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디에 있었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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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어디에 있었어요?”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들이민 사내의 얼굴은 평소 보던 사람들의 평균적인 얼굴 크기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커서 그런지 눈도 커 보였고, 그래서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활활 타오르는 안광도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대답 안 한다고 해서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 보면, 형사취조는 한 사람만 취조실에 들어와서 독대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두 사람이 들어와서 자신을 상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어르고, 한 사람은 달래는, 소위 ‘당근과 채찍’ 전략?
“이 봐요! 지금 묵비권 행사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당신이 그곳에서 나오는 CCTV 영상이 있어요!”
뒤져보면 그곳에서 나오는 영상이 수십 개는 될 터이다. 그중 하나가 우연히 걸려든 게 아닐까?
“증거가 있다고요, 증거가.”
그깟 증거.
“그 시간, 어디에 있었어요?”
그 시간.
“대답해요!”
나는 뭘 하고 있었지?
“김지연 씨!”
왜 거기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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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졸업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당시의 기억이 생생했다.
여자는 호르몬 때문에 남자보다 빨리 성장한다고 하던데, 유난히 키가 작아서 자신은 키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슬퍼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그런 자신을 귀엽다고 안아주고 이뻐해 주었다. 정작 본인은 느린 발육 때문에 고민이 많았었는데.
그래도 그런 친구들 덕분에 밝은 학창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즐거운 기억도 많았고, 평생을 함께할 친구도 얻었다.
친구들과의 기억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책 한편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 1등 공신이라 하겠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 당시 지연은 평론가를 꿈꾸기도 할 정도였다. 책 한 권을 읽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는 법도 익히고 논리력과 상상력, 추리력, 어휘력 등을 기를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경험들을 너희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어요. 분명히 여러분들의 국어 점수 향상에 큰 도움이 될 테고 말이죠.”
아이들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연이 아무리 진심을 담아 말한다 한들, 아이들에겐 그저 여느 선생님의 훈계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은 숙제를 내주기 위한 핑계로 들렸고.
“다음 페이지 넘겨 보세요. 작품 이름이 뭐죠?”
“송아지요.”
“황순원의 송아지 일부분이 실려 있죠? 다음 시간까지 소설 전체를 찾아서 읽고 독후감을 써오세요. 다음 시간에 발표할 거예요.”
아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야유가 쏟아졌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너무 가혹한 숙제라는 불평도 나왔다.
“시험에 나올 거예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때를 맞춰 종이 울렸다. 지연은 숙제를 다시 한번 숙지시킨 뒤 교실을 나섰다.
“단유야.”
단유는 도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수업 내내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도하였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대신 수업시간 내내 편안한 자세로 넋을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
“그때 너 맞지?”
“뭐?”
“동굴에서.”
“무슨 소리야?”
“이상한 할아버지 있던 곳에서 나타났던 거, 너 아냐?”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말해.”
“···아냐.”
“수업시간 내내 그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숙제가 뭔지는 아냐?”
“아니.”
단유는 자신의 노트 한쪽에 ‘황순원의 송아지를 읽고 감상문 써오기’라고 적은 뒤, 페이지를 찢으려다 멈칫했다.
“너 내가 숙제 적어주면 해 올 거야?”
“아니.”
“그래.”
단유는 노트를 덮었다.
****
금요일이 되었다. 전날 장계중학교는 1:1의 스코어에서 팽팽하게 맞서다가 후반 종료 직전 얻은 코너킥에서 명수의 헤딩이 골키퍼의 선방으로 막힌 직후, 바닥에 떨어지는 공을 3학년 선수가 발로 밀어 넣으며 2:1의 신승을 거두게 되었다.
전교생의 등교가 끝난 시간에 맞춰 장계중학교는 출정식을 대신해 운동장에서 전체 조회를 가졌다.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가장 앞줄에는 장계중학교 축구부 선수들이 도열했고, 교장 선생님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모처럼 거창한 훈화를 할 수 있었다.
