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예측 사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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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영씨?”
“네?”
행정실에 들어온 장 형사는 순영의 눈을 보았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살짝 상기된 두 볼의 변화를 발견했다.
‘전에도 저랬을까?’
이미 예전에 이야기를 나눴고, 김지연이 학교로 들어온 시간에 대한 알리바이를 이야기해 준 이도 순영이었다. 그런데도 지난번과 다르게 보이는 건,
‘꼬마 녀석의 말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보지 못했던 걸까?’
장 형사는 행정실에 근무하던 다른 남자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순영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무슨 일이시죠?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전에 다 말씀드렸잖아요?”
‘미묘하지만 분명 말의 템포도 빨라지고 있다.’
장 형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순영을 관찰하고 있을 때, 파트너인 영식은 영문도 모른 채로 따라와서는 장 형사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금요일 오후 3시가 되기 전쯤에 여기 이곳을 지나는 모습을 보셨다고 증언하셨죠?”
“네.”
“그때 여기서 뭘 하고 계셨죠?”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제가 실수로 커피를 엎지르는 바람에요, 씻으려고 저기 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커피는 왜 엎지르신 겁니까?”
“네?”
머뭇거리는 순영을 보며 눈을 빛내는 장 형사였다.
“시, 실수로···.”
“옷이 물들어버릴 정도로 말이죠?”
“네? 네.”
“그 옷은요?”
“그게 왜 중, 중요하죠? 그건 아무 상관 없잖아요?”
장 형사는 눈을 빛냈다. 끝까지 나오지 않는 이름. 분명 숨기고 있음이다.
“고순영씨. 그날 이 자리에서 만난 학생 있었죠?”
“네? 아니, 그게···.”
“그 학생에게서 증언을 받은 게 있습니다. 계속 숨기실 겁니까?”
순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학생에 대해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마주친 시간이 짧아서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내심 생각하곤 있었지만, 만일에 대비해서 그 학생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형사들이 어떻게 그 아이를 찾았을까? 그리고···진짜 봤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순영을 보며 장 형사는 영식을 불렀다. 영식이 순영을 일으켜 세울 때, 장 형사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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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은 처음 일 주일간 굉장히 떨었다고 했다. 그 학생이 어디까지 봤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이사장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봤던 건 아닌지 두려워했단다. 그래서 학생에 대해 일부러 언급을 피했고, 다행히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자신에게 접근하는 형사가 없어 어쩌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단다.
하지만 ‘학생의 증언’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모든 게 밝혀졌다고 생각하자, 그간 억지로 버텨내던 긴장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래서 경찰서로 간 뒤, 고순영은 모든 게 드러났다는 생각에 순순히 자신의 범죄를 털어놓았다.
물론 그 전에 장 형사가 언급한 ‘커피 쏟은 옷’도 결정적이었다.
“그러니까, 이사장을 살해한 뒤, 옷에 틘 피를 처리하기 위해 일부러 커피를 들고 있었다?”
최초의 계획은 커피를 들고 행정실 안으로 들어가다가 스스로 넘어지면서 커피를 제 몸에 쏟고, 목격자를 만듦과 동시에 더러워진 옷을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게 되리란 계획이었다고 순영은 밝혔다. 이를 위해서 커피가 조금 식은 뒤에 행정실에 들어갈 생각에 복도 밖에서 서성거릴 때, 갑자기 나타난 학생과 부딪혔다. 순영은 당황해서 ‘진짜’ 넘어졌고, ‘진짜’ 옷을 더럽혔던 탓에 더 자연스럽게 옷을 처리할 수 있었다는 부연설명이었다.
이어진 순영의 범행동기를 듣고 장 형사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지한영이 혼인빙자간음이다?”
행정실장이었던 지한영은 결혼을 약속하며 고순영과 잠자리를 여러 번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지한영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김지연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로 지한영과 다투기도 했지만, 지한영은 오해라며 고순영을 달랬다.
그러던 중 금요일, 이사장이 부탁한 차를 들고 들어간 이사장실에서 이사장이 김지연을 앉혀놓고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하더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특히 고순영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임신이었다.
