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71화 (371/956)

노는 게 좋아(3)

-------------- 371/952 --------------

나윤이 레슨 중에 살펴보니, 레슨 선생님은 ‘돈 받고 하는 일이라 억지로 시간을 때우고는 있지만, 이렇게 못 하면 답답해서 어떻게 가르치니’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능력도 안 되는 게 수련 언니 옆에서 인기 좀 얻더니, 꼴 좋다’는 얼굴을 하고 나윤을 훔쳐보다 들킨 연습생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윤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쟤 불쌍해서 어떡하니, 하지만 이 바닥이 다 그런 걸 어떡해. 나는 그냥 월급이나 루팡하면서 지내야지’라는 얼굴로 책상을 지키던 팬매니저에게 다가가 정산 금액을 알아본 나윤은 ‘왜 이렇게 할 일이 없지’라는 얼굴로 모니터를 보던 실장님에게 다가가, 일정 변경을 요청했다.

“무슨 일정 변경?”

“다음 주부터 방학인데, 저도 마냥 여기서 시간만 때울 순 없잖아요?”

“시간을 때우다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 줄 몰라서 그래? 후속곡 나오면 바로 컴백할 거야. 그때까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후속곡 언제 나오는데요?”

“뭐?”

평소와 다른 반응의 나윤을 보며 ‘나 진심으로 당황’이라는 얼굴을 한 실장이 적절한 대답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꺼낸 말이, ‘곧 나올 거야’ 였다.

“그럼 그때 다시 일정을 되돌리죠.”

“뭐야!”

“저 이제 고3이에요.”

저 눈은 분명 ‘전혀 몰랐어’라는 뜻이리라. 너무 당황했던지 표정을 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실장에게 나윤은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대학은 가야죠.”

갈 수 있는지 여부는 둘째고, 일단은 여기에만 머무르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한 나윤이었다.

그렇게 실장에게까지 이야기를 끝낸 나윤은 회사를 나왔다. 지난봄부터 나윤은 숙소가 아닌 집에서 출퇴근했기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나오던 나윤은 평소의 평범했던 길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꽃 가게는 꽤 늦게까지도 문을 열어놓고 있었구나. 저 집 간판은 저런 모양이었네.’

편의점에서 늘 만나던 알바생이 혼자 있을 때 짓는 표정도 처음 봤다. 골목 어귀가 어두워서 조금 두렵다는 생각만 하고 지나다녔는데, 오래된 전봇대 옆에 쌓인 쓰레기봉투 사이로 몸을 숨긴 길고양이와 삼거리로 나뉘는 곳에 있는 석벽에 그려진 낙서의 장난기가 나윤을 웃음 짓게 하였다. 서점과 빵집 사이로 난 작은 골목을 지나면 큰 길이 나오고 빵집 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시간이 어느덧 오후 11시를 넘겼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였다. 이전에는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숙인 채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차분하게 거리를 둘러보며 흘러가는 풍경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회사를 나온 직후 줄곧 입을 다물고 풍경을 즐기던 나윤은 처음으로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여유가 없었구나.’

옆으로 보지 않는다는 둥, 앞만 본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윤은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어른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말의 용례를 따라 한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인데, 단유를 흉내 내 보려고 보는 시늉을 하던 중에 처음으로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제껏 나윤은 자신만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오직 자신의 하루와 자신의 미래만을 바라보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갑했던 것일까?

그런데, 단유의 말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보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더니 나윤의 세계가 갑자기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넓은 세계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자 갑자기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갑하기만 했던 우리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초원으로 풀려난 기분이랄까?

나윤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원 없이 드러내고 싶었다. 누군가와 이 감정을 나누고 싶었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

“니 전화 아냐?”

거실에서 하은과 가볍게(?) 오일러 공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단유는 방에서 들려온 전화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유가 전화를 받으러 간 뒤, 홀로 노트를 끄적거리면서 단유가 던진 물음, ‘미적분을 쓰지 않고 오일러의 공식을 유도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정리해 나갔다. 하지만 전화를 받으러 들어간 단유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나오지?”

3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 단유를 의아하게 여긴 하은이 일어나 단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혀 있지 않은 탓에 하은은 단유가 통화하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네.···네.···그럴 수도 있겠죠.···네.”

주로 단유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었는지,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만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길래 30여 분이 지나도록 저렇게 통화를 하는 걸까?

단유가 고개를 돌리더니 문밖에 서 있는 하은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가리키며 ‘통화가 길어질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는 단유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하은은 문을 닫은 뒤, 명수의 방을 두드렸다.

“예.”

역시나 명수는 시계가 11시를 넘은 이 시간까지도 잠이 들지 않았던지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방에서 열심히 만화책을 읽고 있던 명수에게 다가간 하은은 단유의 방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단유가 누구랑 통화하는지 혹시 알아?”

“단유요?”

알 리가 있나. 명수는 줄곧 만화책을 열독하는 중이었는데.

“30분 넘게 통화를 하는 경우는 보기 힘든데. 남자애랑 저렇게 이야기할 리는 없고, 여자애 같은데.”

“아.”

‘여자’라는 포인트에 명수가 뭔가 눈치를 챈 듯 감탄사를 터뜨리자, 하은이 눈을 빛냈다. ‘어서 빨리 니가 아는 모든 걸 실토해’라는 눈빛으로 명수를 바라보니, 명수 역시 입이 근질거렸는지 방학식 이후 나윤이 찾아왔던 일부터 해서 하루 종일 어울려 놀았던 일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설마···그럼 단유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거야?”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어요. 제가 봐도 사귀는 것처럼 보이진 않더라고요.”

