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52화 (352/956)

너는 어디에 있었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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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경기장을 넓게 보려고 고개를 좌우로 한 번 돌렸다. 푸른 잔디밭에서 올라오는 습한 기운을 느끼니, 새벽 공원을 뛰어다닐 때가 떠올랐다. 부상을 당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뛰어다녔던 그 공원에서 명수는 새벽이슬에 젖은 풀잎들이 내는 향을 즐겼다.

최근 벌어지는 경기 때문에 운동장 관리를 맡은 이들이 매일 아침 물을 뿌리며 관리를 한 덕임을 모르는 명수는 그저 공원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가 좋았고, 그래서 오늘의 경기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삐이익.”

휘슬과 함께 명수는 발아래 놓인 공을 옆으로 밀어준 뒤, 곧장 상대 진영으로 뛰어들어갔다. 상대 팀 역시 명수의 진입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이번 춘계대회에서 제일 주목을 받는 명수가 시합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뛰어들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곧 한 소년이 달려와 명수의 곁을 마크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시합 전에 임무를 하나 맡았다.

“명수를 밀착 마크해.”

경계 대상 1호인 인명수를 제대로 마크하지 않으면, 이번 시합 질 수 있다며 엄포를 놓는 감독의 눈을 바라보며 소년은 외쳤다.

“자신 있습니다.”

신장이 비슷하다고 했다. 상대의 100m 달리기 속도는 알려진 바가 없어 비교할 수 없지만, 자신이라면 충분히 명수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몸에 명수보다 빠르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으리라, 소년은 자신했다.

“제길.”

명수가 멈칫했다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몸을 돌리며 언제 날아들었는지 모를 공을 왼발로 받아내고 있었다. 소년이 무리해서라도 명수를 막으려고 어깨 싸움을 걸었지만 도리어 소년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무슨 힘이!’

다행이라면, 수비수가 소년 혼자는 아니라는 점이랄까. 공이 찔러 들어 오는 순간 왼쪽을 수비하던 선수가 협력 수비를 위해 달려들었고, 소년이 젖혀진 순간에 맞춰 명수의 진로를 막아 세웠다는 점이었다. 소년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발을 뻗었고, 다행히 공이 먼저 발에 닿으면서 명수에게 넘어갔던 공격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네요.”

코치의 한숨 소리를 뒤로하고, 그에 반응할 새도 없이 감독은 목청을 높여 지시를 내렸다. 조금 다혈질인 감독은 묵묵히 서 있는 명수네 학교 감독과 다르게,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아이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패스해! 패스! 오른쪽 비었잖아! 장태동! 태동아!”

경기 초반부터 저러다 나중에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게 아닐까, 설핏 걱정이 들었던 명수네 팀 감독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오늘 명수 컨디션 좋아 보이지?”

그에 코치가 코웃음을 쳤다.

“언제 안 좋은 날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감독은 공을 뺏겼음에도 여전히 웃는 얼굴의 명수를 확인한 뒤, 공의 행방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과연 결승에 올라온 팀이라 그런지 공격력이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창들이 사방을 찔러대며 위협하는 꼴이라 자칫 방심하면 여지없이 골을 먹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쪽이 창이라면, 이쪽은 총, 아니 대포지.’

평소 축구부를 관리하며 오랫동안 아이들을 관찰해온 감독도 이번 시합에서 명수가 보인 활약에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습 때는 마냥 해맑게 웃으면서 별다른 투기를 보이지 않았던 명수였기에 이 정도로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일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웃는 얼굴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명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결승전이 아니라 동네 친구들이랑 공 차며 노는 꼴로 착각할 정도다.

“야, 준호야! 붙어! 붙어야지!”

상대팀 감독의 목소리를 걱정하기 전에 우리 팀 코치의 목소리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소리 안 질러도 돼. 놔둬도 괜찮아.”

감독이 코치에게 한마디 할 때쯤, 수비에 성공한 장계 축구부가 공을 빼앗아 반대편으로 넘기면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충분히 강한 팀이야, 우리 애들은.”

감독은 두 다릴 곧게 펴서 땅 위에 박고,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경기를 지켜보았다. 마치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선 동상의 영웅처럼.

