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46화 (346/956)

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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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보통은 늦잠을 자고 있을 아이들이 보기 힘든 사복 차림으로 공설운동장으로 앞으로 몰려들었다.

“오오, 상철이 패션!”

“니가 내 패션을 지적하냐? 아침에 거울은 봤냐?”

“발목에 피 안 통하는 거 아냐?”

“지랄이다, 새꺄.”

왁자지껄 떠드는 분위기가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거의 소풍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왁스로 헤어스타일링에 신경을 쓴 아이들도 있었고, 비싼 브랜드의 바람막이를 걸치고 나와 주목을 끄는 아이들도 있었다. 평소 교복으로 가려졌던 아이들의 개성이 이런 곳에서 드러났다.

그래 봐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새파랗게 어린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야, 저기 온다?”

“누구?”

“프랑키!”

한 소년의 외침에 모여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너도나도 할 거 없이 ‘프랑키’를 연호했다.

“그게 뭔데?”

‘프랑키’라 불린 소년은 그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 했지만, 누구 하나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고 프랑키, 라고 부르기만 할 뿐이었다.

“프랑키, 사복 입으니까 더 키 커 보인다?”

“프랑키, 오늘 시합 몇 시 부터야?”

“야, 프랑키. 나중에 다른 반 애들이랑도 한 번 붙어봐.”

“야, 그러면 팔씨름도 전교 1등 하는 거 아냐?”

“그럼 재밌겠다!”

‘프랑키’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자기들끼리 신나서 쿵떡쿵떡 떡방아를 찧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심에 자근자근 씹히는 떡처럼 흐물흐물해질 때까지도 ‘프랑키’는 입을 떼지 못하다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선생님.”

선생님의 도착과 함께 ‘프랑키’는 ‘단유’라는 이름을 얻었다.

“야, 김단유. 너 때문에 팔에 파스까지 붙였다!”

팔을 빙빙 돌리는 선생님의 제스처에 단유는 희미한 미소를 입에 문 채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히죽 웃으면서 농담이야, 라며 단유의 등을 토닥였다. 주위를 둘러본 선생님은 출석부터 확인하셨다. 번호로 체크한 선생님은 두 사람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2번 홍진호랑 27번 김전일은 안 왔네?”

“진호는 아파서 못 온다고 했고, 전일이는 할아버지 댁에 간다고 하던데요.”

어차피 강제가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지각 상습범들이 오늘은 일찍 왔네?”

선생님의 농담에 상습범으로 지목된 몇 아이들이 머쓱한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소에도 좀 이렇게 일찍 와라? 응?”

“네!”

어쨌든 시합이 끝나는 시간까지는 이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하는 선생님은 인원 체크를 마친 후, 몇 가지 주의사항―개인 활동 금지, 시합 중 선(先)귀가 시 보고할 것 등―을 주지시켰다.

“그럼 들어가자.”

선생님이 앞장서고 그 뒤를 아이들이 얌전히 두 줄로 서서 따라가는, 일은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입구를 향해 달려간 아이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혹은 선착순 1명에게 주는 선물 따위를 위해 달렸다기보다는, 그냥 기분 좋은 날씨에 들뜬 젊은 혈기를 발산하기 위해 달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선생님도 굳이 아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야, 프랑키.”

단유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도하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었냐?”

반 아이들이 단유의 등장과 함께 몰려든 터라 감히 끼어들기 어려워 뒤쪽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겨우 틈이 나서 다가온 도하였다.

“근데 프랑키가 뭔데 다들 프랑키라고 불러?”

“프랑키, 몰라?”

“몰라.”

“있어, 그런 게.”

어떤 만화의 팔뚝 굵은 캐릭터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뭐 그리 중요한 비밀일까 싶지만, 모르는 게 없는 단유가 모른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도하도 가르쳐주기를 피했다.

단유도 애써 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명수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라 생각했고, 아이들이 부르는 별칭에 악의는 별로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안 들어가?”

“여기서 만나기로 한 애들이 있어.”

“누구?”

“단유야!”

때마침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단유와 도하, 우성의 고개가 돌아갔다. 넓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지태와 채윤, 그리고 상미였다.

“어?”

도하와 우성에게서 동시에 감탄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둘의 시선이 고정된 사이에 지태네가 다가왔다.

“야, 니네 반···애들은?”

