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72화 (372/956)

노는 게 좋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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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하은의 차를 같이 타게 되었다. 각오(?)했던 바였지만, 역시나 하은은 학원으로 가는 30여 분 동안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오일러 공식’에 관한 수다였다면 즐겁게 들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하은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성 교제는 신중해야 돼.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특히 걱정되는 건, 널 흉보려는 건 아니지만, 니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는 편은 아니잖아? 특히 이성과의 교류가 많지 않으니까 선생님으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거야. 이성에게 너무 빠져서 해야 할 공부를 소홀히 한다거나, 혹은 좋지 않은 교제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젊은 혈기에 실수라도 하면, 오랜 시간 동안 후회와 상처로 고생할 수도 있고 말이야. 물론 넌 똑똑하고 현명하고 착하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 그래도 선생님으로서는 걱정이 돼. 니가 선생님 입장이 되면 이해할 거야. 내가 괜히 꼰대처럼 구는 건 아닌지 걱정은 되지만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좌측 깜빡이 신호를 넣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은의 입은 쉬질 않았다.

“많이 좋아해? 니가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그쪽이 널 좋아하는 거야? 명수에게 듣기로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설마 연상 취향이었어? 젊은 남자들이 연상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되게 신기하다.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감인지, 그도 아니면 연상의 여인에 대한 동경인지 잘 구분해야 돼. 자칫 자기 마음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게 또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단 말이야.”

병목 구간에 접어들면서 차량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지만, 하은의 수다는 여전히 정속 주행 중이었다. 아니, 과속인가?

“나이 많은 나도 연애할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허덕이는데, 새파란 꼬마 놈은 벌써 연애질이나 하고 있고. 세상 참 불공평하네. 어디 돈 많고 잘 생긴 남자가 떡 하니 나타나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라고 고백해주면 안 될까? 그럼 한 번 고려해 볼게요, 라면서 새침이라도 떨어볼 텐데. 설마 내가 그런 새침이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래 봬도 남자들한테 청순가련형으로 어필한다고. 내가 그래서 이 긴 머리도 안 자르고 매일 아침 고생하는 거 아냐. 가끔은 머리를 확 잘라버리고 가볍게 하고 싶은데, 이제껏 기른 게 아까워서 도저히 자르지를 못하겠더라고. 어때? 니가 보기엔? 여름인데 확 잘라버릴까?”

“선생님이 결정하셔야죠.”

“내가 결정하기 힘드니까 물어보는 거지. 이럴 때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하긴 너나 명수가 이런 걸 알 리가 없지. 그래도 이런 걸 대답할 때는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돼. 안 그러면 여자 친구가 화낸다.”

“여자 친구 없는데요.”

“지금 없어도 나중에는 있을 거 아냐? 아니지. 지금 사귀는 여자 친구 있잖아?”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럼 짝사랑이야? 짝사랑 그거 힘든데? 그쪽이 널 짝사랑하는 거야? 여자가 짝사랑하는 게 얼마나 고달프고 애달프고 안타까운 일인지 알아? 받아주던지, 아니면 빨리 포기하게끔 선을 그어줘야 돼. 괜히 어장 관리하는 것처럼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건 진짜 몹쓸 짓이라고.”

하은의 수다는 학원에 도착할 무렵에야 겨우 끝이 나는 줄 알았다. 진짜 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의 학원 교무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하은의 말은 끝이 없었다.

“혼자 올 때는 그렇게 심심하고 따분하더니, 역시 옆에 누가 있으니까 출근길도 신이 나고 좋네.”

“선생님.”

“응?”

“남자친구를 구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왜? 내가 지겨워졌어?”

“그런 대사도 남자친구에게 하심이 어떨는지요?”

“이 자식이!”

학원 교무실에 들어선 하은은 출근해 있던 원장선생님에게 단유를 소개했다. 사정을 들은 원장선생님은 흔쾌히 청강을 허락했다.

