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58화 (358/956)

내 알 바 아닌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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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단유는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단순한(?) 룰 안에서 벌이는 게임이 이렇게 재미있게 느껴질 줄은 스스로도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아껴왔던 용돈마저 털어야 했지만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1시간에 3천 원이라는 비싼 이용료에도 불구하고, 다섯 사람은 무려 4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처음에는 단유의 독식 때문에 게임이 싱겁게 흘러가나 싶었지만, 2등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싸움으로 전개되면서 아이들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등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지만, 2등은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되기에―특히 단유가 누구를 공격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더 치열한 게임이 펼쳐졌다.

게임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소리를 지르는 일도 많았고, 때문에 직원에게 몇 번의 제재도 받았다. 룸을 이용했지만, 바깥 테이블에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몇 번 제재를 요청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던 탓이어서, 몇 번이고 사과해야 했다.

“야, 이럴 게 아니라 단유 원정 보내자.”

그 와중에 상미가 괴상한 아이디어를 냈다. ‘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직 단유 뿐이었는지,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좋은 아이디어라 칭찬했다.

가끔 인원수가 많이 필요한 게임 때문에 낯선 이들과 ‘조인’을 한다는 설명에 단유는 납득을 하면서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되물었다.

“니가 없어져야 평화가 온다.”

‘그럼 애초에 너희들끼리 놀면 되는 것 아니었냐’는 반론은 가볍게 묵과되었고, 지태는 단유의 손목을 붙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저희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로 운을 뗀 지태는 특유의 너스레로 살갑게 다가간 뒤 단유를 ‘팔았다’.

“같이 해보시면 저희 마음을 아실 거예요.”

라며 익살도 부리는 지태 덕분에 단유는 거부감 없이,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여자 무리 속에 섞였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태의 말빨’ 때문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까지 나와서 ‘구경만 하다 갈게요’라며 테이블 주위에 서서 몇 게임 정도를 지켜보았다. ‘이거 사기다!’라며 한 사람이 말을 집어 던질 듯한 시늉을 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릴 때는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벙글거렸다.

몇 게임만 하고 일어설 수 있을 줄 알았던 단유는 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승부욕이 발동한 누나들이 단유를 놓아주지 않은 탓인데, 몇 번의 게임이 있고 난 뒤에야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단유는 관심을 보이던 다른 테이블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얼마 후 곧 그쪽 테이블에서도 ‘포기’라는 선언이 나오면서, 게임방 내의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보드 게임방의 여러 가지 게임들이 동원되면서 단유를 꺾기 위한 도전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보드 게임방에 머물다 나오게 된 것이었다.

“나 목이 쉰 거 같애.”

“노래방은 스킵 하자.”

“돈도 없어.”

“너무 오래 했어.”

“그래도 게임방 사장님이 돈을 깎아 줘서 다행이야.”

게임방 사장님은 단유 때문에 매상이 올랐다는 것에 기뻐하며 특별히(!) 만 원을 깎아 주었다. 덕분에 각자 만 원만 내고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먹거리를 사느라 쓴 돈까지 계산하면 더 되겠지만.

****

“아까 걔 진짜 잘하더라.”

“근데 걔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나도 그랬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얘들 봐라? 야! 걔 아직 중학생이라잖아? 어디 어린 애를 넘봐?”

“넘보긴? 그런 거 아니거든?”

“어쩐지 아까 계속 걔 쪽으로 들러붙는다 싶었어. 걔가 너 피하느라고 슬금슬금 움직이는 거 못 봤어? 너 그거 성추행이야.”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아!”

“왜?”

“나 기억났다.”

“뭐? 걔?”

“뮤직비디오에서 봤어.”

“뮤직비디오?”

“그 뭐더라, 「리모트」란 노래 있잖아?”

“그게 뭔데?”

“가디스R 몰라?”

“여자 그룹이야? 여자 그룹이면 관심 없어.”

“아, 난 알겠다. 남자애들이 눈이 빠져라 보던 거 말이지?”

“그래. 거기 나왔던 애다.”

“어,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럼 연예인이네?”

“싸인 받을 걸 그랬다.”

