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45화 (345/956)

인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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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오늘도 변함없이 책을 펴들고 한 문장, 한 문장을 되새기며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인사와 잡담하는 소음들이 귓가에서 어른거리지만 단유의 집중을 흩어놓지는 못했다.

다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만큼은 예외였다.

단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뭐.”

단유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리고 다음 주에는 코마개라도 준비해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하는 이전처럼 단유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대신 무언의 질타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담배 끊는 게 쉬운 줄 아냐? 씨발.”

끝에 붙은 욕은 단유에게 했다기보다는 그냥 습관처럼 붙는 욕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니까.

단유는 신경 끄고 책에 집중하려 했다.

“야, 김단유.”

단유는 또다시 집중을 흩어놓는 도하 때문에 짜증이 났다. 진짜 짝을 바꿔 달라고 청원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왜?”

“니가 못하는 게 뭐냐?”

“뭐?”

“너한테 시비 걸려면 니가 못하는 거로 하라며?”

수학책인 줄 알고 챙겼다가 꺼내보니 국어책이었다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어이없다는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굳이 시비를 걸어야 돼?”

“하라며?”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다.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못 하는 거 없다.”

“···재수 없는 새끼.”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데, 또 도하가 불렀다. 미간을 좁힌 단유가 돌아보자 도하가 물었다.

“운동 잘하냐?”

“왜?”

“한번 붙어 보자고.”

“···왜?”

“니가 진짜 잘난 놈인지 확인해야 속이 후련할 거 같다.”

별 시답지 않은 놈이라 생각하며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책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다 잘한다.”

“웃기시네.”

“······.”

“야, 김단유.”

“아, 정말.”

단유는 책을 덮었다. 기껏 깨달음도 얻었고 나름 마음의 수양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짝 때문에 다 엉망이 되는 기분이었다.

“팔씨름 해 보자.”

“뭐?”

“확인 해야 속이 후련할 거 같다.”

단유는 우선 약속을 받아내기로 했다.

“내가 이기면 책 읽는 동안 방해하지 말기.”

“콜.”

도하는 대답과 동시에 책상을 돌렸다. 책상이 끌리는 소리에 교실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뒤로 몰렸다. 우성도 관심을 보이고 돌아보다 곧 상황을 눈치채고는 도하 뒤로 다가왔다. 그 뒤로 몇몇 아이들이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책상 위에 팔을 올렸다.

“넌?”

“뭐?”

“내 조건은 말했으니까, 니 조건도 말해.”

“나?”

준비되지 않은 질문에 당황한 도하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공부 가르쳐 줘라.”

아이들이 놀란 건 물론이고, 단유도 놀랐다. 단유만 놀란 게 아니라 말을 꺼낸 도하도 놀랐다. 마치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단유는 ‘맥락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도하의 조건을 수락했다. 어차피 도하의 조건 따위, 라고 생각하며.

“준비, 시작.”

우성의 심판으로 시작된 팔씨름은 아이들에게 흥미진진한 유흥거리가 될 것, 이라는 처음의 예상을 산산조각내며 싱겁게 끝이 났다.

“한 번 더.”

단유는 한 번 더 해줬다. 잠시 후, 멍한 눈으로 팔목을 주무르는 도하를 뒤로하고 우성이 나섰다. 그의 눈에서 호승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야, 나랑 한 번 하자.”

“왜?”

“그냥 한번 해, 새끼야.”

“그럼 조건은?”

“뭐?”

“너도 나 책 읽을 때 방해하지 마라.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그래.”

그 까짓거야. 그리고 잠시 후, 두 명의 희생자를 뒤로하고 다른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야, 나도 하자.”

“나도.”

“나랑도.”

어쩌다 보니 조례 시간이 될 때까지, 팔씨름이 계속 이어졌다. 이참에 아주 교실 전체를 공동묘지처럼 조용하게 만들어버릴 생각으로 단유는 그들의 도전을 받아주었다.

“야, 뭐하는 거야? 다들 자리로 안 가!”

담임 선생님의 호통에 다들 빠르게 자리를 찾아갔다.

“거기서 뭐 한 거야?”

“단유랑 팔씨름했는데요, 단유가 우리 반 애들 전부 이겼어요.”