“임신했어요?”
“네.”
일주일 전 임신테스트에서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한영에게 알리려 했는데, 한영은 병원에 있어서 알리지 못했다. 병원에도 찾아오지 말라고 해서 순영이 의심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행정실에 틀어박혀 있던 차에, 지씨 부자는 김지연을 지한영의 배우자로 삼으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지연이 떠난 후, 순영은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몇 마디 말이 오가다, ‘감히 니가’ 따위의 말을 듣고 분개한 순영이 옆에 놓인 골프 클럽을 휘둘러 이사장을 쓰러뜨렸다. 순영은 이사장이 정신을 차리면 일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에 책상 위에 있던 나이프를 손에 집었다.
“아니, 살인이 더 큰 죄라는 걸 모르십니까?”
“그날은···학교에 사람도 없었고, 이사장만 조용히 만들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냥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차라리 시체로 만드는 게 후환이 적을 것 같다는, 범상치 않은 결론을 내린 순영이 손을 쓴 후, 곧바로 행정실로 돌아가는 대신 알리바이를 만들려 했다. 자신이 건드렸던 도구들을 닦아 지문을 지운 후, 조용히 이사장실을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옷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그래서 전술한 바와 같이 ‘커피’를 이용해서 옷을 처리할 방법을 떠올린 것.
돌이켜보면 굉장히 허술한 방법이었기에 일주일간 가슴 졸이며 상황을 지켜보았는데, 의외로 자신에게로 수사방향이 옮겨지지 않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들킬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들켜요? 순영씨 안 들켰어요.”
“네? 아까 학교에서는 증언했다고.”
“학교에서 순영씨랑 1층에서 마주쳤다고 증언했다고요.”
“예? 그럼···그 아이, 제가 범인인 줄 모르고···?”
“아마 모를 겁니다.”
아마. 아니, 어쩌면 알려나? 어쨌든 단유가 증언한 건 만났다, 는 내용까지뿐이었으니. 결국 순영이 어림짐작으로 털어놓았을 뿐인 일이었다.
“아아, 이런···.”
취조실 책상에 엎드려 우는 순영을 지켜보던 장 형사는 그녀를 그대로 두고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담배를 하나 꺼내무는 장 형사에게 영식이 말했다.
“선배, 실내 금연입니다.”
“밖에 나가서 피려고 했어, 임마.”
장 형사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어내니, 이제야 콱 막힌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후의 이야기지만, 지한영에 대한 조사 중에 그가 만났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지한영의 주변 인물들 중, 고순영을 언급한 이도 있었다. 고순영이 사건 일주일 전 산부인과를 들렀다는 것도 밝혀졌는데, 행정실 직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부인과 질병 때문에 병원에 간다고만 알고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고.
“결국, 우리가 계속 수사를 했다면 밝혀낼 수도 있었겠네요.”
이사장실에서 나온 다양한 지문 중에는 고순영의 것도 많았다. 다만 행정실 직원이라는 특성상, 자주 이사장실을 들락날락한다는 사실 때문에 혐의점을 크게 두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계속 수사를 했다면 고순영의 행적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모르지.”
어이없는 실수로, 혹은 부주의로 범인을 놓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미결사건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장 형사는 사건이 해결됐다는 후련함과 동시에 찝찝한 기분도 느꼈다.
소년, 단유의 말대로 그의 행적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에, 학교 안과 밖의 CCTV에도 걸리지 않은 채로 학교에 들어왔다는 소년의 증언은 장 형사의 더듬이를 마구 자극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보다는 장계 삼거리에서 벌어진 사건에나 집중하시죠?”
장 형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단유의 트릭을 밝히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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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무섭다.”
“그럼 거의 일주일 동안 살인범이랑 같이 학교에 있었던 거 아냐?”
고순영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잡혀들어갔단 소식은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나 그 여자한테 아침마다 인사도 했었는데.”
“왜? 관심 있었냐?”
“미친 새끼. 아침에 학교 올 때 시간이 겹치길래 자주 봤을 뿐이다, 새끼야.”