****

짙은 적갈색의 문 앞에서 지연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몇 번의 심호흡 후, 지연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들어갔더니 근엄한 표정의 이사장이 금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지연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네, 우선 여기 앉아요.”

문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지연에게 착석을 권한 이사장은 상석에 자리한 뒤 지연의 위아래를 가볍게 훑어내렸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아, 그래요? 그래도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으시죠?”

몸을 기울여 테이블 위에 있던―미리 준비돼 있었음이 분명한―다관의 손잡이를 잡고 지연 앞에 놓인 하얀 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르 소리를 내며 잔을 채우는 차에서 따뜻한 향이 피어올랐다.

“한영이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덕분에 상처가 낫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더군요.”

이사장이 입을 열자 향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병문안 몇 번 간 거로 나을 부상이었으면, 병원이 왜 필요할까?

“한영이가 김 선생님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사실 부모 된 처지에서 이러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도 하지만 말이에요. 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나 있는 아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군가 궁금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리 불렀지만, 너무 긴장하지 말았으면 해요.”

하지만 인사를 한 이후 지연은 쉽사리 입을 떼지 않고, 줄곧 긴장된 시선으로 이사장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말은 공손하게 하는 척하지만 마치 며느리 심사하는 시아버지 흉내를 내는 꼴이라 불편했다. 그런데도 직장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이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 지연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정체였다.

그런 힘겨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인지 이사장은 자기 잔에 채운 차의 향을 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팔불출 같지만, 우리 아들 말이에요, 꽤 괜찮은 녀석이랍니다. 어릴 때부터 고집이 조금 있는데, 목표로 한 건 꼭 해내고 말더라 이 말입니다. 책을 한 번 붙잡으면 다 읽기 전까지는 옆에서 뜯어말려도 놓질 않아요. 또 어릴 땐 용돈을 모아서 자기가 사고 싶은 걸 사서 자랑하기도 하더라고요. 지금도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으고 있어요. 제 아들이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녀석이죠.”

목표가 여자라면, 그 여자를 자빠뜨릴 때까지 쫓아다니고, 목표를 이루면 초개와도 같이 다루며 등을 돌린다는 이야기는 왜 하지 않는가? 사치는 부리지 않지만 도박을 좋아해서 날린 돈만 모아도 집 두 채는 샀을 거란 이야기는 왜 하지 않는가?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 대학교는 외국의 이름 모를 곳을 나와선, 아버지 밑에서 한자리 해 먹고 있다는 건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눈 가리고 아웅’이라더니, 정말 이사장의 얼굴을 가리고 아웅하고 싶다.

지연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잔 속에 들어갈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축였다.

‘정말 모르나? 이사장 아들의 대한 소문은 이미 교무실 여자 선생님들 사이에 파다한데?’

슬쩍 고개를 들었더니, 마침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지연을 바라보는 이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지연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함께 있으면 왜 이렇게 시간이 가질 않는 것인지.

“이렇게 보니, 김지연 선생님, 참 조신하고 정숙하시네.”

“···과찬이십니다.”

“아니에요, 아니야. 정말 우리 아들이 이야기할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탐이 나요, 탐이 나.”

탐내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는 돌 보듯 해 주세요. 제발.

“그래, 양친은 모두 잘 계시죠?”

진짜 머리를 뜯고 싶은 지연이었다.

****

전반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운동장의 양쪽 스탠드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합은 팽팽하게 전개되어 0:0이었지만, 어린 선수들의 투지와 학교의 명예가 걸렸다는 명분이 묘한 경쟁심을 부추겼다.

“저쪽도 꽤 하네?”

“우리 학교가 공격은 좋은데, 마무리가 안 되네.”

“아까 우리 팀 애가 공 잡았을 때, 상대 팀에서 3명이 붙는 거 봤잖아? 3명이면 프로도 하기 힘들어.”

“명수였나? 걔가 빠르긴 빠르더라. 아까 공 나가는 줄 알았는데, 끝까지 쫓는 거 봐봐.”

“진짜, 그걸 살려야 했는데, 그랬으면 진짜 한 골 넣을 수 있었는데.”

전반전이 끝났음에도 열기는 쉽게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불타올라서 몇몇은 화장실을 가는 것도 잊고 열띤 응원전에 동참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상대 응원석 쪽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러야 한다면서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함을 지르는 아이들이었다.

