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69화 (369/956)

노는 게 좋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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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도 오래여서, 비록 방학식이 진행되는 학교 안은 에어컨 덕분에 더위를 몰랐지만, 바깥은 가만히 서 있어도 따가운 햇살 탓에 코끝이 불에 닿은 듯 화끈거리는 날씨였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더욱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나윤은 낯선 남자 중학교의 교문 앞을 바라보면서 심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창피해.’

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어렵게 발을 뗀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 후회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갈팡질팡하던 나윤은 느닷없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남학생들 무리를 보고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방학식인 줄 모르고 온 탓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아이들이 뛰쳐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마음의 준비가 덜 됐던 나윤이었다.

‘어떡해.’

나윤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가끔씩 고개를 살짝 들어 교문을 지켜보았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수많은 남학생들이 밝은 얼굴을 하고 뛰쳐나오는 걸 보며 나윤은 결심했다.

‘안 되겠어. 그냥 가자.’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순간에 나윤은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

단유는 나윤을 데리고 버스 정류장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비록 학교 근처지만 중학생이 이런 카페에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법도 한데, 다행이랄까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기, 괜찮아요?”

“응. 괜찮아.”

단유는 다른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먼저 보낸 후, 나윤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으로 데리고 왔다. 정작 찾아온 나윤은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카페 가장 안쪽, 사람들의 시선이 덜 닿는 곳에 자리한 두 사람은 차가운 아이스티를 앞에 놓고는 침묵을 지켰다.

“오랜만이네요?”

“그, 그렇지? 오랜만이네.”

“어떻게 오신 거예요? 방학이에요?”

“아니, 우리 학교는 다음 주 방학이야.”

고등학교는 대부분 다음 주에 방학을 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시간에 나윤이 올 수 있었던 것은 ‘가수’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1, 2교시 정도만 수업을 받고 ‘조퇴’를 해서 회사로 가는 일정이었던 나윤은, 모처럼 땡땡이를 쳤다. 날이 더워서이기도 했고, 맑아서이기도 했고, 덥고 햇볕이 뜨거운 반면에 마음은 서늘해서이기도 했다.

“깜짝 놀랐어?”

“놀랬죠. 당연히.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혀 반가운 눈치가 아니다?”

“반가움을 느낄 겨를도 없을 만큼 놀랐다는 거죠.”

나윤은 작은 티스푼으로 컵을 휘젓다 단유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우스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유를 보며 또 한 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진짜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어, 그냥.”

자신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조퇴를 하고 학교를 나와서 회사로 가야지, 라고 마음을 먹고 있을 때, 문득 회사 말고 다른 곳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충동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다 정신을 차려보니 단유네 학교 앞이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유라.

‘어떤 이유로 여기 왔을까? 난?’

****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윤은 ‘후배’들의 인사에 황망히 답하다 도로 연습실을 나왔다. 가디스R로 데뷔를 하면서 ‘선배’가 돼버린 나윤은 줄곧 같이 연습했던 이들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소리쳐 인사하는 게 그렇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팀이 깨져서 이후의 활동이 막막한 지금은 더 그랬다.

“넌 에이바운스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차지한 ‘선배’라는 걸 잊지 마.”

기존 매니저였던 태호가 독립을 하면서 나윤에게 새로 배정된 매니저는 태호보다 엄격했다. 태호가 느슨하게 풀어줬던 것은 아니었지만, 새 매니저는 연습생 간 서열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엄격했다. 그렇지 않아도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과 성공적인 데뷔 활동에도 불구, 짧은 경력 때문에 ‘선배’로서의 자의식이 부족했던 나윤은 연습실에서 편하게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가디스R의 주 멤버인 수련이 회사를 떠나면서 가디스R의 후속 활동이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회사 측은 계속 가디스R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잡았고, 나윤 홀로 무대에 올라서 책임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비는 스케줄이 늘어났고, 회사 측은 후속 활동을 위한 기획에 들어갔지만, 딱히 방안이 없었다. 한 마디로 ‘오리무중’,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차트 순위 20위까지 오른 가수야, 너는.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게 아니면 더 열심히 연습해. 언제라도 출격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돼.”

식단조절과 타이트한 레슨 일정은 연습생 때가 행복하다 여길 정도였다. 물론 ‘리모트’ 공식 활동 기간에는 이보다 더 심해서, 하루에 2시간도 못 자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꿈이 충족되는 하루를 보내느라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후속 활동을 준비한다는 회사의 말과는 달리 차갑게 식은 눈빛들, 마치 데뷔를 기다리는 연습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답이 없는 시간만 계속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윤은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오늘, 활동도 없는데 의례적으로 조퇴를 신청하고 회사로 가려던 나윤은 교실을 나올 때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저들은 한 걸음씩 천천히 준비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제자리에서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허망하게 외치는 이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0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요?”

