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55화 (355/956)

너는 어디에 있었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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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를게.”

“니가?”

“내가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을 거야. 너는 먼저 가서 애들 준비시켜 놓고.”

우성은 자리에 거의 눕다시피 등받이에 기대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주변의 아이들은 한참 경기에 빠져들어 있었지만, 진태와 우성만 그 분위기에 젖어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축구 룰을 잘 모르기도 했고.

“알았어.”

“만약에 안 나온 애들 있으면 꼭 기억해놔라. 나중에 손 볼 애들이니까.”

“알았다.”

룰은 모르지만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전광판 시계도 그렇고, 관중들의 분위기도 그랬다. 다만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열이 식기는커녕 더 불타오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여기서 이긴다고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우성은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경기장 위의 선수들이 개미 같다고 생각했다.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개미처럼, 공 하나를 두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꼴이 우스웠다. 발 한 번 구르면 잔디밭에 납작하게 짓눌려버릴 것처럼 보이는 애들이 개처럼 혀를 빼물고 뛰어다니는 꼴이 우스웠다.

****

병호는 게임만큼이나 축구를 좋아했다. 국가 대표뿐만 아니라 해외축구도 간간이 찾아보면서 경기를 즐기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걸린 시합에서 팽팽하게 진행되는 경기를 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이 경기는 꼭 봐야 한다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것이 월드컵이든, 챔피언스 리그든, 아니면 중등부 결승이든.

그러나 지금은 전혀 경기를 즐기지 못했다. 후반전 시작 후 약 30분이 흐른 지금, 병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USB가 진짜 없구나.’

일찌감치 잃어버렸음은 알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자신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 USB를 숨겨둔 탓에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으로 구석구석을 찾았다. 옆에서 뭐하냐고 물어도, 개의치 않고 가방을 탈탈 털어서 수납 주머니와 필통과 지갑 사이와 책, 노트 사이를 뒤졌지만, USB는 나오지 않았다.

너저분하게 떨어진 것들을 주우며, 자기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굴러간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의 발을 들어 올려 신발 밑까지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오늘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USB를 만지작거리면서 그 해킹 프로그램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상상하며 등교를 했었는데.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상실감이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와아!”

경기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함성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에이, 씨발!”

병호는 그 함성 속에 욕을 섞어 질렀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지만.

함성이 터져 나온 그때,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친 장계중 축구부의 에이스, 명수는 몸을 돌려 센터라인 쪽으로 이동했다.

‘아직 시간은 남았어.’

끝나려면 10분 이상이 남았고, 만약 추가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20분도 더 남은 시간이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그때 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열을 식혀 주었다. 명수는 기분이 좋았다. 전반까지 너무 꽉 틀어막혀서 답답했는데, 이제는 단순히 돌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움직여 동료들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역할도 수행 중이었다.

원래 축구는 다 같이 하는 스포츠였다. 자신이 축구를 좋아했던 것도 다 같이 놀 수 있어서 좋아했던 것 아닌가. 어릴 때도 혼자 드리블해서 공을 넣는 것보다 주고받으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플레이를 더 좋아했다.

경기가 안 풀리다 보니, 골을 넣어야 한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전반전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더 힘들고 지치고 재미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방금 전도 자신에게 수비가 밀집된 탓에 선배에게 공을 밀어주었고, 또 한 번 선배의 슛이 상대 골키퍼의 선방으로 막혔지만, 이제는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기는 게 재미있지.’

결정적인 기회를 모두 선배에게 밀어주었다. 이제까지 3차례. 여전히 수비수들은 명수를 경계하겠지만, 또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래서 다시 수비수들이 밀집하더라도, 반대편에서 기회를 노리는 선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느슨해진 틈을 노리는 것이 명수의 전략이었다. 그 생각을 응원한다는 듯,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그래, 고맙다.’

몸은 적당히 불타오르고, 머리를 죄던 열기는 바람에 식으니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고, 뜻한 대로 움직인다.

‘바람아, 다른 사람한테는 불지 말고, 나한테만, 우리 팀한테만 불어라.’

얼토당토않은 소원까지 가슴에 담으며 명수는 눈을 빛냈다. 물론 명수는 모를 것이다. 그 얼토당토않은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

“명수 분위기가 묘한데?”

“명수가요?”

감독이 명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반전에 갑자기 체력이 살아나고 있어.”

떨어져야 할 체력이 살아난다? 무슨 자가 충전 배터리도 아니고, 전후반 합쳐 거의 한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는, 이제 겨우 15살인 아이가 어떻게 저렇게 힘을 낼 수 있을까?