장장 20분에 달하는 긴 훈화 끝에 결승에 나선 학생들을 독려하였고, 학생들은 지친 얼굴로 조회를 마치게 되었다.
“잘 갔다 와!”
축구부는 일찌감치 짐을 싸서 학교에서 출발했고, 그 와중에 단유는 명수를 격려했다.
“VIP 할게.”
“MVP.”
“그거나 그거나.”
이후 장계중학교는 단축수업을 실시, 3교시까지 마친 후 이른 점심을 먹고 운동장으로 출발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디 갈 때는 꼭 선생님한테 보고하고 가야 하고, 말없이 빠졌다가는 절대 안 봐준다. 알겠지?”
“네!”
“응원할 때는 큰 목소리로 하고. 그럼 앞번호부터 차례대로 줄 서서 들어가자.”
결승전이라 그런지 관람석은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 지난번과 많이 비교되었다. 특히 운동장 반대편에는 상대 중학교의 학생들이 격렬한 응원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와, 이러니까 진짜 결승전 분위기 난다.”
“우리 학교가 이기겠지?”
“들어보니까, 경기마다 두 골 이상씩 넣은 팀은 우리 학교밖에 없다던데?”
“존나 세네? 우리 학교?”
“그런가 보더라.”
왁자지껄 떠들면서 자리를 찾아가는 가운데, 단유와 도하도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이윽고 장계 중학교도 응원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운동장에 선수들이 집합하여 몸을 풀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응원 소리는 더욱 커졌다.
“단유야.”
“왜?”
“내가 뛰는 것도 아닌데, 떨린다.”
단유는 조금 놀랍다는 듯 도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경기 시작하면 더 재미있을 거다.”
도하의 얼굴에 모처럼 ‘즐거움’이란 감정이 떠 있음을 발견한 단유는 다시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의 아이들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명수였다. 아침에도 봤었지만, 오늘 명수의 컨디션은 최고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합 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부디 평소와 같이, 다치지 말고 제 실력을 다 발휘하길 속으로 빌며, 단유는 경기의 시작을 기다렸다.
****
“김 선생.”
“점심 먹었어요?”
“아직이요.”
평소 12시 반에 점심을 먹던 습관 때문인지, 허기를 느끼지 못해 교무실에 남아 업무를 보던 지연이었다.
“그럼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올까요?”
음악 과목을 맡은 박 선생님의 제안에 지연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교무실에 남아서 지킬 사람 필요하잖아요? 지금 제가 제일 막내인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이랑 드시고 오세요. 선생님들 드시고 오면 그때 먹을게요.”
“아···그럴래요?”
지연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과 선생님들 대부분이 결승전이 열리는 공설운동장으로 향했지만, 몇몇 선생님은 학교에 남아야 했다. 당연히 교무실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아닌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2주 뒤에 있을 시험을 대비한 시험문제를 만들기 위해 남은 경우도 있었다.
남들 다 놀 때 놀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지만, 억지로 끌려가야 하는 경우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교무실에 남은 지연은 다시 펜을 들고 학습지를 참고해서 시험문제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점심’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갑자기 배가 고파오는 것만 같아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먹을 게 있으려나?”
자리에서 일어난 지연은 기지개를 켜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용도실로 향했다. 여기저기 뒤져봐도 먹을 게 없어 지연은 티백으로 우린 녹차 한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곧 시작하겠네.’
1시부터 시작이라고 했던가? 녹차 한 모금을 머금고 창가 쪽으로 향한 지연은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애들로 가득 찼을 운동장이 비어 있으니, 요일 감각이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니 넓은 운동장만큼 넓은 교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날이 좋다 보니, 이렇게 교무실에 처박혀 있기 싫어졌다.
‘나도 참. 시험문제도 만들어야 하고 공문 작성도 마쳐야 하는데, 뭐람.’