“그래?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저렇게 통화하는 일은 드문 일이잖아?”

“그럼 혹시?”

두 사람이 눈을 빛내더니, 단유네 방을 돌아보았다. 통화가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단유를 덮쳐서 속내를 들어보기로 마음을 맞춘 두 사람은 단유네 방 앞으로 조용히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단답형의 대답이었지만, 하은은 목소리에 꿀이 묻었다며 키득거렸고 명수는 단유가 통화를 즐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밖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줄 모르던 단유는 끝없이 이어지는 나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님이 뭐라고 해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 거야.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게 되니까, 내가 거기에 발끈할 이유가 없어진거야. 그게 너무 신기한 거 있지?]

“네.”

[예전에는 별거 아닌 말에도 상처받고 괴로워했는데, 오늘은 ‘내가 늦었으니까 저런 말을 들어도 되지’라는 생각이 드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고 기분도 크게 나쁘지가 않았다니까?]

“네.”

[아, 그리고 우리 회사 앞에 편의점 있잖아?]

“네.”

[거기 일하는 남자 알바가 있는데, 평소에는 되게 표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오늘 보니까, 혼자서 되게 많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혼자서 막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고, 아, 입술을 막 오물오물 거리는데 난 무슨 껌 씹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계속 보니까 입에 아무것도 없는 거 있지? 그냥 그게 습관인 거야? 입술을 오므렸다가 늘렸다가 하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보니까 웃긴 거 있지? 그런데 내가 훔쳐보고 있는 걸 들킬까 봐 계속 보진 못하고 금방 나와야 했는데, 계속 그 표정이 생각나서 웃긴 거야? 그래서 혼자 걷는데 그걸 흉내 내고 있더라? 내가?]

“네.”

평소 하은에게 단련된 덕인지 단유는 나윤의 긴 수다를 불평 없이 들어줄 수 있었고, 나윤은 낮에 같이 놀 때보다 더 즐겁다는 듯 들뜬 채로 통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수다를 떨던 나윤이 시간을 깨달은 건, 집에 가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어?”

[네,···벌써 1시가 지났네요.]

“미안해, 나 때문에 못 잔 거 아냐?”

[아니에요. 그렇게 피곤하진 않아요.]

그제야 핸드폰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뜨거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윤은 단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 혼자 너무 신나서 막 떠들었네. 미안하다, 단유야.”

[아뇨. 저도 재밌었어요.]

“진짜?”

[네.]

“괜히 나 때문에 빈말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누나가 제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해보려고 했다는 것도 재밌었고요, 누나 나름대로 바라본 세상 풍경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정말?”

[사람마다 보는 세상이 다르니까요.]

“그래? 어떻게 다른데?”

[···그 이야기를 하면 또 시간이 길어질 것 같은데요?]

“아.”

나윤은 쑥스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배시시 웃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진 나윤은 얼른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그 이야기는 나중에 알려줘.”

[그럴게요.]

“나중에···다시 전화해도 되지?”

[그래요.]

“혹시 이러다 귀찮다고 전화 안 받는 거 아냐?”

[아니요, 안 그럴게요.]

“그래. 그럼 나중에 또 통화하자.”

[예.]

“끊을게.”

[주무세요.]

“너도 잘 자.”

[네.]

통화를 마친 뒤에도 나윤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얼른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은 뒤, 침대 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 씻어야지.”

여태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통화만 계속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윤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얼른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유는 문밖에서 쓰러져 자는 두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을 조심히 들어 각자의 방으로 옮긴 단유는, 본인도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오일러 공식을 못 물어봤는데.’

누구는 오일러 공식을 제일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하길래, 과연 어떤가 싶어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 궁금한 것만 늘어나는 중이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는 것 같네.’

그래서 더 재밌는 것이다. 지식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은. 단유에게는 어떤 놀이보다 재밌는 것이 바로 공부였으니까.

‘내일 일찍 일어나서 물어볼까.’

토요일에도 하은은 출근을 해야 한다. 출근하느라 정신없는 하은에게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하은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참기 힘들 것 같았다.

‘내일 한 번 따라가 볼까?’

학원이란 곳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단유는, 가능하다면 따라가서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이 기대되는 단유였다.

****

“가자.”

“괜찮아요?”

“뭐 어때?”

하은이 가르치는 대상이 비록 고등학생들이긴 하지만, 단유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청강이 가능한 수준이니까.

“청강이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전 그냥 구경만 하다가 돌아올게요.”

“그럴래? 뭐, 그러든지.”

하은은 쿨하게 단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너도 따라갈래?”

“전 오늘 학교 가야 돼요.”

추계대회 연습을 위해 모인다는 명수는 춘계 대회의 우승 때문에 학교 측의 지원이 많아졌고, 덩달아 기대도 커져서, 작년과 달리 연습량이 늘었다고 덧붙였다.

“그럼 오늘은 갔다 와서 설거지해야겠네?”

하은은 빈 접시를 싱크대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선생님 준비하실 동안 제가 할게요. 전 별로 준비할 것도 없으니까요.”

“그럴래?”

빨리 준비할게, 라는 말을 남기고 하은이 욕실로 향한 사이에 명수가 고무장갑을 끼는 단유에게 다가왔다.

“단유야.”

“응?”

“너, 어제 나윤 누나랑 전화했지?”

“응.”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야?”

“아니.”

명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유를 보다가, 방긋 웃음을 지었다.

“난 좋다고 생각해.”

“뭘?”

“두 사람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안 사귄다니까?”

“알아. 아는데 사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명수는 혼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거품을 내며 중얼거렸다.

“세제가 떨어졌네.”

수세미의 거품이 조금밖에 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