단유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힘들어.’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유의 말이 틀렸다고 따지고 싶었던 것일까? 나윤은 어느새 핸드폰으로 ‘장계중학교’를 검색하고 발길을 돌렸다.

****

처음의 어색했던 침묵은 금방 사라졌다.

“안 무서웠어?”

“솔직히,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누나 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났다고 생각해봐요.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무섭지 않겠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야.”

“그래도 경찰이 금방 범인을 잡았으니 망정이죠, 만약 안 그랬으면 정말 학교 분위기가 엉망이 됐을 거예요.”

뉴스에도 몇 번 나왔지만, 애초에 그런 사회 뉴스는 고사하고 연애면도 보지 않는 나윤은 단유네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단유와의 어색함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아무튼 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지냈네요. 누나는 어땠어요?”

어떻게 보면 그냥 일상적인 물음이고 편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나윤은 대답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힘들죠?”

나윤이 눈을 부릅뜨고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에도 입 한번 대지 않은 아이스티였다. 커다란 조각 얼음이 반 토막이 나서, 아마 지금은 꽤 싱거워지지 않았을까?

“다시 시작한다는 게 힘들 거에요. 아, 그때 이야기한 거 기억나요? 저도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한다고. 여태 지낸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조금 서투를 때도 힘들 때도 있는데,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마치 지금처럼. 과거의 단유였다면, 이렇게 오지랖을 부렸을까? 만약 나윤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라며 등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나윤에게만큼은 조금 무뎌지는 단유였다.

‘아마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겠지.’

나윤에게서는 여러 가지 모습이 발견된다. 과거 홀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지만, 방법을 몰라 그저 벽을 쌓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도 보였고, 기자들에게 둘러싸이자 어쩔 줄 몰라 주저앉아 눈물을 보이던 초등학교 동창 ‘장혜진’―실제 이름은 강혜진이지만, 단유의 기억에서는 여전히 ‘장혜진’이란 이름으로 기억되었다―의 모습도 보였다. 또 어떨 때는 더러운 진흙탕 위에서 꼿꼿이 목을 세우고 자신을 바라보던 큰 날개를 가진 이름 모를 새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뿌듯해?”

나윤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네?”

“뿌듯하냐고.”

스푼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다 똑같애. 매니저 오빠도, 수련 언니도, 너도.”

단유는 말없이 나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든 나윤의 눈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젖어 있었다.

“자기들만 만족하고, 자기들만 위로받으면 다야? 나는? 준비할 시간도 없이 버려진 나는? 다시 시작하라고? 그래, 그랬어. 니가 그렇게 이야기해줬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아무도 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도 안 알려 주는데 어떻게 해? 노래하고 춤추는 거? 아무리 해도, 어떤 방법을 써도 안 돼. 안 된다고.”

나윤의 혀끝에 돋아있는 가시가 꽤 따갑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가시로 상대를 찌른다면 모를까, 나윤의 가시는 자기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날카롭게 찌르고 후비고 상처를 내고, 다시 찔러서 상처가 덧나게 하고 있었다.

“힘들어요?”

“그래! 힘들어! 노래하는 것도 힘들고, 마냥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 사람들을 보는 것도 힘들어. 연습실에 혼자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쳐다봐.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계속 날 보고 속닥거리는 거 같다고. 실패했다고, 버려졌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고!”

언성이 높아진 탓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그저 나윤을 바라만 봐주었다. 나윤은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매니저 오빠한테, 수련 언니한테 내가 뭘 잘못했는데? 혼자 무대에 올라가야 할 때도, 너무 긴장돼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데도 여태 실수 한 번 안 했어. 불평도 안 했어. 그런데 내가 회사에 무슨 잘못을 했는데?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건데?”

단유는 나직하게 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하지 않았어요.”

“잘못 안 했으면, 잘했으면, 그러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난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뿐이잖아. 잠 못 자고 힘들어도 말 안 했던 건 같이 열심히 하자는 뜻에서 그런 거잖아. 당연히 괜찮지 않은 거잖아? 그런데 왜··· 왜 내가 이렇게 돼야 해···.”

나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하소연을 하는 것이리라. 하소연을 들어줄 이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탁자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나윤의 손 위로 단유의 손이 얹어졌다. 떨림이 멎고 대신 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친구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네요.”

“무, 무슨 말이야.”

“누나 오늘 안 바쁘죠?”

안 바쁠 리가 없지만, 이미 회사에 가기로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상황이었다. 더 기분 나쁜 건, 그런데도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는 거. 처음의 엄격했던 매니저는 활동이 줄어들면서 동시에 점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 저랑 놀죠.”

“응?”

“아, 정확히는 저희들이랑 놀아요.”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무음으로 한 탓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계속 핸드폰으로 문자가 오는 중이었다.

“스트레스, 풀러 가죠.”

단유가 그답지 않게 진한 미소를 띄며 웃었다. 나윤의 눈에 서렸던 붉은 기운이 아래로 내려왔는지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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