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50화 (350/956)

주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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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3월이 지나가고 남쪽 지방에서는 이른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한 4월이 되었다. 서울은 아직 날이 덜 풀린 탓인지 벚꽃을 보긴 힘들었지만, 각종 화사한 봄꽃들이 도처에 피어서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덩달아 사람들이 입은 옷들도 점점 얇아졌고, 밝은 색깔의 패션으로 봄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색의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칙칙한’ 색의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학생들이었다.

“이게 뭐가 칙칙해? 하늘색이잖아?”

채윤은 이게 뭐 어떠냐며 밋밋한 반응을 보였지만, 지태는 불만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비 오기 전의 하늘색도 하늘색이긴 하지.”

투덜대던 지태는 와이셔츠 위에 걸친 조끼를 늘려 보이며 말했다.

“다른 학교 애들은 교복 되게 예쁘던데, 우린 이게 뭐냐? 남중이라 그런가?”

“그래 봐야 사람들 눈에는 그냥 교복이야.”

“야, 요즘은 교복도 패션이야. 다른 데는 일부러 교복 디자인을 바꾼다던데.”

“바랄 걸 바라라. 우리 이사장님이 직접 디자인 옷이라잖아.”

“칫.”

지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부루퉁한 얼굴을 하다, 명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모레가 준결승?”

“응.”

명수는 보도(步道) 위에서 구르던 작은 돌멩이를 발끝으로 톡하고 찼다. 힘차게 굴러가던 돌멩이는 보도 아래로 툭 떨어지더니 차도 바깥쪽의 하수구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대박이다. 작년에는 본선도 못 갔다면서?”

“내가 없어서 그래.”

명수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는 걸 보며 지태가 못 말린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니가 지금까지 넣은 골 개수만 세어봐도 알겠다.”

예선전 포함 5경기를 치루는 동안, 11골을 넣는 대기록을 세웠음은 물론 그중 한 경기에서는 해트트릭까지 세워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명수였다.

“모레 준결승하고, 금요일 결승?”

“그래. 금요일에 경기 끝나고 또 고기 파티 벌일 예정이다.”

예선 1차전 승리 이후 가졌던 회식의 여운을 잊지 못하는 명수였다. 그날 누구보다 많은 고기와 콜라를 뱃속에 집어넣은 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야, 너무 일찍 샴페인 터뜨리는 거 아냐? 모레 경기에서 질 수도 있잖아?”

“안 져. 내가 있는데 왜 지냐?”

“너 혼자 축구 하냐? 니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 팀 11명은 놀고만 있겠냐?”

“그럼 우리 팀은 구경만 하고 앉았게? 나 없어도 우리 팀 잘해. 내가 있어서 더 잘하는 거지.”

채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단유에게 물었다.

“우리 모레 경기할 때 갈 수 있나?”

“못 갈걸? 결승전을 하면, 학교 전체가 응원하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준결승은 아마 못 갈 거 같은데.”

“그렇지? 못 가지? 지태가 계속 갈 수 있다고 하길래.”

목요일 준결승 전은 오후 1시에 공설운동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고, 결승은 금요일 1시였다. 준결승도 응원이 필요한 경기가 아니냐며 참여를 부르짖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응원’보다 ‘땡땡이’가 목적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학교 측에서는 결승전만 응원을 간다고 선언한 마당이었다.

“이번에 우승하면 상금 같은 거 있나?”

“그런 거 없고, 그냥 기록이 남지.”

‘춘계대회 우승’이라는 기록이 고등학교 진학 시에 꽤 도움이 될 거라는 명수의 기대였다. 물론 단유가 보기에, 우승을 못 하더라도 이미 명수가 보여준 결과만으로도 여러 고등학교가 탐을 낼 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 그런데 말이야. 너, 도하란 애랑 친하게 지낸다며?”

채윤의 말에 단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누가 그래?”

“다들 그러던데? 전교 1등이 불량한 녀석 한 명 갱생시켰다고.”

헛소리. 갱생은 무슨.

“그러고 보니, 너 요새 걔랑 자주 다니더만? 점심 먹으러 갈 때도 같이 가고. 질투 날 정도야.”

지태의 농담에 단유는 날 선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지태는 쉽게 기죽지 않았다. 얼굴에 익살맞은 광대처럼 장난기가 잔뜩 오른 지태였다.

