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게 좋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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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팬이에요!”
지태의 호들갑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으로 답례한 나윤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겨울 이후로 특별히 인상적인 방송활동을 하지 않은 탓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특히 평범한 사복 차림으로, 화장도 하지 않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일이 일상이 될 정도였으니까. 더러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와서 ‘가디스R 맞죠’라고 물으면,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긴 했지만, 지태처럼 열성적으로 떠드는 팬은 최근에는 거의 만나본 적이 없던 차였다.
“그만해. 누나 곤란해 하잖아.”
채윤이 옆에서 말려도 지태는 연신 방긋방긋 이었다.
“혹시 몰라서 근처 피시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치?”
“그래, 그래. 덕분에 스트레스가 더 쌓였다.”
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태와 온라인 축구 게임을 했는데, 어찌나 못하는지 상대편에게 계속 지기만 했고, 때문에 열만 받은 명수였다.
“더 잘됐네. 가자!”
“어딜 가자고?”
“어? 일단 가자!”
아무래도 이번에는 단유가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결정하고 가자. 길에서 헤매지 말고. 누나, 혹시 가고 싶은데 있어요?”
“아니, 딱히···.” “단유야, 보드 게임방 갈까? 누나 보드 게임 좋아해요?”
나윤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드 게임방이면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유는 나윤을 슬쩍 훔쳐보고는 볼을 긁적였다.
“가디스R 맞죠?”
보드 게임방 사장님이 단유네를 보더니 대뜸 그렇게 물었다.
“맞네. 지난번에 왔을 때, 같이 합석했었던 손님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오늘은, 어? 가디스R 진짜 멤버네? 솔직히 제가 잘 몰랐거든요? 이 친구 왔다 간 뒤에 뮤직비디오를 찾아봤어요. 노래 좋더라고. 그래서 가끔, 아니 자주 노래 틀기도 했어요. 팬이 됐다니까요?”
사인과 사진까지 부탁한 사장님은 ‘1시간 공짜’라는 대찬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머무는 동안 ‘리모트’를 몇 번이고 들어야 했지만, 곧 게임에 빠져든 나윤은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즐겼다. 이번에는 단유도 같이 게임을 했다. ‘적당히’ 하라는 친구들의 조언에도 불구, 자연스럽게 플레이가 진행되는 동안 단유의 독주가 이어졌고, 지태가 단유의 어깨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 모습이 여간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던지, 나윤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었다.
서먹함이 사라진 뒤, 단유네가 향한 곳은 이번에도 노래방이었다.
“꼭 듣고 싶습니다!”
라며 간절한 눈을 하고 나윤을 바라보는 지태와, 그 못지않게 기대하는 심정으로 두 손을 모은 채윤과 명수를 보며 나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 음정, 박자, 감정 등을 지켜가며 부르는 일에 지쳐가던 나윤이었지만, 음정, 박자, 감정 따위 개나 줘라며 마이크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모습에 긴장이 풀렸다.
나윤이 마이크를 잡자, 경건하게 경청할 모양으로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은 나윤의 노래가 끝나자, 마치 미니콘서트에 온 것처럼 두 손을 치켜들고 ‘누나, 누나!’를 연호해, 나윤을 또 한 번 웃게 만들었다. 그다음부터는 서로 어울려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 가야겠다.”
“벌써요?”
“전화가 계속 왔는데, 안 받고 있었거든.”
나윤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단유를 바라보았을 때, 단유가 말했다.
“데려다 줄까요?”
‘괜찮다’ 라고 답하려던 나윤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친구들의 야유(?)를 받으며 단유와 나윤은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많이 놀았던 것 같은데, 여전히 밝은 대낮의 도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 가시는 거죠?”
“응.”
“지하철 역으로 갈까요?”
“그래.”
조금 전까지 온몸을 들썩이며 놀았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차분해진 나윤은 단유와 둘만 있으니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이랑 이렇게 놀아?”
