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디에 있었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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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나선 직후, 지연은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가는 이사장의 눈매가 지한영을 떠올리게 했었다.
‘독사 같은 인간들.’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갑질이나 하는 인간들.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정중한 척을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더러운 욕망들이 지연을 소름 돋게 하였다. 문제는.
‘힘없는 내가 참아야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라고 소리치면서 사직서를 이사장의 얼굴에 내던지거나, ‘어디 그 더러운 눈으로 쳐다봐! 이 색골!’ 이라고 외치며 한영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엉덩이에 종기가 나도록 도서관에 앉아 시험공부를 했고, 두 번 만에 임용고시에 합격한 후, 1년의 기다림 끝에 어렵게 학교에 들어왔다. 들어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으니···.
그런데 이런 직장을 고작, 남자 때문에 때려치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안달인 직장인데, 그 고생을 하고 들어온 직장인데 그렇게 쉽게 나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고작 이런 이유로 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저들에게 굴복하는 모양새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 현명하게, 어른스럽게.
“참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한영의 집적거림과 이사장의 팔불출쯤이야, 어른스럽게 참으면 그만 아닌가? 문득, 학교 첫 출근 하기 전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좋은 남자 시집만 보내면 되겠네.”
그 말씀이 있기 전에는 온갖 신세 한탄이 있었고,
“난 니가 취직도 못 할 줄 알았다.”
“어릴 때 하도 말썽을 많이 피우길래 뭐가 되려고 저러나 했다.”
“너 공부시키느라고 등골이 부서질 뻔했어, 이것아.”
말씀 후에는 치열한 언쟁이 벌어졌지만,
“내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결혼 얘기를 해?”
“으이구, 니가 제대로 된 남자를 데려올런가 걱정이라 그런다. 직장이라도 잘 구했으니 이런 걱정이라도 하는 거지.”
“엄마는 딸내미한테 그러고 싶어?”
“후딱 치워버리고 싶네. 어휴, 아주 징글징글해.”
그런 기억들은 사라지고 ‘시집 가’란 말씀만 남았다.
‘빨리 남자 만나서 가는 게 정답일지도.’
어디 좋은 남자 없으려나? 좋은 남자 있으면 뭘 하나, 만날 시간이 없는데.
상념에 빠져 있던 지연은 교무실로 올라가려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일단 교무실에서 지갑을 챙긴 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길가에까지 나가서 맛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가야겠다. 가서 맛있고 양 많은 음식을 배가 터지게 먹어서 스트레스라도 풀어야겠다, 고 마음을 먹었다.
‘아, 혼자 먹어야 하잖아.’
지연은 학교 앞 분식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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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전이 시작되고 다시 아이들은 큰 소리로 ‘장계중’을 외치면서 응원전을 펼쳤다.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몸싸움에 환호를 보냈고, 공을 뺏어가면 야유를 보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기에 집중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어디 갔지?’
분명 아침에는 가지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도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손으로 꼭 쥔 채로 등교했다.
‘그것만 있으면, 랭킹 1위도 껌인데.’
병호는 연신 주머니를 뒤지고, 가방을 헤집었지만, 그 조그만 USB는 행방이 묘연했다. 병호가 찾는 USB는 며칠 전, 중국 해커 그룹이 만든 해킹 프로그램이었는데 정체된 캐릭터의 레벨업을 위해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병호는 최근 들어 살맛 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제는 1학년 때처럼 ‘친구’들의 우정을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병호의 아이템 목록들을 보며 질투와 시기 섞인 환호를 보냈고, 병호는 하나씩 선물을 하사하면서 칭송받는 스타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 매일 무리하다시피 게임을 즐겨야 했지만, 결코 본인은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컵라면을 대접받으면서 친구들의 레벨업을 도울 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그래서 잘 따라오지 못해 버벅거려도 웃으면서 가르쳐줬고 친구들이 호의에 고마워할 때, 속으로 득의양양해 했었다.
물론 그걸로 만족할 생각은 아니었다. 남들은 아이템을 팔아서 돈을 벌기도 한다는데, 병호라고 그 생각을 못 했을 리 없었다. 실제로도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아이템을 팔았다. 최초의 거래는 10만 원이라는 목돈에 거래되었고, 이후로도 거래를 계속해서 불과 몇 주 사이에 30만 원이라는 거금을 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병호의 캐릭터는 정체기에 다다랐다. 좋은 아이템으로 돈을 벌고, 남는 아이템을 적선하여 아이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마당에 쉽게 포기할 순 없는 일.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던 중, 우연히 중국 해커 그룹에서 만들었다는 해킹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병호는 그동안 모은 거금을 들여 그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 있었다.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USB였지만, 그 안에 든 가치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
마침 오늘은 단축 수업이 진행될 게 뻔했고, 그렇다면 일찍 끝난 이후 바로 피시방으로 출동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는데 무기는 필수지.’
