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디에 있었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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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허리를 짚으며 공간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나운 눈매의 상대 팀 선수가 시퍼런 눈으로 명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후반 20분이 되어서야 들어온 선수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직 경기장의 열기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으니, 빠르게 적응하진 못하겠지? 이 순간만 지나면 곧 적응을 끝내고 다시 아까와 같은 협력 수비로 꼼짝 못 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지금뿐이야.’
명수는 밭은 호흡을 내뱉으며 숨을 고르려 했다. 그때 주위로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센 바람은 아니었지만, 땀을 식히기엔 충분한, 시원한 바람이었다.
‘살 거 같다.’
열이 올랐던 머리도 식는 것 같았다. 머리가 식으니 점점 시야가 넓어졌다. 넓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시야가 좁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넓어지고 나니 깨달았다.
명수 옆으로 다가오는 선수 외에도, 언제라도 협력 수비에 가담하기 위해 준비 중인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편 선수들 중에서 레프트 윙을 맡은 선수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움직임을 가져가려는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의 명수는 운동장을 넓게 보는 편이었다. 자기가 골을 넣는 것도 좋아하지만, 주변 친구들에게 어시스트를 해서 골을 만들어내는 것도 좋아했다. 명수는 보육원 때부터 같이 어울려 하는 축구를 좋아했다.
그런데 첫 대회, 첫 결승전이라는 압박감, 협력 수비에 막혀 제대로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시야가 좁아졌던 것이었다.
명수가 공을 받을 위치를 잡고 몸을 가볍게 움직이던 찰나, 공을 던지기 위해 팔을 치켜든 선수 뒤쪽, 관중석에 앉아 있던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도 이런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유난히 더운 날씨에도 공차기에 열중하던 시절, 학교의 넓은 운동장을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공을 쫓던 시절, 누구보다 빨리 앞서나가 공을 잡고 골문을 향해 달리던 그때, 골문을 지키는 단유를 보며 꼭 한 골 넣겠다고 다짐을 할 때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곤 했었다. 그러면 명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공을 힘껏 걷어찼고, 공은 힘차게 날아가···단유의 손에 걸리곤 했었다.
‘그때, 축구 재밌게 했었지. 너랑.’
명수의 눈빛을 읽은 것인지, 단유가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그때 단유의 얼굴을 가리는 공이 눈에 들어왔다. 명수는 재빨리 몸을 틀고 발을 들어 올려 공을 받았다.
“막아!”
이제는 옆에서 아이들이 질러대는 소리도 들렸다. 명수는 다가오는 상대 수비의 힘을 어깨로 버티며 공을 차고 나갔다.
“막으라고!”
아마 저 목소리는 전반 내내 귀가 따갑도록 소리를 지르던 상대 팀 감독님의 목소리이리라. 후반 들어서 조용하나 싶었더니, 계속 저러고 있었나 보다.
‘목이 많이 쉬었나 봐요.’
명수는 공을 인사이드로 잡아채며, 수비수 한 명을 제쳤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가속을 하듯 앞으로 튀어나가며 상대 진영 깊숙이 들어갔다.
아웃 사이드로 공을 차서 바깥으로 빠지는 척을 하다, 다시 인사이드로 잡아채는 단순한 트릭에 또 한 명의 수비수가, 이번에는 자리에서 넘어질 정도로 균형을 잃었다. 그리하여 페널티 라인을 코앞에 두었을 때, 뒤쫓아 온 수비수들이 명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서 태클을 당하면, 페널티킥은 무리려나?’
좀 더 안쪽으로 밀고 들어갈 시간은 부족해 보이니, 욕심은 내지 말아야지. 명수는 공을 반대편으로 패스했다. 그리고 즉시 위로 뛰어올라, 아래에서 밀고 들어오는 다리를 피했다. 공은 반대편에서 보조를 맞추어 달리던 선배의 발에 넘겨졌고, 선배는 냅다 공을 걷어찼다. 가죽 터지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은 상대의 골문을 향해 날아갔고, 상대 골키퍼가 힘겹게 뛰어오르며 손을 뻗었다.