“중학생인데 청강이 되겠어? 아니면 중학생 반 수업 청강해 볼래? 보자··· 30분 뒤에 강 선생님 수업 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굳이 청강까지 할 필요도 없고요. 괜찮다면 잠시 둘러만 보고 갈게요. 제가 학원은 처음이라서요.”

“그럴래? 그런데 너 덩치가 좋구나? 몸만 봐서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 얼굴은 많이 어려 보이지만 말이야.”

“고맙습니다.”

단유는 교무실을 나서서 학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학원은 주변의 동종 업종들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3층부터 5층까지 3개 층을 사용했다. 교실 숫자도 많았고, 한 교실당 수강 가능한 학생 수도 많은 편이었다. 교습과목은 기본 과목인 국어, 영어, 수학 외에 과학과 국사 등의 과목을 추가로 교습할 수 있게 배정이 되어 있었다.

교실에는 미리 와서 수업을 기다리는 아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학교 교실과 다른 점이라면, 선생님이 없어도 시끄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대체로 문제집을 풀면서 공부하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열심이지?”

따라온 하은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렇네요.”

“이 학원 자체가 공부 좀 하는 애들이 오는 거라, 다들 공부에 대한 열의가 상당해.”

“그런 거라면 혼자 공부하는 게 더 좋지 않나요?”

“물론 혼자 공부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선행학습을 받지 않는 아이가 없을 정도니, 혼자서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너 같은 애들은 빼놓고 말이야.”

하은의 말은, 혼자서 공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단유도 선행학습을 한 셈이었고, 학원 대신 하은에게 과외를 받았으니 다를 바는 없겠다.

“애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래. 학원 다니지 않고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고.”

단유는 등만 보인 채 자습에 열중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다 하은에게로 향했다.

“정말 열심히 하네요.”

“보고 있으니까 너도 막 공부하고 싶어져? 괜히 경쟁심에 불타올라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 들고 그래?”

하은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입에 문 채로 물었다.

“아뇨. 딱히 그런 생각은 안 드네요.”

“그래?”

단유가 괜히 점잔을 뺀다고 생각하며 넘어간 하은이었지만, 정말 단유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학교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던 단유였기에 더 그런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 칠판에 적힌 선생님의 필기를 머릿속에 새기며, 교과서에 담긴 지식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즐겼던 재미가 요즘은 시들해진 참이었으니까.

“시험 점수를 위해서 공부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응?”

단유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하은이 되물었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교실 안의 아이들에게서는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남는 시간 동안 하은과 못다 한 질문과 답변을 나눈 단유는 점심시간이 될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먹고 갈래? 어차피 집에 가면 혼자잖아?”

“괜찮아요. 혼자서 먹는 게 어때서요?”

“설마, 여자 친구 만나기로 한 거니?”

“여자 친구 아니라니까요.”

“에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그럴 리가요. 그리고 강하게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만.”

“요거, 정색하는 거 좀 봐?”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부디 빠른 시일 내에 남자친구라도 만드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디 남자라도 소개 시켜 주고 그런 말을 해라!”

하은에게 인사를 건넨 단유는 건물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 쪽 계단을 이용했다. 올 때야 하은과 같이 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간단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게 편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후다닥 달려온 호빵을 안아 들고 텅 빈 집을 둘러보았다. 명수는 제 말처럼 연습을 위해 학교로 간 모양이었다.

“뭘 먹지?”

단유가 잠시 주방 쪽을 바라보며 점심을 궁리할 때,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

아침 햇살에 눈을 뜬 나윤은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어차피 오늘 연습실에 늦게 출근할 예정인 까닭도 있었지만, 어제저녁 느꼈던 흥분과 감동 때문에 잠을 늦게 잔 탓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돌아온 의식은 쉽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명료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만 또렷하니 그 괴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이왕 이리된 김에 얼른 씻고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일어난 나윤은 침대 바로 옆의 화장대에 앉아서 얼굴을 살폈다.