“그런 거 아니다.”

“내가 봤는데? 봤는데?”

“···걔가 따라오는 거야.”

이때 명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단유가 아닌 지태를.

“그게 그거지. 완전 브로맨스네.”

지태네와 달리 대충이나마 사정을 아는 명수이기에 지금 하는 말이 자신을 놀리려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굳이 계속 대꾸를 하면 놀림만 더할 거 같아 입을 닫아 걸은 단유였다.

아이들이 모처럼 놀릴 거리를 잡았다는 듯, 단유와 도하의 브로맨스를 각본 쓰듯 확장해가며―점심시간 이후의 밀회, 수업시간 중에 나누는 은밀한 대화 등―놀려대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교실 안에 있던 몇몇 학생들과 수인사를 나누며 자리로 향한 단유는 책상을 정리하고, 오늘 들을 학과목에 맞춰 책들을 서랍 속에 집어넣은 뒤, 최근 읽고 있던 책을 꺼내 독서에 들어갔다.

속속 등교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교실 안의 분위기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조례가 있기 얼마 전에 도하가 등교를 했다. 아침에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 도하는 교문을 지키는 지도 선생님을 피할 필요가 없어져서인지 느지막하게 등교하기 시작했다.

도하는 말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은 뒤, 멀뚱히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한 단유가 책을 덮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을 들며 말했다.

“안녕.”

단유가 왜 인상을 쓰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평범하게 인사 하면 안 되겠어?”

“평범하게 한 거 같은데?”

“그냥 말로 해. 왜 가만히 보고 있는 건데?”

“책 볼 때 방해하지 말라며?”

“방해하지 말란 소리가 인사도 하지 말란 소린 아니잖아?”

“그래? 몰랐어. 그럼 내일부터는 책 읽을 때 말 걸어도 돼?”

단유는 한숨을 내쉰 뒤, 정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인사를 할 요량이라면, 그냥 책을 읽고 있든 말든 해도 돼. 굳이 내가 쳐다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대신 그 외에 쓸데없는 이야기는 내가 책을 보고 있지 않을 때 해줬으면 좋겠어.”

“니들 또 사랑싸움하냐?”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 친구의 농담에 주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인데,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농담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도하가 워낙 험악하게 행동한 탓에 말을 걸지 않았고, 단유가 워낙 사교적이지 않다 보니 말을 걸지 않았는데, 도하와 단유의 ‘이상행동’이 빈번히 관찰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세운 벽을 허물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놀리는 말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지만.

“그런 거 아니거든?”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는 전일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내 촉이 딱 그건데?”

또 한 번 얕은 한숨을 내쉰 단유가 도하에게 ‘왜 가만히 듣고만 있냐’는 물음을 던지자,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고, 그 모습이 또 아이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인정? 인정?”

이럴 때, 소설에서는 ‘지랄도 풍년이다’라는 표현을 쓰던데. 이때 단유의 곤란함을 풀어준 것은 담임선생님이었다.

“이놈들아. 선생님이 오면 조용히 하는 척이라도 해라. 반장!”

“차렷!”

반장이 일어나 아이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조례로 시작하여, 마무리는 ‘오늘도 열공하자’는 내용으로 끝이 났다. 다만, 나가기 전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아, 2주 뒤에 시험 있는 거 알지?”

“아아.”

아이들의 탄식과 야유 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나가시는 선생님을 바라보던 도하가 단유에게 물었다.

“김단유.”

“왜?”

“너 지난번에 공부 가르쳐 준다고 안 했어?”

“내가?”

“응.”

“언제?”

“내가 공부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단유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니가 갑자기 친구 해달란 말로 바꾸면서 어영부영 지나갔던 말 아냐?”

“그랬나? 알았어.”

도하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1교시에 있을 국어 교과서를 꺼냈다.

“뭐야, 가르쳐 달란 거야, 말란 거야?”

“가르쳐 주려고?”

“아놔.”

단유는 가슴을 두드리다 도하가 꺼낸 교과서를 짚었다.

“넌 다른 거 말고, 이 책이나 열심히 공부해라.”

“가르쳐 줄 거야?”

‘아놔.’

