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알 바 아닌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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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목 이사장이 발견된 것은 토요일 오후,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신고가 왜 그때 들어왔지?”
“집에서 학교로 연락이 온 게 그때였대요.”
평소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때가 빈번했던 이사장이라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집에서, 오전이 다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자 수상하다는 생각에 학교로 연락을 취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온 직원이 들어갔다가 사체를 발견, 그 즉시 119로 연락을 했다는군요.”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뭐, 요즘은 대부분 119로 전화를 하니까 그렇겠거니 생각은 하지만,
“그 여직원은 조사했고?”
“조사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게, 행정실에 두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그 여직원이 말단이었다나 봐요. 그 여직원을 시켜 이사장실에 보낸 직후 바로 신고 전화가 들어왔으니.”
장 형사는 학교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이 먹는 거라 일부러 이렇게 달게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인은?”
“둔기에 의한 상처와 날카로운 도구로 추정되는 것에 여러 번 찔린 상처가 발견되었어요. 정확한 건 국과수에 넘겨봐야 알겠지만, 출혈 과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 형사가 고개를 돌려 이사장실 안쪽을 봤더니, 바닥에 깔린 흑갈색 러그가 보였다. 아마, 처음부터 흑갈색이었던 건 아니었겠지. 장 형사는 종이컵 속 커피를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밀크커피는 너무 빨리 식는 것 같다.
“몸싸움을 크게 하지는 않았나 봐.”
실내는 크게 어질러지지 않았다. 시체가 누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소파 부분이었는데, 소파 앞 테이블에는 깨진 잔들의 잔해가 보였다.
“여직원이 손댄 곳은 없고?”
“문 열자마자 바로 신고를 한 터라, 안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답니다.”
“여기!”
장 형사는 안에서 조사 중인 감식반 사람들을 불렀다.
“뭐 나온 거 없어요?”
“너무 많이 나와서 문제네요.”
한숨을 내쉬던 감식반 반장이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있던 골프채로 내려 쳤나 봐.”
그리고 손가락을 이동해서 책상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로 집어 던졌고.”
다시 손가락이 위로 올라갔다.
“피해자가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애. 그때 범인은 책상 위의 저 칼로 찔렀어.”
“칼이요?”
“봉투 자르는 칼인데, 그냥 저렇게 위에서 돌아다니니까 발견하기도 쉬웠겠지.”
책상 위에는 칼을 거치해 둔 것으로 추정되는 미니 칼 거치대가 보였는데, 마치 옛 고검(古劍)들을 거치해 두던 모양과 유사했다.
“취향도 참.”
장 형사는 혀를 차며 빈 종이컵을 구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정적? 장 형사가 눈을 빛내며 반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사장실에 들어온 여자가 있었어.”
“여자요?”
장 형사의 머릿속에 여성이 관련된 다양한 범죄들이 영화 하이라이트 묶음처럼 지나갔다. 감식반이 감식 중인 부하에게 손을 내밀자 그 손에 증거채집용 비닐이 올려졌다. 그 끝을 잡고 별거 아닌데, 같은 느낌으로 흔들거려 보이는 반장이었다.
“찻잔. 여기 립스틱 자국.”
장 형사는 고개를 들이밀고 그 자국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결정적?”
“뭐, 아닐 수도 있지만.”
한발 물러서는 감식반 반장의 말에 장 형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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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립스틱 자국이랑 선생님의 DNA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조각난 도자기지만 지연은 이사장실에서 손에 들었던 찻잔의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 것 맞을 거예요.”
드디어 지연이 입을 열었다. 사실 경황없이 끌려와서 이사장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얼이 빠져 있었던 탓에 쉽게 말을 하지 못했을 뿐, 지연이 계속 침묵을 지킬 이유는 없었다.
“저 아니에요.”
“그건, 조사해 보면 나올 겁니다.”
형사는 차분하게 몇 가지 조사된 정황들을 이야기하며 지원의 알리바이를 검증해갔다. 교무실 직원들의 증언으로 이사장실에 갔었음이 증명되었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행정실 직원과 학교 근처 분식집 식당에서의 증언을 통해 점심을 먹으러 갔던 식사 시간도 증명되었다.