눈두덩이 부어서인지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볼도 퉁퉁한 게 아침을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았고. 입술이 살짝 터서, 약지 끝으로 살짝 문질렀더니 꺼끌꺼끌한 느낌이 마치 부직포를 잘라 입술에 붙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얼굴을 살피던 나윤은 눈 밑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서 붓기가 빨리 사라지라고 마사지를 했다. 세수하기 전에 이렇게 눌러준 후, 차가운 물에 세안을 하면 좀 더 빨리 부기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 밑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윤은 화장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화장대에서 돌아섰을 때, 침대맡에 놓인 핸드폰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아.”

새삼 어제 기억이 떠오른 나윤은 얼른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통화목록을 살폈더니, 가장 상단에 단유와 전화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나 오래 전화를 했어?’

두 시간을 조금 넘는 긴 통화 시간을 보고 괜히 발그레 볼을 붉히는 나윤이었다. 지금은 차가워진 핸드폰이었지만, 어제는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어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지 제대로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식이 가는 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았다.

‘말이 잘 통했었지?’

실제로는 일방적인 수다였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리액션을 해준 단유였기에 나윤은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했다.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단유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자신이랑 다르게 부지런한 친구니까, 벌써 일어나서 뭐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은 먹었을까?’

어쩐지 버터를 두른 팬에 식빵을 살짝 구워서 달달한 잼을 바르고 아삭하니 싱싱한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 모습이 상상됐다. 커피보다는 우유가 잘 어울리는 나이였지만, 우유 거품이 윗입술에 묻은 단유의 얼굴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잘 어울리지.’

아니면 아침 운동 겸해서 외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단유가 몸은 꽤 좋은 편이었으니까. 그런 몸을 운동 하나 하지 않고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에구, 무슨 생각 하니.’

나윤은 자기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정신을 차린 줄 알았더니, 우주 저 멀리 가려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을 나오니 조용한 거실이 나윤을 반겼다. 아마도 엄마는 이른 시간에 일을 하러 가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지난겨울 나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다 챙겨보지는 못하셨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가수로서 사람들의 입에 오른다는 게 신기하고 좋으셨던 모양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쑥스러워서 ‘저 딸이 내 딸이다’라고 자랑은 안 하셨지만, 숙소에 가 있는 딸과 통화를 할 때면 목소리에 뿌듯함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다가 나윤이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응원해주셨고, 격려해주셨다. 오히려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마음이 놓인다며 좋아하셨다.

엄마를 생각했더니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욕실로 들어가 세안을 마친 나윤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화장대로 돌아왔다. 음이온도 나오지 않는 낡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얼굴을 보던 나윤은 문득,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주책이야.’

여자가, 그것도 ‘누나’가 돼서 철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이 됐다. 오전에 전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통화를 오전 오후 나눠서 기호를 따질까마는, 그래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그냥 이른 아침부터 전화하는 게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나윤은 생각했다.

‘언제 전화해볼까?’

어제도 그렇게 오래 통화를 했는데, 24시간도 안 지나서 다시 ‘먼저’ 전화하는 건 좀 꺼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주기를 구분해서 통화를 시도하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너무 자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안 좋을 것 같다고 나윤은 생각했다.

냉장고를 열고 배를 채울 만한 것을 찾다 보니, 석류즙이 눈에 띄었다.

‘석류즙이 몸에 좋다던데.’

몸에 좋은 건 나눠 먹어야 좋은데. 하나 챙겨볼까, 라고 생각하던 나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가 또 한 번 찾아갈 것만 같았다.

‘가면 어때?’

‘아니야, 이상하게 볼 거야.’

나윤은 즙을 꺼내 쪽쪽 빨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에 냉장고 앞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고, 끝내 팩에 든 석류즙이 마를 때까지 빨던 나윤은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물론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을 거실에서 서성거리며 보내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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