“보통은요. 보드 게임방은 아까 들었다시피 두 번째고, 노래방은 좀 자주 갔었네요.”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아니요. 아까도 전 별로 안 불렀어요.”
그랬던가? 나윤이 기억을 떠올려보니 과연 단유가 노래 부르는 모습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마이크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내가 너무 들떴었나 봐.”
“뭘요. 누난 역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그런가?”
레슨을 받을 때처럼 이것저것 챙겨가며 부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몸으로 체득한 탓에 저도 모르게 고음으로 올라갈 땐 벨팅 창법(흉성으로 고음을 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고, 두성으로 목을 보호하기도 했다.
“연습할 때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은 것 같긴 하네.”
“놀러 왔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죠.”
나윤은 단유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는 왜 놀자고 했어?”
“···아까보다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어요?”
“조금.”
회사에서 걸려오는 연락도 무시하고 생각 없이 놀았더니, 확실히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다시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진 않았다.
“친구들이 저만 보면 그렇게 놀자고 졸라요. 뭐 억지로 끌려가는 건 아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쟤들은 나만 보면 못 놀아서 안달일까? 지들끼리 놀아도 잘 놀 애들인데.”
단유의 말에 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 어울렸을 뿐이지만, 지태나 채윤, 명수는 자기들끼리 잘 놀 것 같았다.
“그런데 오전에 카페에서 누나를 보고 있으니까, 그 애들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분명 카페에서 자신에게 놀자고 제안할 때도 저 말을 했었지.
“아마 그 애들 눈에는 제가 옆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가는 모습이 답답해 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그렇게 보였을 거예요. 옆도, 뒤도 없이 앞으로만 가는 사람들은 여유가 없어 보이거든요.”
“내가 그렇게 보였어?”
“조금요?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죠.”
나윤은 문득 자신이 중학생일 때 어땠나, 떠올려보았다. 현대인의 불치병 ‘스트레스’는 중학생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은 ‘니들이 무슨 스트레스냐’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우리도 힘들어요!’
라고 말했던 나윤이었는데, 지금의 자신과 비교해보면 별로 스트레스 받을 일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고작해야 ‘공부’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지금은 불확실한 미래와 싸워야 하는 ‘사회인’으로서의 걱정이 더 많은 탓이었다.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고, 누구도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으니, 홀로 걱정하고 홀로 선택해야 한다.
“너도 스트레스 많이 받니?”
“스트레스라고 표현할 것까진 안 되죠. 저는 제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건데요.”
“나도 차라리 공부를 좋아했으면 좋았을걸.”
“그럼 스트레스를 덜 받았을까요?”
“그렇지 않을까?”
“누난 노래하는 걸 좋아하잖아요.”
나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지금 난 좋아하는 걸 하고 있지. 그런데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전에 절 가르쳐 주셨던 스승님 중에 이렇게 말해주신 분이 계세요.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고.”
나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야?”
단유는 나윤을 붙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앞을 보세요. 뭐가 보여요?”
별거 없었다. 차도 쪽에는 흔하게 생긴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인도에는 가로수와 지나가는 행인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문을 열어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빌딩들이 보였고, 빌딩 사이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보였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 주의를 기울여봐도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없었다.
“저기 오른쪽에 지나가는 사람 보이세요? 빨간 가방을 멘 사람.”
“응.”
“저 사람은 이 동네가 처음인가 봐요.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죠? 아마 약속장소를 근처로 잡은 거 같은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봐요. 그래서 주로 가게 간판들을 위주로 살피며 걷고 있죠.”
나윤은 단유의 설명을 들으며 조금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아주머니는 화장실이 급한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본인이 아니라 아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보채는 것이겠죠. 근처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알려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요?”
과연 아이가 계속 울상을 짓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새였다.