한숨을 토해내며 자리로 돌아간 지연은 팔을 걷어붙이고 다시 펜을 들었다. 남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일사천리로 문제를 만들어내던데, 교무실에서 가장 어린 주제에 가장 구식의 방법으로 문제를 만드는 지연은 펜을 들어야 머리가 돌아가는 기분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김지연 선생?]
“네.”
[나, 이사장이에요.]
지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학교에 있으시다면서?]
“···네.”
[잠깐 제 방으로 오실래요?]
“어, 저기···지금 교무실에 저밖에 없어서요. 교무실을 지켜야 하거든요.”
[잠깐이면 되요. 내려오세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끊어지는 전화를 보며 지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날이 좋아서 모처럼 기분이 좋다 했더니, 이렇게 순식간에 기분을 잡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연은 교무실을 핑계로 조금 더 있어 볼까 했지만, 그랬다가 괜히 다른 말이 나올까 걱정도 되었다.
“김 선생님? 저희 왔어요. 식사하고 오세요.”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 선생님의 미소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운동장을 바라보던 우성은 몇 단 아래쪽에 앉은 단유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씨발···.”
무식하게 힘만 센 놈. 아니지 유식한 놈이지. 유식한 데다 힘까지 좋으니 그야말로 ‘엄친아’라. 자신과는 출신 성분이 다른 녀석이었다. 저런 놈한테 잠깐이라도 비굴하게 굴었다는 게 쪽팔리고 열이 받았다.
‘도하 저 새끼는 갑자기 약이라도 처먹은 거야, 뭐야?’
어미 쫓는 강아지처럼 단유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단유 앞에서 해롱해롱 하는 꼴이 여간 눈꼴 시린 게 아니었다.
‘시다바리 새끼.’
이제 무서운 살기를 뿌려대며 학교를 주름잡던 도하는 없었다. 도하가 없으니 이곳의 ‘통’은 누가 될 것인가.
“진태야. 우리가 그 새끼를 한 번 족쳐야 한다.”
“저 새끼 힘이 장난 아니라며?”
“힘만 센 놈이다. 힘이 세다고 해도 머릿수에는 못 당하거든.”
도하가 있을 때도 머리 쓰는 일은 우성의 몫이었다.
“도하 저 새끼도 담가야 돼. 그래야 딴 놈들이 우릴 얕보지 않아. 광종이 봐봐. 저 새끼한테 당한 다음에 지금 어떻게 됐냐? 우리가 광종이 꼴이 날 수 있어.”
진태에게 위기의식을 가지란 의미로 광종의 예를 들었던 것은 유효했다.
“7반 대형이 있지? 걔가 지금 2학년 통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작년에 걔 완전히 좆밥이었잖아?”
“그랬지.”
“도하한테 존나 발리고 숨도 못 쉬던 놈인데, 지금 점점 기어오른단다.”
“그 새끼 나한테도 발렸는데.”
“그니까. 그래서 우리가 저 새끼를 확실하게 담가야 하는 거야.”
우성은 진태와 계획을 세웠다. 별로 거창하진 않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끝을 낼 수 있는 계획이라 우성은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그렇게 웃지? 어디 나중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
받은 만큼 돌려준다? 아니 받은 거의 10배는 되돌려 주리라. 턱을 조이면서 껌을 질겅대던 우성은 갑자기 돌아보는 도하의 시선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뭐야, 씨발.”
중얼거리는 우성의 말이 도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니, 도하는 우성을 살피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 후, 간간이 단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데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단유가 물었다.
“왜?”
“아니 그게···.”
도하는 우성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독기(毒氣)를 경고하려 했다. 하지만 단유가 먼저 도하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마.”
“뭐?”
“말했잖아. 신경 쓰지 말라고.”
도하는 단유의 말을 곱씹다가 그것이 지난번 우성을 위협할 때 했던 말임을 기억했다.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인 도하는 휘슬이 불리며 시작된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