평소 감독이 명수에게 하던 말, ‘넌 투쟁심이 부족해’ 란 말이 오늘만큼은 전혀 맞지 않았다. 오늘의 명수는 투쟁심을 넘어선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순재를 뒤로 뺄까요?”

명수의 컨디션이 좋다면, 명수에게 공이 잘 전달 되도록 미들 쪽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아니. 이대로 가는 게 좋겠어. 명수도 그걸 노리는 것 같고.”

감독이 보기에 명수는 축구 센스가 남다른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유소년 클럽을 다니며 전략 전술을 배운 것도 아닌데, 경기장 위에서 포지션이 잡혔을 때 역할 수행을 잘하는 선수였다. 게다가 시야가 넓어서 어떤 전술에도 잘 대응했다. 지금은 전반보다 더 심한 압박과 견제를 받는 데도, 자연스럽게 순재에게 패스를 해서 골 찬스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랬다.

그 순간, 센터 라인에서 다시 공을 차단하는 장계중 축구부였다. 명수가 살아나니 더 수비 쪽에 치중하게 된 상대 팀은 공격이 부실했고, 그 때문에 장계중학교의 스틸이 많아지던 참이라 그리 놀라운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 차단에서 이어지는 장계중의 공격은 이전과 달랐다.

3학년 순재는 패스를 받았다. 명수가 집중 마크를 받는 터라 자주 패스를 받았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것도 기회인지라 순재는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상대 진영을 향해 드리블을 해 나갔다. 명수에게 몰려든 수비 외의 또 다른 선수가 달려들었다. 앞과 옆에서 달려와 막으려 드니, 두 수비수를 제치고 앞으로 가던가, 아니면 다시 뒤로 공을 돌려서 기회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명수 쪽으로는 너무 많은 견제가 들어가 있어 패스를 하기가,

“응?”

명수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가 우연히 눈이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순재는 명수가 간절히 바라는 한 단어를 발견했다.

‘패스!’

해도 될까, 를 염려하기 전에 먼저 발이 나갔다. 엉뚱하게도 공을 두 수비수 사이를 뚫느라 명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공간으로 흘러갔다. 이대로 두면 명수를 막던 수비수가 몸을 돌려 그 공을 잡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명수가 움직였다. 공이 없는 상황에서도 선수들은 페인트를 쓴다. 특히 명수의 경우와 같이 집중 견제를 받을 때, 특정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보다 공격수의 움직임을 제한하려 할 때, 공격수는 이를 뚫기 위해 다양한 페인트를 쓴다.

명수는 공이 패스가 되기 전에 이미 페인트를 걸었다. 뒤로 물러나서 순재의 패스를 받을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몇 십분 동안이나 명수와 붙어 다니며 몸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수비수들은 명수의 생각을 읽고 방향을 막으려고 움직였다.

그런데 명수가 지금까지의 모든 움직임이 거짓이었다는 듯, 이제까지 움직였던 것 중 가장 빠른 몸놀림으로 방향을 틀었다. 허리를 숙이고, 굽혀진 다리에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바닥을 강하게 박차고 튀어나가며 수비수 사이를 뚫었다. 어, 하는 사이에 명수는 옆 공간으로 탈출했고, 왜 저리 차나 싶던 공이 명수의 발에 걸렸다.

“막아!”

뒤늦게 상대 팀 감독과 지켜보던 선수들의 입에서 비명같은 지시가 터져 나왔다. 명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절묘한 볼 컨트롤로 공의 방향을 바꿔 드리블을 해 나갔다. 골대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루트.

사람들은 순재의 패스 실수를 명수가 살렸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건 약속된 플레이였다. 빈 공간에 먼저 공을 밀어 넣고 그 뒤 명수가 달려가 공을 받는 방법은 특히 명수의 순간 가속력이 뛰어나기에 유효한 방법으로 자주 연습 되곤 했었다. 사실 어느 팀에서나 하는 연습이었지만, 이 순간의 플레이는 너무나 절묘했고, 그래서 관중들의 환호를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명수는 관중들의 함성과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옆과 뒤에서 뒤늦게 달려오는 수비수의 움직임은 느껴졌지만, 명수의 가속력이 더 빨랐기에 시간은 벌 수 있었다. 건너편에 선배가 달려들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수들의 시선이 분산되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명수와 선배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달려드는 수비수가 있음을 확인한 순간, 명수는 시합을 결정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니, 이번엔 꼭 해야 돼!’