“이 새끼, 수상한데? 응? 수상해.”
“야, 이 새끼야, 아니라고!”
“어디서 냄새가 나는데?”
극장에서 영화 엔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그것과 같은 모양새로 모여있는 아이들을 슬쩍 쳐다본 도하는, 여전히 변함없이 노트를 미친 듯이 채워나가는 단유를 보았다.
도하가 보기에 단유는 중간고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비록 공부를 하지 않는 도하라도, 단유가 하는 작업이 시험공부와 거리가 멀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2학년 첫 중간고사가 이제 코 앞인데도 시험공부랍시고 교과서를 뒤적거린다거나, 문제집을 푸는 ‘일반적’인 형태의 시험 준비는 전혀 하지 않는 단유였다.
“넌 시험공부 안 해?”
“집에서 하고 있어.”
그렇다면 할 말 없고. 하지만 도하가 보기에 단유는 확실히 지금껏 만나본 모범생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아니, 주변 아이들과 달랐다. 초탈한 듯 주변 세사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할 따름이었다. 어찌 보면 천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폐증 환자 같기도 했다.
“너 들었냐?”
“······.”
“국어 선생님, 학교 그만둔대.”
“······.”
“‘그일’ 때문에 충격이 심했는지, 학교를 그만둔대.”
트라우마라도 생겼을까? 생각해보면 김지연은 이 사건에서 이사장 다음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뭐 문제가 있을까? 지금 단유가 신경 쓸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인데.
‘어떤 함수의 역함수가 존재한다면, 역함수는 단 하나뿐.’
역함수의 정의역과 치역이 반대가 될 수 있어야 하기에 1:1대응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공식을 풀어나간다면···.
“조용, 조용! 수업 종 쳤는데 뭐하니?”
선생님이 들어와 교탁을 두드리자, 교실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단유는 노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생님은 그런 단유를 발견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저 친구가 지금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전교 1등을 놓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못 봐줘도, 저런 애들은 봐줘야지.
그렇게 선생님의 묵인 아래, 단유는 공간 좌표 형성에 대한 단초를 풀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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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종결된 후, 뉴스에서는 단신으로 보도되었지만 곧 잊혀졌다. 이사장의 죽음이라는 제목은 거창했지만, 분노로 인한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명은 임팩트가 약했다.
지한영은 혼인빙자간음이라는, 지금은 형법상 삭제된 죄목으로는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못했다. 다만 방패가 사라져 맨몸이 드러난 이상, 그에 대한 경찰 조사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음주운전과 폭력, 폭행, 사기 등의 각종 죄목들이 붙기 시작했고, 결국 구속 기소가 결정되었다.
전혜숙 이사라고 이와 무관할 순 없었으니, 비록 기소받을 만한 죄는 없었지만 남편과 아들의 일 때문에 더는 정상적으로 이사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 자진해서 물러나야 했다.
김지연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고 소문이 났지만 실상은 병가처리가 되어 장기간 학교를 쉬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와 망상 장애 등의 진단을 받은 터라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초기, 학생들 중 가장 먼저 조사를 받았던 병호는,
“같이 가.”
“너 왜 이렇게 쫓아다녀? 딴 애들이랑 다니라니까?”
“같이 가자, 응?”
단유네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별로 귀여운 얼굴도 아닌데, 괜히 도하 앞에서 귀여운 척을 하는 병호를 보면 단유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적당히 해라.”
도하가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면 대부분 거리를 두게 마련인데, 최근 도하가 워낙 풀어진 탓인지 병호는 오히려 ‘필사적으로’ 다가와서 친한 척을 했다.
“에이, 같이 점심 먹는 거 가지고 그런다. 가자, 빨리 가.”
딱히 병호랑 같이 가려는 건 아니지만, 가는 방향이 같으니 어쩔 수 없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단유는 중앙현관을 빠져나오던 중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경찰도, 누구도 지키지 않는 이사장실이지만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그곳 근처를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원한에 쌓인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꺼린 탓이었다. 교장실도 옮긴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귀신은 무슨.”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과 시원한 바람이 단유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