“와!”
그러나 상대 골키퍼의 손을 지난 공은 골포스트마저 지나 뒤쪽으로 떨어졌다. 힘이 조금 과도하게 쏠린 탓에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만 것이었다. 상대 팀의 응원석에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장계중학교 응원석에서는 아쉬움의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괜찮아.”
명수는 히죽 웃으며 선배를 향해 손뼉을 쳐주었다. 또 한 번 바람이 불어 명수의 이마를 적시던 땀을 식혀주자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일어난 명수는, 남은 시간 열심히 괴롭혀 주겠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악동 같은 미소에, 마크를 하려고 붙던 수비수는 등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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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두근대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느라 애를 쓰는 중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자신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동장 전체에 바람이 불게 할 정도의 마법은 아니었지만, 명수 주위에 인위적인 바람이 불게 할 정도는 되었다.
‘돌아왔다!’
‘돌아오다’라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갑자기 마법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왜 그래?”
“응?”
단유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니 도하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아니, 갑자기 심하게 숨을 들이쉬길래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해서.”
그러고 보니 저도 모르게 헐떡이고 있던 단유였다. 살짝 현기증도 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기분이랄까?
“아냐, 아무것도.”
수상쩍게 바라보던 도하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니 친구, 명수. 갑자기 컨디션을 찾은 모양이다. 움직임이 좋아졌어.”
도하의 말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두 수비수 사이에서 힘겹게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던 명수가, 체력이 좋은 선수로 교체된 마당에도 가볍게 제치고 나와 공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장계중의 공격에 활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선수라도 파괴력이 뛰어난 선수다 보니,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공격은 많이 아쉬웠지만, 남은 시간 동안 명수가 보여줄 활약이 더 기대되는 터라 응원석의 열기도 경기장 못지않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장계중! 장계중!”
단유는 일단 마법에 대한 고민은 시합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우선은 명수가 트로피를 올리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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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선생님은요?”
“아, 아까 밥 먹으러 간다고.”
“아,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는 거 아닌가요?”
“이사장님 뵙느라고 그런가 봐요. 이사장님이 김 선생님 부르셨다고 하던데.”
이사장이 부른 이유?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 모르게 병문안을 권했다. 뭐 좋은 일이라고 그런 일을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지연 역시 괜히 이야기해봐야 답도 없는 상황인 것을 알기에, 괜한 입방아에 오르기 싫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꼭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비밀이 비밀로 남을까? 수상한 행적이 호기심을 낳고, 의심을 불러, 억측과 추측 사이를 오가다 마침내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눈이 몇이고, 입이 몇이던가. 이 많은 눈과 입을 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순진해 빠진 것이리라.
“지연 선생님, 이러다 진짜 이사장 댁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한 선생님이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커피잔을 들다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선배교사는 등을 등받이에 기대며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는 법이니까’라는 늬앙스로 대답했다. 후배 교사는 커피를 살짝 입에 머금었다가 ‘혹시’하는 느낌으로 자신의 추측을 꺼냈다.
“솔직히 행정실장 소문도 소문일 뿐이잖아요?”
“선생님 말씀은, 행정실장의 행실이 나쁘지만 않다면 권세가의 며느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죠. 이사장님 산하 재단에 학교만 몇 개예요? 그 정도면 대기업 재벌 못지않은데.”
대기업 대리급에게 결혼을 해도 호사라 하는데, 준재벌급 집안에 시집을 간다면 호사 중의 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래도 문제는 행정실장이야. 소문이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하는 것 좀 봐. 하는 것 없이 거들먹거리기나 하지. 행정실에서는 이미 ‘능력 없는 실장’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가득해.”
‘망나니’라는 말은 포장마차에서나 꺼낼 말이지, 교무실에서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선배교사는 순화시켜서 말했다.
“그래요?”
“그뿐인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선생님이라면 우리 이사장님 며느리 되고 싶어?”
“···에이.”