“벌써 들어갔다.”

지태가 단유 옆에 선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같은 반?”

“응.”

“난 유지태. 5반이다. 반갑네.”

지태가 특유의 넉살로 먼저 인사를 했다.

“···진도하다.”

“유우성.”

“오, 나랑 성이 같네? 얘도 유 씬데.”

지태가 손가락으로 상미를 가리키자, 사내들끼리의 어색한 인사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도하와 우성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홍일점에게로 옮겨졌다.

“안녕? 난 유상미야. 반갑다.”

쾌활하기만 한 상미의 인사에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마주 손을 들어 보였다.

“됐어. 우리도 들어가자.”

단유가 먼저 몸을 돌렸고, 이어 지태와 상미가 뒤에 붙으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어?”

채윤은 ‘왜 난 빼먹어?’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미 소개 타이밍이 지났고, 도하와 우성 역시 단유의 뒤를, 아니 상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장계중학교 축구부 선수들이 운동장에 나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우리 학교 축구부 잘하냐?”

“몰라.”

시큰둥한 태도로 운동장을 바라보며 있던 아이들의 대화는 축구보다는 시합이 끝난 뒤의 일과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이들이 나온 것은 그저 주말에 친구들과 모여 놀 핑계가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그와 달리, 축구부가 몸을 푸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며 금일 시합의 결과를 짐작해보는 무리들도 있었다.

“애들 몸이 조금 무거워 보인다?”

“기온이 낮아서 그래. 시합 좀 뛰면 슬슬 풀릴 거야.”

“그러다 상대 팀이 먼저 열이 오르면?”

“저쪽도 우리랑 비슷하네.”

운동장의 중앙에서 약간 빗겨난 곳에 앉은 지태네는 단유네 반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단유는 ‘개별행동 불가’라는 담임선생님의 지시 때문에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앉아야 해서 불가피하게 떨어져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태 쪽은 상미라는 ‘소녀’ 때문에라도 단유네 반 아이들과 같이 앉기 힘들었고.

지태네는 경기장 오른쪽에서 몸을 푸는 장계중학교 축구부와 왼쪽에서 몸을 푸는 상대 중학교 선수들을 비교하며 신중하게 결과를 예측했다.

“넌?”

“난 2:1 승.”

“그럼 난 2:0 승에 건다.”

“단유야, 넌?”

지태의 물음에 단유는 핸드폰을 든 채로 지태 쪽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전화가 오길래 보니, 고작 한 블록 옆에 앉은 지태였고, 받았더니 ‘승부 결과’ 따위를 묻기 위해 걸었다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모르지.”

[점심 내기야. 무조건 걸어야 돼.]

“돈 없어.”

[빌려줄게.]

“돈 빌리는 거 아니랬다.”

[누가 그래?]

“선생님이.”

[그럼 넌 점심 안 먹을 거야?]

“집에 가서 먹으면 되지.”

[혼자?]

“그래.”

대화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여긴 지태는 순수하게(?) 축구를 즐겨보자는 의미에서 예측해보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단유는 모른다로 일관했고, 흥이 떨어지기 전 지태는 상미에게로 타겟을 옮겼다.

“상미야, 넌?”

“3:0? 아니, 3:1.”

“누가 3인데?”

“당연히 명수가 해트트릭이지.”

“명수가 무슨 메시냐?”

지태의 핀잔에도 상미는 끄떡없었다.

“내가 그동안 봐온 명수의 스펙이라면 충분히 해트트릭할 수 있어. 그치?”

상미는 몸을 기울여 지태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 대고 물었다. 그에 단유는 다소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그래’라고 짤막하게 답변해 주었다.

“그럼 단유 너도 3:1에 거는 거다?”

지태가 건수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단정 짓는 어조로, 확인을 받으려 물었다.

[마음대로 해.]

지태는 채윤에게 ‘단유 3:1이라고 적어’라고 속삭였고, 채윤은 들고 있던 핸드폰에 입력했다.

“근데 정답자 없으면?”

“근사치로 해.”

핸드폰에 글을 입력하던 채윤이 물었다.

“야, 니들은 우리가 질 수 있다고 생각 안 해?”

지태는 채윤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응, 안 해. 명수가 있으면 질 수가 없거든.”

“···하긴.”

