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48화 (348/956)

주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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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을 에둘러 싼 짙은 안개에도 가려지지 않는 우람한 산봉우리가 옛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모양새로 펼쳐진 가운데, 대나무들이 우거진 산길 어딘가에서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금빛 실올로 화려한 문양이 자수된 하얀 견포(絹布)의 사내가 펼쳤던 섭선을 접어 앞으로 뻗었다. 그 단순한 동작에 달려들던 험악한 인상의 산적(山賊)들이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출수와 동시에 거둬들이는 섭선에 흡(吸)자 결이 공명하여 나뒹굴었던 산적들이 사내에게로 끌려 들어왔다.

이어 사내가 반대편 손으로 장법을 펼쳐 주위를 아우름과 동시에 폭(爆)자 결로 기운을 떨치자, 커다란 굉음과 함께 산적들은 붉은 피를 뿌리며 조각난 채로 흩어졌다. 사내가 펼친 무공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힘에 탄성이 쏟아졌다.

“존나 세네.”

“레벨 몇인데?”

키보드로 스킬을 누르던 아이가 별거 아니라는 듯 ‘79’라고 말하자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던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대박!”

“야, 나 버스 좀.”

그사이 쓰러진 산적들에게서 아이템을 줍던 소년은 인벤토리를 열어서 획득한 아이템을 확인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템에 커서가 닿고 아이템 스펙창이 뜨면서 아이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와, 일장 떴다!”

“씨발, 저게 저기서 뜨네?”

“보스몹도 아닌데?”

캐릭터를 조종하던 소년도 잠시 게임을 멈추고 손바닥을 비벼 땀을 식혀야 할 만큼, 이번 앵벌이는 대박이었다. 게임에서 몇 안 나오는 희귀 아이템인 만큼 소년도 꽤 흥분했다.

“와, 잘 나가는 놈은 뭘 해도 되네.”

“좋겠다.”

소년, 병호는 신이 나서 외쳤다.

“씨발. 야? 뭐 먹을래? 내가 쏜다!”

“와아!”

함께 피시방을 찾았던 친구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카운터에 먹거리를 주문하는 사이, 병호는 오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축구에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원래 니편 내편 정해진 대항전을 보면 저도 모르게 흥이 오르지 않던가. 마침 장계 중학교 축구부가 큰 점수 차로 승리해서 신이 나던 마당인데, 친구들이랑 피시방에 와서 득템까지 했으니 오늘 하루는 정말 ‘땡’ 잡은 날이었다.

옆에 놓인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가슴속에서 개운함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 정말 끝내줬다.

****

“뭐?”

도하는 어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친구?’라고 재확인시켜주었다. 결국 단유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들러붙는 도하를 떼어놓고 주위를 둘러보다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장소를 골라 도하를 데리고 갔다.

상설 운동장 옆에 있던 아파트의 놀이터에는 몇몇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낯선 어른(?)의 등장에 경계의 시선을 던지기도 했지만, 단유는 모른 척하고 놀이터 경계에 설치된 벤치로 가 앉았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이라 살짝 눈이 부시기도 했지만, 봄 햇살은 언제나 환영이라 단유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도하는 쭈뼛거리며 단유를 따라와 단유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들 위로 굳은 얼굴의 꼬마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눈치를 주고 있었다.

“다 큰 놈들이 여기 와서 뭐하니?”

라고 묻는 것 같은 새초롬한 표정의 양갈래 꼬마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제 말해봐.”

“응?”

잠시 잡생각에 빠졌던 도하는 단유의 물음에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 말하려던 거. 도와달라며?”

“아, 그거.”

“친구, 그거 해 달라는 거 아니지? 진짜 원하는 게 뭔데?”

친구 맞는데, 라고 대꾸하려다 도하는 그 말을 삼켰다. 확실히 아까는 조금 당황해서 막 뱉어내긴 했는데, 사실 진짜 원했던 것은 단유 말대로 따로 있었던 것 같았다.

“도와달란 말은 진심인 거 같은데, 친구? 아까 너 친구 해달란 말이 마치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 거 알아?”

도하는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와 닿는 거 같아 고개를 숙였다. 잠깐 앉은 건데도 햇살이 꽤 따갑다.

고개 숙인 도하를 슬쩍 훔쳐보던 단유는 얕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햇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지금 이렇게 도하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단유는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도하를 이세계에서 데려온 이후, 양호실에 데려갔던 것도, 그곳에서 도하에게 말을 걸었던 것도, 이런 식으로 도하와 나란히 앉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때는, 당시의 단유를 자극하던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미친 듯이 달리던 모습, 현실로 돌아오고도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심하게 떨며 두려워하던 도하의 심리에 대한 호기심.

딱히 친절하게 대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친하게 지내자고 손을 내밀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상대가 이렇게 ‘들러붙을’ 줄은 단유로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림이었다.

“나···.”

조심스럽게 입을 연 도하의 목소리에 단유는 상념을 지웠다.

“지금이 좋아.”

부탁이다, 제발 말을 하기 전에 앞뒤에 제대로 설명을 붙여줘. 단유가 이마를 짚으며 고뇌하는 표정을 짓는 걸 못 봤는지, 도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지금처럼,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고 편안하게 햇볕 맞으면서 살고 싶어. 니 친구들처럼.”

단유는 눈썹을 찡그린 채, 도하의 말을 해석해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 좋은 단유라고 해도, 햇볕을 맞는 것과 자신의 친구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내가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러니까, 하나씩 풀어보자. 우선 햇볕을 맞는 게 좋다고?”

