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게 좋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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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어디야?]
“집인데?”
[할 거 없지?]
“딱히 할 거라고 한다면, 공부?”
명수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나중에 시간 줄 테니까 학교로 와라.]
“왜?”
[같이 운동이나 하자고.]
“또 안 왔어?”
지난겨울에도 사람 수가 부족했던 축구부였다. 솔직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면 될 일인데, 라고 단유는 생각했지만, 명수는 굳이 그를 불러서 골키퍼를 시켰었다.
당연히 명수 혼자 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고, 감독 혹은 코치의 허락이 있었으니 가능했을 테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지?
[따로 할 일 없으면 와서 같이 하자.]
“알았어.”
학원에 다녀온 후, 괜히 싱숭생숭하던 차였다. 땀 좀 흘리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지난번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나갔던 같은데.’
공교롭게도 단유가 생각이 많을 때마다 명수가 불러주니, 과연 ‘베스트 프렌드’구나 싶어서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치? 명수가 내 속을 참 잘 알아.”
호빵을 향해 중얼거리자, 호빵은 흥, 하고 콧바람을 뿜으며 혀를 내밀었다. 헥헥거리며 단유를 보는 호빵의 눈에 간절함 비슷한 게 보였다.
“목마르니?”
급수기에 물을 채워줬더니 좋다고 달려들어서 물을 마셔댄다.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호빵을 바라보던 단유는 문득 호빵이 흘린 털들이 거실에 지저분하게 널려있음을 깨달았다.
“아예 털을 다 밀어버리면 깨끗해지려나?”
말을 못 알아들을 호빵이지만, 섬뜩한 기운을 느꼈는지 물 마시기를 멈추고 단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진짜 그러기 없기다’라고 확언을 받고 싶어 하는 눈치라, 단유는 호빵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털갈이 전용 빗으로 호빵의 털을 정리해 준 단유는 호빵을 안아 든 채로 거실에 작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크지 않은 작은 회오리가 거실을 누비자 바닥의 먼지들과 털들이 회오리에 묶인 것처럼 쓸려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간 털들은 쓰레기통으로 ‘이동’하였고, 그렇게 간단히 청소를 마친 단유는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후, 호빵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킁, 하고 헛바람 뱉는 소리를 낸 호빵을 뒤로하고 단유는 집을 나섰다. 잠시 후, 학교 근처로 이동한 단유가 느긋한 걸음으로 운동장에 들어서자, 멀리서 물을 마시고 있던 명수가 단유를 발견하고는 손을 저었다.
“금방 왔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라든가 혼자 있으니까 무서웠어? 같은 명수의 말은 흘려들었다. 호빵 털갈이하고 거실 청소까지 끝낸 후 여유롭게 왔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
“감독님한테 인사부터 하고.”
“아, 그래.”
운동장 스탠드 근처의 그늘에서 연습 장면을 지켜보던 감독에게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뒤로 뜨거운 7월의 햇살에 열이 오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결국 나윤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갈등만 하다 내려놓고 말았다. 아무래도 괜히 속없는 사람처럼 비칠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참자.’
과연 그게 참을 일인가 싶지만, 나윤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핸드폰을 뒤집어서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싱숭생숭한 이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생각 없이 뭔가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의 생각과 달리 출근하기로 마음먹은 나윤은 일부러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어제보다 더 맑은 하늘과 따뜻한 바람이 나윤의 외출을 환영했다.
“나오길 잘했어.”
나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동안 어제의 느낌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와 같이, 하지만 어제와 다르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 느낌 없이 지나던 골목 담벼락 아래 핀 민들레. 슈퍼마켓 아저씨가 가게 앞에 물을 뿌리는 순간 만들어진 투명한 폭죽. 시장 골목에 줄지어 선 알록달록한 캐노피는 낡기도 했고, 높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래서 마치 무명 작곡가의 오래된 음률같이 느껴지는 재미가 있었다.