“게임 잘하는 거 보니까 보드 게임방 자주 오는 거 같은데, 그 게임방 가면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이구, 그러다 바람난다?”

“바람은 무슨.”

“니 남친한테 다 일러야겠다. 현진이가 영계한테 눈 돌아갔다고.”

“진영혜!”

“아이구, 내 귀가 다 따갑네.”

햇살 좋은 일요일, 오랜만에 뭉친 4인의 여대생들의 수다는 포근한 봄바람에 실려 조용히 흘러갔다.

“야, 마스크 써야겠다.”

“황사 때문에 피부 다 상하겠어.”

****

간단하게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늦은 점심을 해치운 이들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하나를 이야기 나누다, 결국 시간이 늦어지는 관계로 그대로 헤어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패스트푸드 점에서만 1시간을 넘게 앉아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명수는 뒤따라 온 상미와 일요일의 남은 시간을 마지막까지 불태우겠다는 듯 패드를 붙잡았고, 그 틈에 풀려난 단유는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아.”

하루를 돌아보며 단유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랬겠지만 낯선 이들과 스스럼없이―물론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렸지만―게임을 하는 자신의 모습도 생소했고, 그런 게임 하나로 웃음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게 즐거웠다.

평소의 단유라면 결코 즐기지 못할 놀이문화였기에 그런 곳에 데려가 준 친구들이 또 고맙기도 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고, 이제는 다시 본래의 과제에 집중해야 할 때라 생각한 단유는 노트를 펼쳐 들었다. 노트에 빼곡히 기록된 것은 그동안 단유가 배우고 익혀온 것들이 축약되어 있었는데, 금요일 저녁부터 적기 시작했는데 벌써 노트의 반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단순히 책을 보고 쓰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잠든 지식들을 꺼내서 눈으로 확인하고 재정리해보려는 계산에서 하는 작업이었다. 당연히 이유는 ‘마법’ 때문이었다.

단유가 마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나그노리시’, 즉 완벽한 요소들의 객관적 인식이 가능했기 때문이리라.

문득, 보드게임을 하는 동안 흥미를 느끼게 해주었던 한 가지 요소가 떠올랐다. 불, 물, 바람, 흙의 네 가지의 원소를 이용한 마법으로 상대를 무찌르는 카드 게임을 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런 마법을 상상으로라도 만들 수 있다니.’

사람들의 상상력에는 끝이 없달까. 어쩌면 자신도 지금의 작업이 끝나면 그런 마법을 구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미소를 짓던 단유는 이내 미소를 지우고 작업에 몰입했다.

이제껏 쌓아온 지식들을 재점검해 볼 시기라 생각한 단유는 하루 동안 즐거웠던 기억과 감정들을 의식 너머로 묻어버리고 오롯이 노트에만 집중했다.

****

월요일이 되어 학교로 갔을 때, 단유는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수군대는 모습도 그렇고,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도 분위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교실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 그런 광경들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 있나?”

도하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할 때였다.

“김단유.”

우성이 단유에게 다가왔다. 단유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만 들어 우성을 바라보는데, 다가오는 우성을 막은 것은 도하였다.

“거기서 말해.”

“뭐? 야. 진도하. 뭐냐, 이거? 손 떼라.”

도하는 우성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 크게 벌이지 마라. 오늘 분위기도 안 좋은데.”

“지랄 떨지 마, 새꺄. 어디서 되도 않는 개소리야! 야, 김단유. 일어나 봐. 일어나 보라고 새꺄.”

우성이 강하게 나서는 이유는 금요일 경기장에서 단유가 도망을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도하가 눈치를 줘서 계획을 알게 된 단유가 도망갔으리라, 고 결론을 내린 우성은 등교하자마자 단유에게 한 방 먹이리라 마음을 먹었다. 더는 단유가 두렵지 않은 우성이었다.

“안 일어나? 쫄았냐? 쫄았어, 새끼야!”

당연히 한숨밖에 안 나올 상황이라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새끼가 사람을 물로 보나? 도망이나 치는 주제에.”

도하가 힐끔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보다 밀고 들어오려는 우성을 막았다.