라는 생각으로 가지고 왔던 USB가 지금 병호의 손에 없었다.
‘아침에 학교에서 급히 나오는 바람에 떨어뜨렸나?’
병호는 손톱을 깨물며 생각했다. 차라리 학교 교실에 떨어뜨렸길 바랐다. 길거리에서 떨어뜨렸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가서 찾아야 돼.’
병호는 빨리 경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아냐, 아프다고 하고 조퇴할까?’
병호는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한참 경기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꽉 쥔 주먹이 들썩거리는 게 경기에 집중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만약 가서 아프다고 한다면? 하지만 전반전 내내 소리를 질러대며 열성적으로 응원하던 병호에게 적당히 하라며 어깨까지 두들겨주시던 선생님이었다. 그러니 아프다는 변명은 통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야 했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까? 병호의 시선은 경기장에 있지만, 머릿속에는 온갖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명수가 아무리 날고뛴다 해도 혼자서 축구를 할 수는 없는 법. 상대 팀에서 두 사람 이상이 달려들어 집중 마크를 하니 애초에 패스 자체가 어려웠다.
“명수가 완전히 막혔는데요?”
코치의 중얼거림을 들은 감독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타개책을 생각해 보려 했다. 만약 프로축구선수, 아니 고등부 정도만 되어도 다양한 전술을 훈련하고 그 전술을 즉시 적용하여 경기에 반영할 수 있겠지만, 중등부에게는 무리가 있었다. 전술이 어려우니 결국 개개인의 실력에 맡겨야 하는데, 명수를 제외하고는 기량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으니 탈출구가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반면 상대팀 역시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상대팀이라고 월등한 기량을 뽐내는 것도 아니었고, 명수를 막기 위해 무리를 하다 보니 공격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골이 안 나오네.”
“11번(명수)한테 공이 못 가게 막고 있는 거 봐라. 쟤들은 센터 라인을 넘을 생각 자체가 없어 보이잖아?”
“그럼 나중에 승부차기 가려고 그러나?”
“그럴지도 모르지.”
비록 골이 나오진 않지만, 그래서인지 공 하나를 두고 두 팀이 벌이는 격렬한 몸싸움과 신경전에 양 팀의 학생들 모두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상대팀 감독은 후반전에도 전과 같이 목청을 높여 지시를 내렸다.
“경균아! 공 가잖아! 막아! 지원아! 지원아! 센터로! 센터!”
하지만 그 역시 머릿속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까지도 명수를 잘 마크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이대로라면 실점하지 않고 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아이들의 체력이었다. 명수가 두 사람 사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공간을 오가며 뛰어다니는 터라 평소보다 더 빨리 체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순 있었다. 하지만 명수보다 더 많은 체력을 소진하고 있는 게 수비수들이었다.
물론 방법은 있다. 아직 교체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한 장은 공격용을 위해 남겨두더라도 두 장의 카드는 곧 소진 시킬 타이밍이 올 거 같았다.
문제는 타이밍. 교체된 수비수가 빨리 적응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명수는 금방 우리를 탈출한 야수처럼 거칠게 수비수를 제치고 페널티 라인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다. 너무 빨리 교체해버리면 또 체력 문제가 야기된다.
제일 좋은 건 명수가 교체되는 일이지만, 자신이 상대 감독이라면 절대 명수를 빼지 않을 테니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언제 써야 하지?’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와중에도 감독의 시선은 명수를 쫓았다.
양 팀 감독 모두의 시선을 받는 명수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전반전에는 그래도 간간이 공을 받아내기라도 했는데, 후반전에는 이마에 붙은 젖은 휴지조각처럼 찰싹 달라붙는 수비수들 때문에 도저히 공을 받을 수 없었다. 공을 받지 못하고 뛰어다니기만 하니 신경질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랬다.