한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고자질(?)했다.

“뭐? 팔씨름? 우리 반 전부랑?”

선생님이 못 믿겠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며 묻자, 이곳저곳에서 속속 증언들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부흥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간증하는 모양새라 우습지도 않을 정도였다. 쉬지 않고 30명이랑 대적하면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목격담과 체험담에 선생님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보기에는 호리호리하게 생긴 놈이 힘이 좋은가 보네?”

“지 말로 못 하는 게 없다는데요!”

도하의 외침에 아이들이 멈칫, 했다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김단유, 너 선생님한테도 이길 수 있어? 내가 이래 봬도 우리 동네 팔씨름 왕이었는데?”

선생님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선생님, 단유는 조건 없으면 팔씨름 안 한대요?”

“무슨 조건? 내기 한 거야?”

선생님의 눈에 불편함이 감돌려는 때에 앞에 앉은 한 학생의 진술이 나왔다.

“자기 책 읽을 때는 방해하지 말아 달래요.”

단유 답다며 웃음을 짓던 선생님이 호기롭게 외쳤다.

“좋다, 그럼 만약에 단유 니가 선생님을 이기면, 선생님도 너 방해 안 하마.”

단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런 무의미한 약속 따위는 하나 마나였으니.

“그보다 다른 조건을 걸고 싶은데요.”

“뭐?”

“제가 이기면, 내일 우리 학교 축구부 예선전에 우리 반 전체가 응원가는 거요.”

솔직히 학교 전체가 가는 게 좋겠지만, 예선전에 그런 동원을 할 리가 없었다. 예선전이라 해당 축구부원들의 학부모 외에 다른 응원단이 있을 리 없으니까. 적어도 우리 반 30명이라도 가서 응원해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내일이 예선전이야?”

선생님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괜찮냐?”

학교를 나와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주말이기도 하니 잠깐 구경 가는 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단유의 조건에 수락했다. 아니, 그보다는 선생님과의 대결을 보고 싶었던 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것은 단유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좋다, 그럼 나와봐.”

단유는 교실 앞으로 나갔다.

****

“그래서, 내일 너희 반 전부 응원 온다고?”

“설마 전부 오겠냐마는, 그래도 몇몇 빼고는 나올걸? 일단 선생님도 와주신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잘 됐다!”

명수는 단유의 말을 들으며 손뼉을 쳤다. 지태나 채윤은 신기한 물건을 본다는 식으로 단유의 팔을 바라보았다.

“TV에 보면 팔씨름 잘하는 사람들 나오잖아? 그런 사람들 보면 팔이 막 이만하던데, 넌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세냐?”

“야, 저래 보여도 아침마다 운동하는 거 보면 말근육이 따로 없어. 아주 속이 꽉 찬 근육이 저런 거라고.”

명수가 단유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마치 1등급 한우 품평하듯 말했다.

“운동한 보람이 있어, 보람이.”

명수의 말에 단유는 딴청을 피웠다. 기껏 누구 앞에서는 힘이 본질이 아니니, 어쩌니 해놓고선 결국 힘자랑을 한 꼴이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훈련 없고?”

“응. 오늘은 간단히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가볍게 몸만 풀고 끝날 거야.”

“그럼 나중에 같이 가자.”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교내에 울려 퍼졌다.

“나중에 보자.”

단유는 교실로 돌아가 수업준비를 했다. 마침 헐레벌떡 뛰어온 도하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앉는데, 심각한 구취에 단유는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끊기 힘들어?”

“···그래, 임마. 너도 한 번 피워봐라. 그래야 얼마나 끊기 힘든지 알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앉았네. 단유는 보란 듯이 교과서를 펼쳤고, 도하는 고개를 앞으로 돌려 마치 단유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약속이라도 지켜줘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단유는 수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모든 학생이 식곤증과 싸우고 있을 무렵, 여러 종류의 난이 창틀 위에 줄지어 서서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사실 안에서 교장 선생님과 이사장이 독대하는 중이었다.

“교장 선생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교장 선생님은 손안에 든 찻잔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어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사장의 뒤쪽 벽에 걸린 액자 속 전대 이사장들까지도 함께 시선을 보내는 착각이 들었다.