“안 놔? 너라고 봐줄 거 같애, 새끼야?”

“하룻강아지도 강아지라서 귀엽게 봐주는 거다. 봐줄 때 가라.”

“···무슨 개좆같은 소리야? 니가 나를 봐줘? 허, 참나.”

이미 교실에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확실히 기를 꺾어 놔야 한다. 혀를 차는 듯했던 우성이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도하는 빠르게 물러서며 주먹을 피하려 했지만, 우성의 재빠른 기습을 피할 만큼의 스킬은 부족했다. 완전히 피하지 못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에 금방 코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도하도 얌전히 주먹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얌전해졌다 해도 한때는 진짜 정신 나간 하룻강아지 짓을 일 년 내내 하고 살았던 아이였다. 자기 입으로 ‘길거리 싸움꾼’이라 칭할 만큼의 실력은 있었던 것이다. 물러섬과 동시에 휘두른 주먹은 우성의 턱에 꽂혔다. 다만 포인트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탓에 충격이 온전히 가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성도 맞았지만,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한 차례 주먹이 교차한 후, 서로 눈치를 보며 기회를 노리는 싸움, 같은 건 없었다. 주먹은 지칠 때까지 뻗는 것이고, 맞을 때까지 휘둘러야 하고, 맞으면 또 때리는 게 이들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난장판이 될 거란 기대감(?)에 교실의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려는 찰나였다.

두 사람 다 주먹을 휘두르는데 한 방만 걸려라, 는 심정으로 휘두르고 있던 터라 정타가 들어가는 경우가 없었지만 대신 엄청나게 빠르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빗맞으면서 얼굴 살갗을 스치고 가는 주먹들 사이로 뜬금없는 손이 들어와 두 사람의 팔목을 붙잡았다.

“와!”

지켜보던 한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작년 유행했던 한 영상을 떠올렸다.

단유는 교차하는 주먹 사이로 손을 뻗어 정확하게 두 사람의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는 즉시 아래로 끌어내려 두 사람을 바닥에 고꾸라뜨렸다. 보기 흉하게 바닥에 구르는 일은 없었지만, 두 사람 다 손목이 차가운 바닥에 붙을 정도여서 몸을 굽힌 채로 단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왜 힘을 빼고 그래.”

단유는 느긋하게 우성을 보며 말했다. 두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우성은 잇소리를 내며 단유를 노려보지만, 그 눈 안에는 두려움도 곁들여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신경 쓰지 말라고.”

이번에는 도하를 보며 꺼낸 말이었는데, 도하는 조금 전까지의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러다가 쟤 죽이려고?”

말하자면, 도하는 우성이 해를 입힐까 봐 막은 것이 아니라, 당할까 봐 막은 것이란 소리였다.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릴 하냐. 내가 왜 죽여?”

“그 할아버지처럼 하려고 했던 거 아냐?”

“···나 참.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김이 샜다는 얼굴로 단유는 두 사람의 손목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하는 곧바로 일어났지만, 우성은 무슨 일인지 바로 일어서질 못했다. 그를 힐끔 쳐다본 후, 단유는 주위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 선생님 오신다.”

그 말에 둘러쌌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자리를 찾아갈 때,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리를 찾아가느라 분주한 아이들을 보면서도 선생님은 특별히 말이 없으셨다. 대신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강병호.”

아이들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주목을 받은 병호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따라 나와. 나머지 애들은 1교시 수업 준비하고.”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만,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시선을 끌며 교실을 나간 병호를 데리고 나선 선생님은 학생상담실로 향했다.

“금요일에 학교 왔었냐?”

상담실을 앞에 두고 선생님이 병호에게 물었다.

“···네.”

“왜?”

“···뭐 좀 찾을 게 있어서요.”

“교실에?”

“네.”

선생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상담실 문을 열고 병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상담실 안에는 사복 차림의 남성 두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병호 학생?”

“···네.”

병호는 낯선 이들의 눈빛이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라 생각하며 문 근처에서 주춤거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사내, 장 형사가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른다고 불렀는데, 병호에게는 섬뜩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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