그동안 조기축구회에서 봐온 명수의 진기명기를 본 사람으로서의 확신이었다. 어마어마한 승률을 남긴 명수의 기록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부분 지태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채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도하는 운동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어선 사람보다 빈자리가 더 많아 휑하기까지 한 운동장 스탠드였다. 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이 오전의 한기를 몰아낸 덕인지, 적적하다는 느낌보다는 한가롭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와 닿았다.

‘단유네, 아니 단유 저 녀석과 같이 있으면 이런 것도 느낄 수 있네.’

이전까지 추구해온 즐거움이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히려 머리가 상쾌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어 신선하고 좋았다. ‘짐을 벗으라’더니 이런 식으로 짐을 벗는 것이냐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운동장 오기 전에 피웠던 담배 한 개비가 끝이었다.

‘신기하네. 담배 생각도 안 들고.’

같은 도시에 있는 공간인데, 어쩐지 이곳이 더 상쾌한 공기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반면, 우성은 고개를 돌려 건너편에 앉은 상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태껏 만난 여자애라곤 효정이나 미진이 같이 납작한 가슴을 가진 애들 뿐이어서 만져도 별 감흥이 없다시피 했는데, 저런 가슴을 가진 아이라면 어떡해서든 한 번 주물럭거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쟤 지태라는 애 여자친구일까?”

“···모르지.”

우성의 속삭임에 도하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도하는 계속 이 기분을 즐기고 싶을 따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성은 연신 관심을 드러내며 도하를 귀찮게 했다.

“저런 애는 처음 보지 않냐? 저렇게 예쁜 애는 우리 동네에서도 처음 보는데. 어느 학교지? 혹시 미진이랑 같은 학교 일라나?”

별로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고, 대답도 원치 않는 것 같아 도하는 입을 닫은 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처음에야 원체 보기 힘든 미모의 여자애라서 시선이 따라갔었지만, 지금은 득도한 승려 이상의 고양감을 느끼던 도하인지라 별 관심이 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속을 모르는 우성은 도하가 멍하게 있는 이유가 자신과 같으리라 속단하여 속삭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상미를 아지트로 끌고 가는 중이었던 우성이었다.

“잠시만.”

단유가 옆에 앉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화장실.”

단유는 아이를 지나 통로로 나섰다. 몇 계단을 오르던 단유는 도하와 우성에게로 향했다.

“유우성.”

“응?”

우성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단유가 나직이 말했다.

“따라와라.”

네가 뭔데 오라 마라야, 라고 외치며 눈을 부라리려던 우성은 단유의 눈빛에 찔끔 놀라 대꾸하지 못했다.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단유의 엄정한 눈빛에 말문이 닫힌 까닭이었다. 단유가 다시, 한 음절마다 강세를 주어 또박또박 ‘따라와’라고 말하자, 우성은 주춤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아직 속에 남은 자존심 때문인지 눈빛에 기가 죽은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성이 단유의 뒤를 따라가자, 도하도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단유가 우성을 부른 이유가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또 막연하게 걱정이 되기도 해서였다.

주말 중학교 축구 시합 예선전이 열리는 경기장은 사람이 많이 찾지 않은 탓에 곳곳이 텅텅 비어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합이 열리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심지어 매점도 열지 않은 정도였으니.

매점 근처 화장실 쪽으로 향한 단유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 후, 돌아섰다. 단유와 눈을 마주한 우성이 또 한 번 움찔 놀랐다가, 이번에는 지기 싫다는 오기가 생겨 같이 홉뜬 눈으로 대응했다.

“뭔데, 이 새끼야!”

일단 기선 제압을 선택한 우성. 비록 단유가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싸움은 힘이 아닌 기술이다, 라고 생각하며 강하게 나섰다. 뒤따라 온 도하가 누굴 말려야 하나를 고민하기도 전에, 단유가 먼저 선택권을 없앴다.

우성이 반응하기도 전에 손을 뻗은 단유는 우성의 목을 잡아채고 밀어붙였다. 어어, 하는 반응과 함께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던 우성은 외벽에 강하게 부딪히며 짧은 신음을 토해야 했고, 단유는 그런 우성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죽을래?”

우성은 기선 제압용으로 흔하게 뱉었던 그 말이 이렇게 살벌하게 들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목을 죄는 단유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침도 삼킬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성의 심장을 조이게 한 것은 바로 단유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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