“응.”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

“응.”

“그럼 평소에는 어떤 생각을 하는데?”

도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저것.”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말하기 힘든 거야?”

도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생각’이라는 언급만으로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온갖 기억과 소리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머리 속 뇌가 마치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근거리다, 점점 그 박동이 커지더니 마침내 뇌를 터뜨리고 나갈 것 같았다.

도하가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도하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그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숨 쉬어.”

그제야 도하는 자신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고, 밭은 숨을 내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단순히 어깨에 손이 얹어졌을 뿐인데도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짓누르던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김 단유, 이 녀석은 혹시 마법사일까?

숨을 고르던 도하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여러 사람이 떠드는 소리야.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도 순서 없이 튀어나오는데, 그게 다 섞여서 마치 팝콘처럼 막 나와. 그래서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

“그런데, 지금처럼 가만히 햇볕을 맞고 있으니까 아프지 않다?”

“으응.”

“이전에는 이렇게 쉬어 본 적이 없어?”

“쉬어도 계속 생각나고 떠들어서 정신이 없고, 그래서 화가 나고 그랬지.”

“···그럼 ‘내 친구들처럼’은 무슨 뜻이야?”

“니 친구들은 안 아프잖아.”

도하는 아픈 사람이었다. 단유로서도 그 증상만으로 어떤 병이다, 라고 확언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도하는 병을 앓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병원, 안 가봤어?”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할게. 난 널 도울 수 없어. 내가 의사가 아닌 이상은 말이야. 차라리 병원에 가서···.”

“너랑 같이 있으면!”

단유의 말을 자르고 나온 도하의 외침에 단유가 놀란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단유만 놀란 게 아니라, 놀이터에서 눈치를 ‘주던’ 아이들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식으로 말을 시작하지 말아 달라고, 단유는 사정하고 싶었다.

“너랑 있으면 머리가 개운해져서, 니 친구들처럼 편한 얼굴로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너랑 같이 있으면 안 될까?”

제발! 다른 좋은 표현 다 놔두고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고! 단유는 저도 모르게 좁혀진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아프지 않다?”

“응.”

“그래서 내 친구들처럼 나랑 어울려 지내면 아프지 않게,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거지?”

단유는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사정을 물었다. 이래야 나중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집에 가서 ‘이상한 형들’이나 ‘이상한 오빠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저 아이들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도하와 있으면서 부동심(不動心)이 조금 흔들린 모양이다. 단유는 호흡으로 정신을 다잡은 뒤, 도하에게 말했다.

“그건 임시방편이야.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병이 나을까?”

“그래도, 일단 이렇게 함께···.”

“그러니까!”

애절한 눈빛으로 ‘함께’라느니, ‘너랑’ 같은 단어로 우리 관계를 재설정하려 들지 말아 달라고. 단유는 조금 더 냉정한 시선으로 도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병원에 가기 싫어?”

“그것도 그런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

도하의 어머니는 보험판매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도하의 이야기는 어쩐지 초등학교 때 만났던, 재림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실 여러 가지 점에서 재림이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담배를 핀다거나, 교내 생활이 불량하다거나, 부모님이 바쁘시다거나.

“아버지는?”

도하는 이를 악물었다.

“없어.”

단유는 도하가 ‘아버지’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물어봐선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아버지’가 트라우마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부분은 단유의 영역이 아니었으니 넘어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고, 단유는 선을 그었다.

“일단 내 입장을 정리하자면, 난 너랑 친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단유의 직설에 도하는 일순 얼굴을 구겼다.

“정확히 표현하면 없었어. 그렇다고 지금 막 생겼다는 뜻도 아니야. 이런 식으로 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굳이 그렇게 정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드니까. 니가 나랑 있으면 편하다고 하니까, 그건 안 막을게.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막 마음을 터놓을 정도의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나한테 말을 걸 일이 생기면, 제발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 좀 하고, 생각도 그냥 하지 말고 깊이! 아주 깊이! 신중하게! 한 다음에 말을 꺼내도록 해. 그 정도만 해준다면 옆에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도하는 도리어 애매하게 매듭지어진 단유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친구를 한다는 말이야, 안 한다는 말이야?”

“‘친구’라는 이름으로 친한 척은 하기 싫다는 거야. 솔직히 니가 지난 한 주간 보인 행동을 생각해봐. 아무리 속없는 사람이라도 너랑 친구하고 싶을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너가 어제까지의 너랑 같은 사람인지도 헷갈릴 정도라고. 그리고 어제까지의 너라면 난 너랑 이렇게 말을 나누는 것도 싫어.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담배 냄새는 전혀 나질 않으니까, 이렇게 대화를 해주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도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 단유가 확실한 금연제 역할을 수행 중인 것이다. 도하는 단유와 가까이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고.

“알았어. 그럼···그냥 같이 다니는 정도는 상관없다, 이거지?”

“···그래. 주의사항은 꼭 지키고.”

“오케이.”

도하는 뭔가 중요한 고비를 넘긴 말기 암 환자의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개운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순간 단유는 자신의 결정을 철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앞으로 평탄치 않을 일이 계속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도하를 돌려보낸 후, 단유는 바로 집으로 가진 않았다. 친구들에게 ‘할 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집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단유가 기억을 더듬어 향한 곳은 바로 서울 근교의 산들 중의 하나였다.

고작 몇 달 사이에 폐가처럼 녹슬어가고 있던 산 중턱의 산장과 마주한 단유가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간 곳은 바로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무너진 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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