어제와 다른 점은 귀로 들려오는 소리도 꽤 많다는 점이었다. 큰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차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건 기본이었고, 어느 집에선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 같이 노이즈가 낀 대화 소리도 들렸다. 조금 더 기울이니, 바닥을 구르는 깡통 소리 비슷한 소리도 들렸고, 어느 곳에선가 아이들끼리 장난을 치는 소리도 들렸다. 길에서 이렇게 많은 소리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게 억울할 정도여서, 나윤은 평소 늘 착용하던 이어폰도 꺼내 들지 않았다.
밤에 느꼈던 것과 또 다른 즐거움, 재미가 나윤을 흠뻑 젖게 하는 동시에, 나윤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만약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동시에 다가온 버스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고민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지도 몰랐다.
버스의 빈자리에 앉아서도 나윤은 바깥을 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살피며 재미를 만끽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옆자리에서 단유가 손가락으로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지나가는 여자 보여요? 좀 털털한 성격처럼 보이지 않아요? 아마 남자친구한테 먼저 다가가서 어깨동무를 할 것 같아요. 저 아저씨가 신은 낡은 워커 보여요? 좀 오래된 유행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저 노란색 간판 보여요? 간판 밑에 벌집 같지 않아요? 저런 건 119에 신고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마치 그 목소리가 들린다는 듯,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윤은, 자신의 손가락이 연신 핸드폰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잘하는데요?”
코치는 조금 전 단유가 해낸 선방 장면을 떠올리며 탄복을 했다.
“잘하지.”
감독의 시선은 이미 공을 쫓아 달리는 아이들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뭔가 여유가 있어요.”
조금 전 상황은 수비수의 실수로 공격 측의 숫자가 많은 상황이었다. 공격수가 두 명이었고, 골키퍼는 그 둘 중 한 명을 예측해서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축구 경험이 없음에도 딱히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차분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한 선수가 공을 차는 순간에 맞춰 진로를 막아 공을 쳐 냈다.
“눈이 좋아.”
어느 선수가 안 그렇겠느냐마는 특히 골키퍼는 눈이 좋아야 했다. 상대가 어느 순간, 어느 발로 공을 밀어 넣을지를 빠르게 보고 판단해야 한다. 동시에 누구보다 빠른 반사신경으로 몸을 움직여 다가온 공을 잡거나 쳐내야 하는데, 단유는 그걸 뛰어나게 잘하는 편이었다.
코치는 여전히 단유의 플레이를 머릿속으로 재생시키며 여운을 즐기다가 감독에게 말했다.
“안 하겠죠? 축구?”
“안 한다고 했었으니까.”
감독이라고 욕심이 안 날 리가 없지만, 학교 클럽 축구의 한계, 그리고 축구보다 더 주목받는 학업 성취도를 자랑하는 단유였기에 제안하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본인 입으로 축구를 장래 희망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줄은 모른 채, 허리에 손을 올리고 경기장에서 오가는 공을 바라보던 단유는 발로 땅을 툭툭 찼다. 생각 없이 몸을 움직여보고 싶다고 충동을 느꼈던 게 신기루였던 것처럼, 지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가만히 서 있을 바에야, 그냥 집에서 책이나 볼걸.’
움직여서 열이 나는 것이 아니라, 뙤약볕 아래 서 있느라고 열이 나고 땀이 났다. 단유가 예전부터 골키퍼를 했던 것은 굳이 뛰기 싫어서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기 싫어서였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신경 안 쓰고 그냥 달리고 싶었다.
‘지겨워.’
단유는 처음으로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원체 욕심을 내보인 적이 없던 단유였던지라, 싫다는 소린 못 하고 그저 맨바닥만 툭툭 찰 뿐이었다.
“단유야!”
굳이 명수가 소리를 질러 알려주지 않더라도 상대편이 공을 잡고 달려오는 것을 모르지 않았던 단유였다. 하지만 상대 공격수는 골키퍼가 방심하고 있다고 여겼는지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골대 깊숙한 곳을 목표로 골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단유는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몸을 이동해서 여유 있게 공을 캐치해냈다. 그리고 팀 동료들이 환호를 내는 순간에 이미 상대 진영을 향해 공을 차올렸다.
“킥력도 좋고요.”
“그래.”