공을 잡아 수비도 제치고, 전력 질주도 하고, 그러다가 힘을 끌어모아 강하게 차서 골도 넣고 그래야 재미있는데, 지금은 재미도 없을뿐더러 스트레스만 받는다. 이러다 한 골도 못 넣고 끝나면 정말 재미없는 경기가 되고 말 일이다. 그뿐인가?
만약 상대 팀이 한 골이라도 넣는다면,
‘그럼 내 탓이야. 내가 골을 못 넣어서 지는 거야.’
명수의 붉어진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다리를 멈추고 옷자락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리길래 시선을 돌렸더니, 자신을 따라다니던 선수들의 얼굴이 차라리 검게 보인다 싶을 정도로 붉어져서는 자기 못지않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좀 따라오지.’
분명 지쳤음이다. 보아하니 앞으로 10분? 아니 5분 이상은 못 뛸 것처럼 보였다.
“명수야!”
그때 센터라인 너머 빈 공간으로 침투한 팀 동료에게서 패스가 왔다. 마침 땀을 닦느라 걸음을 멈췄던 명수 때문에 수비수들의 긴장이 약간 풀렸던 것일까? 명수의 스타트를 두 수비수가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명수의 발이 먼저 공에 닿았다.
‘됐다!’
명수가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하는 찰나, 어느 방향에서 뛰어왔는지 자신을 막던 선수가 아닌, 또 다른 아이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달려들었다. 명수도 오랜만에 잡은 공에 흥분하면서 잠시 집중력이 흩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태클을 피하기 위해 공을 옆으로 굴렸는데, 미처 컨트롤을 완벽하게 하지 못해 공은 아쉽게도 옆줄을 벗어나고 말았다. 운동장 전체에 탄식과 야유와 함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삐익!”
명수가 머릴 싸매고 무릎을 꿇었을 때 들린 호각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상대팀의 교체 선수가 팔짝팔짝 뛰면서 운동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팔팔한 얼굴로 투지를 불태우는 그 선수는 이내 명수에게로 다가왔다. 대신 금방이라도 운동장을 침대삼아 드러누울 것처럼 보이던, 체력이 간당간당하던 선수가 빠졌다.
“덥네.”
봄인데도 유난히 더운 것 같았다. 명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명수, 많이 지친 거 같은데?”
도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선을 벗어난 후, 실망감을 드러내며 무릎을 꿇던 모습과 이후 다시 일어서는 모습까지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단유도 명수가 체력고갈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조기 축구회를 할 때도 이 정도로 집중 견제를 받은 적이 없었던 터라, 명수는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아직 후반전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이 시간까지도 골이 나지 않은 채로 무기력하게 경기를 치렀던 적이 없었기에 명수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오전에는 그저 따스한 정도라 생각했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힐 정도로 더워졌다는 것 역시 명수를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한꺼번에 명수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했고, 명수는 어느 때보다 힘겹게 경기를 뛰고 있었다.
단유는 명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명수를 도울 방법이 있을까? 물을 뿌려주고 싶지만, 닿지도 않을 거리. 명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 중이었다.
‘명수야.’
명수는 단순히 이 한 경기를 위해 뛰는 것이 아니었다. 중간 브레이크 타임 때 다른 후보 선수들이 그랬듯이, 명수도 미래를 위해 뛰는 중이었다. 너무 한길만 파느라, 다른 길―예를 들어 공부라든지―은 전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집중했고 더욱 노력했음을 단유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뛰어난 재능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오랫동안 함께 했던 단유는 재능 이상의 노력과 땀이 배어든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던 운동과 연습들을 함께 지켜보지 않았던가. 부상으로 인해 지난 추계 대회 참석이 어려웠을 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얼마나 힘들어했었던가.
유일한 가족, 이기에 단유는 명수를 돕고 싶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그때도 유난히 더웠던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보육원 앞 조그만 운동장에서 골대를 향해 달리며 어설프게 공을 차던 명수와 이를 지켜보던 자신의 기억.
그때도 단유는 명수가 흘리는 땀을 보다가 그 땀을 식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단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명수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그때는 가능했던 그 방법.
‘바람. 공기의 이동. 기압, 전향력, 마찰력, 지형, 온도···.’
갑자기 머릿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개념과 이미지와 숫자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개념들은 순차적으로 정리되었고, 각각의 이미지들은 논리적으로 조합되었다. 다양한 수식들이 단순하게 또는 복잡하게 얽히고 구성되어 연산 되었다.
‘디아포(깨달음).’
단유는 무의식적으로 예전의 배움을 떠올려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컨슈메(재현).’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