“네, 이사장님.”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여유를 담은 미소로 가볍게 대화를 풀어나가는 이사장의 속을 모를 리 없지만, 일단은 맞춰주기로 마음먹은 교장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좋은 차네요.”

“구하기 쉬운 차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이사장은 선물 받은 차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이완시키려 했고, 교장 선생님은 오랜 연륜이 녹아든 여유로 맞대응했다.

이사장은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뒤, 본론을 꺼내 들었다. 어쭙잖게 여유만만인 척해 봤자, 교장은 못 당한다. 그렇다면 직구로 승부하는 수밖에.

“다음 주 월요일 정기 이사회 건에 관한 겁니다만.”

“네.”

이사장은 하얀 김이 나는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뒤로 기댔다. 이태리 명품 소파의 질 좋은 가죽은 소리 없이 이사장의 몸을 받아주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한영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죠.”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이 일은 교장으로서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긴급발의로 안건이 상정될 경우에 어떤 핑계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교내에 소문이 나지 않게 선생님들에게 입단속을 시켜 놓은 상황이었고, 한 주간의 분위기를 보아도 대부분 사람들이 지한영의 사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앞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번에 전혜숙 이사의 임기만료 건이 있죠?”

보나 마나 연임에 대한 것이리라. 교장 선생님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문제···없을 겁니다. 선화 재단에 꼭 필요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올해 법인비 및 학교비 추경예산안 있죠? 문제 생기지 않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용희 교장 선생님.”

“네, 이사장님.”

굳이 자신에게 이리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은가.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지씨 집안 사람들이 서로 쿵짝을 맞춰 진행하면 될 일을. 하지만 포장 좋아하는 이사장은 꼭 교장을 끼워서 마치 공정한 척,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거수기 역할만 제대로 하라는 소리임을 모르지 않지만, 말년에 이런 일로 심기가 불편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문 교장은 이사장과의 독대가 불편을 넘어 불쾌했다.

‘2년만 참자.’

2년만 지나면 정년 퇴임이다. 평생을 여유롭게 살 수 있게 도와줄 연금과 명예를 위해 2년만 참으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도 별문제 없었으니, 앞으로도 문제없으리라. 직장 생활하는 사람 중에 이런 불편 안 겪는 사람 어디 있으랴? 나이를 먹었다고 갑을이 바뀌지 않으니, 이 정도는 가볍게 넘겨버리자. 그게 진정한 연륜 아니겠는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영이 말입니다.”

“네.”

“그래도 우리 학교의 행정실을 책임지는 행정실장인데 말입니다. 아무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했기로서니, 병문안도 가지 않는 건 조금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역시 돌려서 말하지 않는 이사장이었다. 만약 교장 본인이 저 이야기를 한다면―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성격이지만 굳이 한다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거나 ‘이사회 소속’이라는 이야기로 둘러 말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가 뵙죠.”

“그, 누구더라. 김지연 선생님이던가? 그분이 오셔서 한 말씀 해주시는 것도 좋겠다고 하더군요. 평소 많이 친했다고 하던데.”

순간 교장은 표정관리를 못 할 뻔했다.

‘이런 개 잡놈의 새끼가! 그렇게 친하면 벌써 갔겠지! 그걸 교장 명령으로 가게 하란 소리야? 여기가 학교지, 룸살롱이야!’

“선생님?”

이사장의 부름에 급히 교장은 마음을 다스리며, 가볍게 목례했다.

“잘···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수고하시고요.”

문 교장은 이사실을 나와 문을 닫은 뒤, 잠시 그 자리에서 속을 진정시켰다.

지한영 행정실장. 주말 내내 술이나 처먹다가 출근 시간 맞춰 온다고 차를 미친 듯이 몰았단다. 그러다 방향을 잃고 인도의 가로수를 들이받았다는 이야기에 교장은 혀를 찼었다.

역시 적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무섭다고, 이사장의 적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이리라.

‘이래서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는 거겠지. 그래 봐야 그놈은 안 돼. 천성이 글러 먹은 놈이라’

문제는 그 빌어먹을 농사꾼이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을 머슴 대하듯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교장실로 향하는 교장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잔향(殘響)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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