“저기 정류장 바로 옆의 가로수 보이시죠? 저 가로수는 지금 다른 가로수들에 비해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다른 가로수들에 비해 잎이 많지 않고, 시든 잎도 많이 보이죠? 그 옆 나무들도 시들어가는 것 같네요. 아마 방충, 방제 작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단유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눈앞의 세상이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오후의 한적한 거리가 풍부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냥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보려고만 하면 볼 수 있는 것들이죠.”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윤이 얼른 옆에 붙어서 물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훈련 같은 걸 받았니?”
“뭐, 비슷해요. 그런데 중요한 건 스스로 보려고,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단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단유는 나윤의 팔을 잡고 옆으로 자리를 이동해서 부딪치지 않게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어가자, 뜨거운 지상의 열기가 한풀 꺾이는 기분이었다.
“누나는 지금 너무 옆을 보지 않는 것 같아요. 보지 않고 추측만 하려고 드니까, 불안한 마음만 앞서는 거예요. 제대로 보면, 무섭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거예요.”
나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마치 철학관에서 상담받는 기분이 들어서.”
“다행이네요.”
“뭐가?”
“농담할 여유가 생기신 것 같아서요.”
“농담이라고 생각해?”
나윤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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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갔다 왔어?”
“지하철역까지.”
“우와, 좋았겠다. 손잡았어?”
지태는 채윤이 옆에서 말리는데도 굴하지 않고 눈을 반짝였다.
“손을 왜 잡아?”
“사귀냐?”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냐?”
“에이, 빼지 말고 이야기해봐. 그 누나가 너 보려고 학교까지 왔으면,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단유는 혀를 차며 지태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다.”
지태는 끈질기게 매달렸다. 마치 단유가 중요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이. 그걸 들으려고 집에도 가지 않고 단유네 집에서 단유가 돌아오길 기다렸단다.
“그럼 용건 끝났으며 돌아가. 난 공부할 거야.”
“매정한 새끼!”
“그래, 나 매정해. 그러니까 돌아가.”
“그러지 말고, 썰 좀 풀어봐.”
“너 요새 외롭냐?”
지태가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듯 독백을 시작했다.
“외롭냐고? 외롭지! 외롭다고! 우리 학원에서 솔로는 나뿐이란 말이야! 왜 나만 솔로야!”
쟤 연극학원 다녀, 라고 묻는 단유의 말에 채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학원 안 늦었어?”
“저녁에 가면 되니까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그러니까 이야기 좀 해 봐라.”
“무슨 이야기를 계속 해 달래?”
“언제부터 사겼어?”
“명수야.”
“응?”
“내쫓아.”
“너무한 거 아냐? 내쫓으려면 밥이라도 먹이고 날 내쫓아라!”
아직 친구들의 유흥은 끝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결국 네 사람은 라면을 끓여서 먹고 TV 예능을 보면서 한껏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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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나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연락은 또 왜 안 되고! 레슨 선생님이 얼마나 기다리셨는 줄 알아!”
매니저가 노기 띤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슨 가수를 하겠냐며, 때려치울 거냐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윤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하다고 말이면 되는 줄 알아! 니가 지금 얼마나 해이해졌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겠어?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야 정신을 차릴래? 응?”
회사의 지원을 끊니 마니 하면서 발을 굴러대는 매니저의 폭언에도 나윤은 그저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고만 했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보려고 했다. 보려고 했더니, 매니저의 얼굴이 보였다. 속 좁은 인간의 전형. 소심한 사람. 회사의 눈치만 보면서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 나윤에 대한 걱정은 없고 오로지 자신에게로 향하는 손가락질만 걱정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겠거니 라고 생각하자, 나윤은 매니저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굳이 맞상대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낼 필요가 없으니까.
매니저가 잔소리를 끝내고 위층으로 올라간 사이에 나윤은 정수기의 물을 받아 입을 축였다. 그리고 잠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다 피식 웃음을 지었다.
“패잔병 같네.”
거울 속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전쟁에 지고 난 사람의 모습 같았다.
아직 단유처럼 정확하게, 숨겨진 정보들을 파악해낼 수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보려고 노력을 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낯설게 웃는 자신을 보며 나윤은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