돼지 목살 덩어리가 더 눈길을 끌었다.

“잘라 드세요.”

아주머니는 집게 가위를 내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맛있게 보이네요.”

나윤은 차마 티 나게 가슴을 치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을 뿐이었다.

연습실에 고개를 들이민 단유가 ‘점심’을 제의했을 때, 나윤은 못이기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고 툴툴댔더니, ‘무슨 이야기요’라고 되물어서 또 한 번 발끈할 뻔했지만, 인생 최고의 인내심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연습만 하다 가려고 나온 터라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도 못했고, 얼굴도 제대로 꾸미지 못했다. 대충 말린 머리 위에 모자만 쓰고 나온 부끄러운 모습으로 번듯한 식당을 가긴 힘들 거 같아 향한 곳이 바로 이곳, 김치찌개 전문 식당이었다.

예전 숙소 시절, 회사로 걸어오는 길에 있던 식당이었는데, 당시에는 다이어트 때문에 맵고 짠 음식을 피하느라 모른 척해야만 했던 곳이었다.

‘왜 하필 이곳이 생각난 거야!’

게다가 마침 입고 나온 티셔츠도 하얀색이다. 여기에 김칫국물이라도 틔면 정말, 두 번 다시 단유의 얼굴을 보기 싫을 것 같았다.

‘이런 꼴로 만나기 싫단 말이야!’

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단유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앞접시에다 한 국자 푸짐하게 담아 나윤에게 건네던 단유가 말했다.

“드세요.”

그리고는 먼저 숟가락을 들어 밥 한술, 국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뜨거운 거 못 드세요? 저도 잘 못 먹긴 하는데, 이렇게 덜어 먹으니까 그렇게 뜨겁진 않네요.”

‘후후 불어 드세요’ 라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는 단유의 ‘매너’를 마냥 칭찬할 수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정작 가게를 소개한 것은 나윤이었고, 당장 눈앞에 있는 음식을 보니 군침이 돌기도 했다. 어렵게 숟가락을 들고 하얀 쌀밥을 입에 넣어 오물거렸더니, 금세 입안을 가득 메우는 단맛에 혀가 녹는 기분이었다.

‘밥 잘 지었네.’

철없이 그런 생각이나 하고 앉은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 이어 단유가 떠준 김치찌개를 한 입 떠먹었다. 달고 맵고 짠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니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정신없이 먹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옷에 틔지 않게끔 조심해서 먹긴 했지만, 먹는 일이 나의 최우선 과제라는 듯 집중해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더니, 단유가 또 ‘정겹게’ 배시시 웃었다.

“많이 배가 고프셨나 봐요.”

···매워서 얼굴이 빨개진 거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열기를 식힌 나윤은 단유를 노려보듯, 째려보듯, 바라보았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가요?”

“아까부터 나 놀리는 거잖아?”

“제가 누날 왜 놀려요?”

“막, 아까도, 응? 막, 집에 가는 척하고, 응? 지금도! 막, 막, 사람 먹는 거 구경하면서, 응? 배가 고프네 마네 하면서 놀리는 거잖아!”

“잘 드시길래, 배가 고프셨구나, 라고 생각한 거죠.”

난 결백해요, 라는 표정.

“그럼, 뭐, 넌, 뭐, 배 안 고프고 그래?”

“저도 배고파요. 아까 말했잖아요. 운동하고 왔다고. 명수네 축구부에 같이 껴서 격렬하게 운동했더니 배가 꽤 고팠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괜히 죄송하네요. 운동하고 나서 씻지도 않고 바로 와서. 땀 냄새 나지 않아요?”

땀 냄새는 무슨. 지금 내가 니 땀 냄새를 신경 쓸 처지인 거 같애? 그래도 말 몇 마디 나누니까 조금 긴장된 기분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윤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조금 전보다는 천천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생각했던 게 맞았다. 아침에 운동하러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던 게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셈이었다. 뭔가 통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온 단유와 나윤은 햇볕 뜨거운 길 위에서 마주 섰다.

“어디 가실 거예요? 다시 연습실?”

“어, 글쎄···.”

나윤은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 싶어 단유의 눈치를 보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 말이 저렇게 쉽게 나오다니!

“옷도 갈아입어야겠어요. 운동복도 안 챙기고 이 꼴로 뛰었더니···. 영 보기 안 좋죠?”

“내가 더 엉망인데 뭐.”

나윤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꼴을 들여다보았다. 밝은 햇볕 아래 서 있으려니 더 엉망인 것 같았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사람 많은 버스를 탈 때도 딱히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패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름이니까. 얇은 티셔츠와 숏 팬츠 정도는 상관없지 싶었다. 물론 지금은 주저앉아서 온몸을 가리고 싶을 뿐이었고. 드러난 맨살이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괜찮아요, 누난. 예전에 수련 누나도 연습실에서는 그런 복장으로 하던걸요.”

나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 그리고 그 복장도 예뻐요. 누나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치.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연습실까진 같이 가도록 하죠. 거기서 전 지하철 타러 가면 되니까요.”

‘날이 많이 덥네요’라며 먼저 앞장서는 단유의 뒤를 나윤이 쫓았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뭐?”

“누나랑 있으면 저, 말이 많아지는 거 같아요.”

무슨 뜻?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일까?

“저도 말이 별로 없는 편이긴 한데, 누나는 더 말이 없네요. 누나랑 있으면 제가 더 말을 많이 해야 할 거 같나 봐요.”

고개를 끄덕이는 단유를 지켜보던 나윤이 불식간에 입을 열었다.

“나도 너랑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

“네?”

“뭐?”

“···네?”

“······.”

‘에휴, 정나윤, 오늘 정말 왜 이러니.’

나윤은 입술을 한 번 삐죽였다가 한 번 더 말했다. 진심을 담아.

“너랑 이야기 많이 하고 싶다고.”

이번에는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일까?

“어제 너랑 통화하는 거 되게 즐거웠어.”

“아, 저도 즐거웠어요.”

“니가 해준 이야기, 보는 법 듣는 법도 재미있었고.”

“다행이네요.”

“오늘도 회사에 오는 동안 보고 들었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니까 신기하고 재미있었어.”

“그렇죠? 사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관심을 가지고 보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보이는지 몰라요.”

“그랬어.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 너랑 많이 나누고 싶어.”

“그래요. 연습하다가 지칠 때, 아니 생각날 때마다 전화 주세요. 되도록 잘 받을 테니까요.”

어느새 회사 입구에 다다른 두 사람이었다.

“들어가 보세요.”

하지만 나윤은 회사 입구를 한번 슬쩍 쳐다볼 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과 왜 이걸 내가 해야 돼, 라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번민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이성보다 감성으로, 미래보다 지금 당장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런 충동이었다.

“너랑 계속 이야기 나누고 싶어.”

“예. 저도···.”

“전화도 자주 하는 거 좋지만, 자주 만나고 싶어.”

단유의 눈이 ‘무슨 뜻이에요?’라고 묻고 있었다.

“너, 나랑 사귀자.”

그래, 용기 있는 사람이 얻는 법이야. 그리고 여자가 먼저 하는 게 멋있는 거야. 비록 상대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먼저 하는 것도 좋은 거야.

나윤은 눈에 힘을 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귀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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