“화장실 안 가냐?”

도하의 물음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도하는 단유의 대답을 들은 뒤, 고개를 운동장으로 돌린 채 가만히 있었다.

“가고 싶으면 갔다 와.”

“안 가도 돼.”

“그럼 왜 물었어?”

“그냥 물어봤어.”

단유는 못 말리겠다는 눈으로 도하를 한 번 본 뒤,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10분간의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벤치 선수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진짜 열심이네.”

도하의 중얼거림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애들도 후반전을 대비해야 하니까.”

도하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단유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 애들이 후반전에 나올 수 있을까?”

단유는 도하의 물음이 심상치 않다 여겨 도하를 바라보았으나, 도하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들이 몸을 푸는 광경에 머물러 있었다.

“나올 수도 있지.”

“못 나올 거야. 이전에도 못 나왔고, 앞으로도 못 나올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력이 안 되니까, 못 나온 거지.”

단유는 도하의 지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작전 때문에 못 나온 것일 수도 있어. 축구는 전 후반으로 나뉘는 경기이고 체력을 많이 소진해야 하는 스포츠니까. 전반에 뛸 선수와 후반에 뛸 선수를 구분해서 전략적 이익을 취해야 하는 게임이야.”

“교체 선수가 3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저 중 대부분 선수는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잖아.”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도하도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다시 이었다.

“왜 저렇게 열심히 할까?”

도하는 저 아이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보는 세상을 투영시켜 보고 있는 것일까?

단유도 도하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 때문이 아닐까?”

“꿈?”

“비록 지금은 후보 선수일 뿐이지만, 앞으로도 후보 선수로 계속 지내란 법은 없잖아. 언젠가는, 저렇게 자투리 시간도 노력하다 보면 주전 선수로 올라갈 수 있고, 프로 선수로 진출할지도 모르고, 국가 대표가 될 수도 있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해?”

단유가 돌아보니 도하가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본인의 꿈도 정하지 못한 마당이었다. 그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살 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전교 1등이나 하면서, 선생님께 칭찬만 받고 사는, 남부러울 것 없는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정작 단유로서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어려움을 안고 사는 편이었으니.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고 남겨진 사람도 몇 없어 정붙일 곳 없이, 외줄 타기 하듯 위태로움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중이었다.

초월적인 힘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 함부로 힘을 쓰지도 못하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눈치챌까 봐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노력, 최선은 단유의 일상이었지만, 그래서 미래가 보이냐고 묻는다면, 단유는 아니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미래를 맞이한 지금이 그렇듯이,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하는 미래가 실제로 다가올지도 확신할 수 없는 단유였다.

더구나 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현실의 명암을 보고 체험하는 요즘은 더욱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도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기면, 폭죽 같은 것도 터지려나?”

도하의 말에 단유가 뜬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통 경기 승리하면 운동장 뒤편 저쯤에서 폭죽이 팍! 하고 터지면서 막 종이꽃들이 날리고 그러잖아? 그런 거 하는지 궁금해서.”

단유는 피식 웃었다.

“안 할걸.”

“재미없네. 상금도 없고, 축포도 없고, 꽃다발은 있으려나?”

아마 학부모들이 준비하지 않았을까? 도하는 그 이후로도 트로피는 누가 가지나, 상장은 다 같이 받는 걸까, 저 공도 기념품이 되는가, 라는 엉뚱한 질문을 해댔다. 단유는 모처럼 마음이 동해, 도하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트로피와 상장은 학교에, 학교장 이름으로 따로 상장을 제작하여 축구부 전원에게 하달하고, 상금 대신 내신 점수에 도움이 될 기록이 학생 기록부에 기록될 것이며, 저 공은 다시 다른 공들과 섞여서 다른 대회에 이용될 것이다.

“고작 중등부 대회니까.”

고작 중등부였고, 고작 중학생이니까. 중학생은 아직 어리니까. 그러니까 ‘꿈’을 꾸며 미래를 좇는 정도는 격려하며 봐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단유는 몸을 다 풀고 다시 벤치로 향하는 선수들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손뼉을 쳐 주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저 모습은 비웃으면 안 되는 거잖아?”

도하는 단유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단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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