그러나, 신경질을 조금 부리더라도 화는 내지 않는 단유였다.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내봐야 무슨 소용일까, 싶은 생각이었던 것. 단유는 책을 펼쳐 페이지를 휙휙 넘기는 도하를 보며 아주 오래전, 피를 무서워하던 친구를 떠올렸다.

도하와 놀이터에서 대화를 한 이후, 단유는 나름 호기심을 가지고 도하를 관찰했다. 그리고 동시에 도서관과 인터넷을 오가며 도하의 병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 노력했다. 의사가 아닌 이상, 분명하게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유사한 병명은 찾을 수 있었다.

‘집중력 과잉행동 장애.’

더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ADHD라는 병이었다. 보통은 초등학교 시절에 심하다가 중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이면, 정신적 성장과 함께 증상이 완화된다고. 하지만 더러 병세가 호전되지 않을 경우, 심각한 불안증세와 함께 과도한 폭력성을 야기하기도 한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내버려 둬서는 나을 수 없는 병이라는 점에 단유는 주목했고, 그래서 도하에게 병원에 내원하거나 혹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알려서 도움을 요청하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싫어.”

“왜?”

“지금은 괜찮으니까.”

일시적일 뿐이라고 설명해도 도하는 꺼렸다.

“너한테 얘기하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한테는 이야기하기 싫어.”

설령 그게 부모님일지라도. 그 대답에 단유는 더는 이 화제로 이야기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이유는 모를지언정, 도하의 눈에 깃든 아픔을 자기가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도하의 모든 행동을 좋게만 봐줄 수는 없었고, 특히 껌딱지처럼 자신만 졸졸 따라오는 행동에 짜증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리라. 조금 전의 일처럼, 자신이 쳐다봐줄 때까지 빤히 바라보고 있는 행동을 무신경하게 모른 척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지태의 말처럼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목줄 묶인 강아지마냥 졸졸 따라오는 모양새에 반 아이들까지 놀려대는 판이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었다.

“도하야.”

도하가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단유를 돌아보았다.

“···읽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단유는 그 말만 남기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

“김지연 선생님?”

지연은 곧 있을 수업 때문에 책을 챙겨 교무실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네?”

교감 선생님은 주먹을 말아쥐고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잠깐 시간 되십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이제 몇 분 후면 종일 울릴 텐데,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교감 선생님이 시간을 내 달라 하니 김지연 선생님은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교감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출석부를 가지러 교무실을 가로지르던 몇몇 선생님들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가 사라졌다.

교감 선생님은 커다란 돋보기안경 위로 눈동자를 들어 지연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번 주말 시간 되십니까?”

지연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예, 약속이···.”

“급한 약속 아니시면, 저랑 함께 병원 좀 다녀오지 않으시겠습니까?”

말하는 당사자도 부끄러워할 내용이 분명할 텐데, 교감 선생님의 얼굴에서는 딱히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에 갈 텐데, 시간 좀 내주세요. 김지연 선생님.”

이 학교에 온 지 이제 겨우 2년밖에 되지 않는 햇병아리 신세라 교감 선생님의 지시를 거부할 깡이 없던 지연은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 울린 뒤에야 교무실을 나오게 된 지연은 빈 복도를 걸으며 온갖 상념에 휩싸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이 이사장의 아들, ‘지한영’에게 찍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대학 졸업한 지 겨우 3년. 대학 때도 주변 남자들에게 꽤나 호감을 받던 처지라, 자신이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외모가 하필 독사를 연상케 하는 ‘지한영’ 행정실장의 눈에 들고 말았다. 한영이 학교를 장악한 이사장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을 옭아매려 한다는 게 심히 불쾌했다.

문제는 그 불쾌함을 풀 방법이 없다는 것. 또 다른 문제는 이 불쾌함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것.

멋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지연의 포부가 고작 여색이나 밝히는 남자 때문에 꺾여야 한다는 게 짜증 났다. 얼른 머릿속에 가득한 불쾌함을 털어내고, 학생들에게로 주의를 옮겨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한 지연이었다.

“차렷.”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교탁 앞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반을 틀리지 않고 들어왔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오늘 배우는 내용도 시험에 나올 거니까, 다들 수업 집중하세요. 알겠죠?”

“네!”

정작 집중할 사람은 자신인데. 씁쓸함을 담은 미소가 지연의 입에 잠시 걸렸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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