“그러니까. 이사장이 돈독이 올라서는 학교를 무슨 하청 공장쯤으로 아는 양반인데, 그런 사고방식 가진 양반이 집안에서 제대로 하겠냐고. 학교 선생들도 아랫사람 부리듯이 하는 양반인데, 며느리는 또 오죽하겠어?”
“근데요, 우리 학교, 감사 뜨면 걸릴 거 많겠죠?”
“안 떠. 내가 이 학교에서만 지금 10년째 있는데, 한 번도 감사에 안 걸리더라고.”
“왜요?”
“라인이 있어, 라인이.”
후배교사는 발끈했다. 아니, 발끈하는 시늉을 했다.
“이래서 교육 개혁이 안 되는 거예요. 아래에서, 현장에서 우리가 아무리 쇠가 빠지게 노력하면 뭘 해요? 위에서는 건성건성 하면서 공문이나 잔뜩 내려보내기나 하고, 정작 자기 일들은 제대로 하지를 못하는데.”
“새삼스럽기는.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줄곧 그랬어. 나 봐. 그냥 포기했잖아? 그냥 이대로 무탈하게 정년까지 가는 게 내 꿈이야, 꿈.”
‘포기하면 편해.’라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는 선배교사였다.
한때 전교조 출신 교사들에 의해 교육 개혁에 대한 열망과 학교 비리 폭로가 줄을 잇기도 했었다. 새로운 교육, 참교육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현실화될 거라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으니, 어느새 전교조는 지탄의 대상이라도 된 듯이 손가락질을 받고, 아이들에게 불온한 사상이나 가르치는 그릇된 선생들로 인식되면서 교무실 내에서도 터부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무실에서는 더는 ‘참교육’과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불온한 교육을 위한 선전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며 교사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고, 교사들은 그저 정해진 기간 착실하게 따박따박 월급을 모아 무사히 정년퇴직할 수 있기를 걱정하도록 만들었다. 아이들의 미래, 나라의 미래를 위한 교육적 토론 대신, 사학연금이 줄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용들로 주를 이루었고, 학과 수업을 위한 조언을 나누는 대신 학생 혹은 선생님들의 뒷담화를 주로 나누는데 시간을 쏟았다.
“아이고, 난 모르겠네. 아, 선생님은 시험 문제 다 만드셨어요?”
“시험 문제가 다 뭐야. 이거 안 보여?”
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문 처리하기 바쁜 선생님의 하소연에 후배 교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 교육부 지침 일지 작성하는데요.”
“아, 그것도 있구나.”
이렇게 잡담하며 놀 시간이 없다. 단축 수업이 되면서 시간이 난 김에 처리해야지, 안 그러면 계속 미뤄질 게 뻔했다.
“일이나 하자고요.”
“예, 선생님.”
마침 커피도 다 마셨고, 뒷담화도 마쳤으니 다시 현실의 업무로 돌아올 때였다.
“다녀왔습니다.”
뒤늦게 지연이 교무실로 올라왔다.
“어머, 선생님.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아, 밖이 좀 덥더라고요. 갑자기 날이 더워졌네요.”
“하긴, 우리 밥 먹고 들어올 때도 덥긴 하더라.”
그래도 저렇게 땀을 흘릴 정도로 더운가, 라고 생각하며 선생님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따가울 정도로 밝은 햇살을 보면 더울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먹고 와도 되는데, 뛰어온 거야?”
“네? 아, 네.”
천천히 오면, 천천히 온다고 흉볼게 뻔해서 뛰어왔습니다, 라는 말은 속으로만 하면서 대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알았어요. 일 보세요.”
“네, 선생님.”
지연은 선배 교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로 찾아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손수건으로 목을 닦으니, 금세 흥건해지는 것이 정말 땀을 많이 흘리고 있긴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세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경기 끝날 때가 됐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더운 날 뛰어다니려면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던 지연은 상념을 털어버리고 앞에 놓인 펜을 들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땀이 천천히 식는 동안, 지연의 집중력도 더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