코치의 목소리에 묻어난 아쉬움은 감독도 동의하는 바였다. 지난 대회 때, 비록 명수가 대활약을 하면서 공격력이 좋은 팀이라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반대로 수비 진영에서 많은 빈틈을 보이기도 했던 장계 중학교 축구부로서는 단유 같은 골키퍼만 있어도 수비의 단점을 대부분 커버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때, 단유가 감독을 향해 손을 들었다.
딱히 승부에 욕심이 없던 단유로서는 가만히 서서 골문을 방어해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꽤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긴박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어디로 어떻게 공을 찰지가 보이는 단유로서는 긴박감은커녕 지루함만 더 할 뿐인 시간이었다.
그래서 단유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어차피 연습 시합이고, 같은 축구부 내 선수들끼리 붙는, 전혀 욕심을 낼 필요가 없는 경기였다. 게다가 부외자로서 아무런 의무도 없이 도와주는 입장으로 서 있는 것이다보니, 조금 욕심을 낸다 한들 크게 문제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가봐.”
감독은 혹시 조금 전의 수비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잘못이 있어 단유가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코치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서둘러 단유에게로 달려갔다. 잠시 후 코치가 단유와 이야기한 후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필드에서 뛰고 싶다고?”
“네.”
“흠.”
뜻밖의 제안이었고, 당장 골키퍼를 봐줄 선수가 없어 곤란했지만, 감독 역시 필드에서 뛰는 단유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성식이랑 자리 바꿔줘 봐.”
미들에서 뛰는 선수를 골키퍼로 보내고 단유를 위로 올려보냈다.
“명수야. 나중에 나한테 공 좀 줘 봐.”
“알았어.”
명수는 키득거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이후 몇 번의 공방전이 이어지는 동안 단유는 서서히 움직이면서 몸을 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공이 센터 라인을 지나 공격수에게로 전해질 때 단유가 뛰기 시작했다. 사이드 라인을 따라 치고 올라가는 단유를 발견한 명수가 앞으로 패스를 줬다. 단유의 스피드에 조금 못 미치는 패스여서 어쩔 수 없이 단유가 잠시 스피드를 줄여야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유에게로 향한 공을 뺏기 위해 달려오는 수비수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절묘하게 앞으로 찬 공이 상대의 가랑이 사이를 뚫고 지나갔고, 공과 동시에 출발한 것처럼 단유의 몸도 상대를 지나가고 있었다.
“빨라!”
단유는 가볍게 공을 툭툭 차며 앞으로 향하는데, 공 없이 힘껏 달리는 아이들이 스피드를 쫓지 못할 정도였다.
감독은 팔짱을 풀었고, 코치는 입을 벌렸다.
“막아!”
“안 돼! 가운데 명수도 막아야지!”
수비수들은 가운데와 사이드에서 치고 올라오는 두 사람 중 누구를 먼저 막아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두 사람 다 스피드가 남다르다 보니 선택해야 할 시간을 얼마 없었고, 잠깐의 망설임은 곧 수비진의 붕괴를 일으켰다.
공을 먼저 선택한 수비수가 단유의 앞을 가로막는가 싶었는데, 역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수비수는 공을 향해 발을 뻗기도 전에 지나간 단유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어야만 했다. 물론 잡히지 않았다.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진입한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속근은 에너지를 한 번에 다량으로 주입하여야 하며, 지근은 오랜 시간 분산하여 주입하여야 한다. 그 에너지를 다루는 방법이 호흡이다.”
디아트리의 가르침이 절로 떠올랐다. 호흡을 통해 힘을 비축한 단유는 있는 힘껏, 가슴 속의 답답함을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터뜨렸다.
마치 공이 터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공이 쭉 뻗더니, 골키퍼가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에 골망을 휘감았다. 그 뒤에도 넘쳐나는 에너지를 감당 못해 골망을 뚫고 나아가려 애를 쓰다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아!”
명수가 환호을 지르며 다가와 단유의 골을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환호를 지른 사람은 명수뿐이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조금 전 본 광경이 진짜였는지를 의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죠?”
“······.”
감독과 코치가 놀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지만, 단유는 그저 명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