상대 팀은 확실히 결승전에 오를 만한 실력을 갖춘 팀이었다. 아무리 중학생이라지만, 이렇게 수비를 잘하는 팀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본래 수비를 잘하는 팀이 축구를 잘하는 팀이었다. 만약 명수가 없었다면, 장계중과 상대 학교와의 레벨 차이는 분명 현격한 수준이리라.

심지어 이번 춘계대회의 다크호스, 주목받는 신인,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주, 인명수의 골잡이로서의 능력도 이제까지 훌륭하게 봉쇄하지 않았던가.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이 그 기회였다.

명수는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며, 개운해진 기분으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걸 넣으면 얼마나 더 개운할까?’

왼 다리로 바닥을 강하게 딛고, 오른발을 강하게 휘둘렀다.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절묘하게 맞은 공이 빠르게 날아갔다. 적당한 거리에도 골키퍼는 날아오는 공을 향해 몸을 던지지 못했다. 놀랍도록 빠르게 날아든 공은 골망을 뒤흔들었다.

경기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함성이 울려 퍼짐을 들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명수가 입을 잔뜩 벌리고 소리를 질렀음에도 경기장을 뒤흔드는 함성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달려드는 장계중학교 선수들 역시 입을 뻥긋거리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달려와 명수를 바닥에 눕히고 그 위를 짓눌러 댈 뿐이었다.

****

“와, 저기서 넣네?”

함성이 잦아들 때쯤,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환호를 보내던 도하도 이성을 찾았다.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방금 보았던 그림 같은 슛을 떠올렸다.

“쟤, 원래 저렇게 잘했어? 아니면 뽀록인가?”

확실히 중학생 정도의 선수가 저런 슛을 구사한다고 하면 믿기 힘들만도 하다.

“실력이지.”

“···쟤도 너만큼 힘이 좋은가 봐?”

“응.”

“누가 더 힘이 센데?”

와, 정말 맥락 없는 건 여전하구나. 여기서 그런 질문이 왜 나오나?

“몰라.”

“나중에 한번 붙어봐라.”

단유는 대꾸하지 않았다. 도하도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는지, 세레머니를 마치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프로 축구 선수?”

아마도 명수의 꿈을 묻는 것이리라.

“응.”

“우리 나이 때 저 정도면 진짜 국가 대표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 국대는 저것보다 더 잘했을까?”

“글쎄다.”

도하는 물끄러미 명수를 보다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표가 있으면 좋겠다.”

“무슨 표?”

“그런 거 있잖아? 몇 살의 표준 키는 얼마고, 몇 살 때 표준 몸무게는 얼마인지 하는 거. 그런 표처럼 몇 살 때 이 정도 하면 나중에 이거 할 수 있다, 이런 거.”

단유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자못 심각한 얼굴로 상념에 빠진 도하였다.

“담뱃갑에도 있잖아? 니코틴이 몇 퍼센트고 타르가 몇 퍼센트고 이런 게 적혀 있잖아? 그런 게 있으니까 자기 취향에 맞는 담배도 고를 수 있고. 그것처럼 표가 있으면 그 표에 맞춰서 자기 취향에 맞는 재능을 계발할 수 있으면,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비유는 이상했지만, 도하의 아이디어는 우습게 치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단유 본인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잘한다 칭찬하는 것도 있고, 자신이 그냥 좋아서 빠져 있는 것도 있지만, 그걸 토대로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아직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미지수였다.

예전의 누군가는 공부를 잘하니까 의대나 법대를 가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만, 단유의 생각에 의대와 법대는 그 분야가 너무 상반된 것이었다. 단지 대학 입학 점수가 높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직업적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데, 단지 공부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두 가지를 추천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도 해줬고, 실제로 음원을 출시할 정도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이 노래 부르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데 ‘가수 해라’고 말한들 단유의 귀에 솔깃할 리가 없었다.

수학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가지고 대학을 가서 수학과 교수가 된다? 하지만 물리도 좋고 화학도 좋고, 최근에는 철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관련 서적들에 흥미를 붙이고 있는데?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차라리 명수처럼 명확하게 한 가지만 파고들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다양한 영역에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중인 단유로서는 고르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도하의 아이디어가 솔깃하기도 했다.

“니 말대로 그런 표가 있으면 미래를 결정하는 데 도움은 되겠네.”

“정말?”

“그런데, 잘은 모르지만 적성 검사 같은 거 하면 그런 거 나올걸?”

“아, 그래? 그럼 적성 검사받아볼까? 어디서 받는데?”

단유도 어디서 주워들은 터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중에 선생님께 물어봐.”

“니가 대신 물어봐 줘라.”

“왜? 니가 직접 물어도 되잖아.”

“난 안 친하잖아.”

단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정말 ‘도하’ 이 녀석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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