지원은 타인의 입으로 자신의 행적이 하나하나 밝혀진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점심 드시기 전에 30분에서 40분 정도 이사실에 머무르셨죠?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그리고 타인에게 자신의 행적과 감정을 가감 없이 밝혀야 한다는 게 거북했다. 하물며 형사 앞에서야 두려움과 불편함이 더 할 뿐이었다.
“그럼 이사장에게 꽤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셨겠네요?”
형사는 돌려 말할 줄 몰랐다. 구체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 외에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라는데, 감히 그럴 수야 있겠는가. ‘당신의 증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전술한 주제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면 어떻게 대답하나?
“식사하시고 뭐 하셨습니까? 보니까 식사 마치신 후에 바로 교무실로 가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
어떤 의도로 묻는 걸까? 지연은 당시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라서, 먹는 거로도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런 기분으로는 교무실에 들어가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아 주변을 산책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 동행하신 분은 계셨습니까?”
있을 리가 없었다. 혼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산책을 하는데 누가 같이 따라다닌단 말인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만약 그때 누군가가 있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당한 수모와 불쾌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울적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날···죽은 건가요?”
서류를 들여다보며 다음 질문을 고르던 형사가 지연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형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아 몰랐는데, 형사의 눈은 꽤 익숙한 눈빛이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 느꼈던 무기력한 눈빛, 일상에 찌든 눈빛이 형사에게서 느껴졌다.
지연 본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편함에 잔뜩 가슴을 졸이고 있는 반면, 형사는 늘 겪는 일이라는 듯 무덤덤하게 진술을 받고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역시 드라마랑 현실은 다르구나.’
그렇다고 해서 편해질 리 없는 취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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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어제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공원을 뛰어다녔다. 어제는 그 전날의 경기 여파 때문인지 근육통 때문에 제대로 새벽 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몸에 열을 내는 게 근육을 푸는 데 더 좋다는 의견 때문에 명수는 느릿하게라도 몸을 풀었고, 그 덕택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기운차 보였다.
“원래 명수는 기운이 넘치지.”
하품을 하면서도 나온 상미가 명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왜 나왔어?”
“그냥, 이제 나도 운동 좀 할까 싶어서.”
“그 말, 내가 들은 것만 벌써 4번쯤 된 거 같은데?”
“그런 건 잊읍시다, 김 선생.”
상미는 너스레를 떨며 한쪽 팔을 잡고 늘리면서 스트레칭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근데 되게 아쉽다. 나도 가서 봤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명수가 어쩐 일인지 몰라도 겸손을 떨었다.
“앞으로 더 좋은 게 많이 나올 테니까. 솔직히 그저께는 너무 못했지. 수비한테 막혀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니까.”
“그런 수비를 뚫고 골을 만들어냈으면 잘한 거야.”
“그치? 잘했지?”
눈을 빛내며 속내를 드러내는 명수는 칭찬이 고픈 아이였다.
“그래. 잘했어.”
단유와 명수의 대화가 웃겼는지 상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말이야, 오늘 승리 축하 기념으로 놀까?”
“그냥 놀 핑계가 필요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김 선생, 김 선생. 너무 그러지 맙시다? 예?”
중간고사가 끝나고도 명수의 시합 때문에 제대로 뭉치지 못했다는 상미의 말에 명수도 동의했다.
“핑계야 어쨌든 오늘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난 안 돼.”
“왜?”
“공부해야 돼?”
“와, 이런 날도 공부해야 돼?”
“그러고 보니, 단유 너 어제부터 좀 미친 듯이 책 읽더라?”
어느새 가볍게 땀을 낸 후, 스쿼트를 시작한 명수였다. 아직까지는 몸을 심하게 굴리면 안 된다는 단유의 조언에도 명수는 괜찮다며 씩씩하게 앉았다 일어서기를 했다.
“공부할 게 생겨서 그래.”
원래 그렇지 않냐는 상미의 물음에 명수가 평소에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어제는 정말 미친 듯이 하더라고 덧붙였다.
“원래 하나에 꽂히면 미친 듯이 파고들긴 했지만, 어제부터는 정말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책만 파더라니까?”
한 세트를 끝내고 숨을 고르던 명수가 단유를 보았다.
“그래도 단유야, 오늘은 같이 놀자. 시험 끝나고 제대로 뭉치지도 못했잖아? 지태랑 채윤이도 불러서 놀자. 응? 스트레스는 풀어야지?”
“니 스트레스는 그날 고기 먹는 거로 끝냈던 거 아냐?”
금요일, 우승 후 명수는 혼자 고기 10인분을 먹어치우는 대식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자리에 모였던 감독님과 학부모들이 깜짝 놀라더라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에이, 그거랑 비교하면 안 되지. 아무튼 오늘, 같이 나가자. 오랜만에 노래방도 가고.”
“오예! 콜!”
상미가 명수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결정이 났다.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음으로써 그 결의(?)에 동참하기로 뜻을 전달했다.
일요일 오전부터 노래방을 찾아가는 만행은 피하기 위해, 명수와 상미는 오전 시간 동안 놀 거리를 찾았고, 마침 합류한 채윤의 아이디어로 다섯 사람은 보드 게임방을 찾았다.
“간판만 보다가 실제로는 처음 봐.”
“그냥 카페 같은 분위기네?”
명수와 단유가 생소한 광경에 두리번거리자, 상미가 얼른 자리를 잡고 두 사람을 앉혔다. 촌티 내지 말라며, 핀잔을 던질 때 지태는 음료수를, 채윤은 게임을 하나 골라왔다.
“「로코」?”
“이건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잘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거든? 상대의 심리를 잘 파악해야만 할 수 있으니까, 단유 너도 방심하면 안 될 거야.”
“어떻게 하는 건데?”
“원래 룰은 하면서 배우는 거야.”
지태의 익살맞은 표정을 따라 짓는 채윤과 상미였다. 지난 중간고사 대비해서 세 사람이 단유에게 배움을 청하는(?) 동안 받았던 서러움(?)을 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30분 후, 채윤은 지태의 성에 못 이겨 게임을 바꿔와야 했다.
“이거 너무 쉬워서 그래. 다른 거로 바꿔와.”
30분 후, 이번에는 상미가 게임을 바꿨다.
“좀 잘 골라와. 이런 단순한 게임으로는 못 이긴다니까.”
20분 후, 지태와 상미는 들고 있던 카드를 내 던질 뻔 했다.
“야, 너 내 거 봤지?”
“보긴 뭘 봐.”
“그런데 어떻게 그 카드를 내냐?”
네 사람은 단유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고, 되려 스트레스만 받았다.
“이거 머리 안 쓰는 게임 없어요?”
그래서 고른 것이 ‘할리갈리’. 지태나 상미는 지겹게 플레이한 게임이라 고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게임은 머리보다 순발력이 필요한 게임이기에 이 정도라면 무난히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골랐다. 물론, 10분 후 명수마저 카드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냥 져 주면 안 되나?”
“져 주긴 뭘 져!”
지태가 열이 오른 모양새로 다른 아이들의 손에 들린 카드를 끌어모았다.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재밌네.”
그 말에 모두가 살짝 놀랐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았다. 곧 지태가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투덜대는 시늉을 했다.
“너만 계속 이기니까 재밌겠지.”
그러면서 투덜거리는 시늉으로 시치미를 뗐지만, 아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단유가 재밌어하는 게임도 있구나.’
매일 공부하는 것만 좋아하는 단유가 공부 외에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까, 한 번 찾아보자, 며 쑥덕거렸던 아이들도 이제는 지쳐서 ‘역시 단유는 책밖에 없다’고 생각할 무렵,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주 와야겠어.’
친구가 좋아하는 걸 발견한 기쁨은 꽤 오래갔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매 게임 승자 독식이라는 양상에도 아이들은 쉽게 보드 게임방을 떠나지 못했다.
이기지 못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느새 분위기는 ‘단유를 이겨라’는 양상으로 변질 되긴 했지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