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43화 (343/956)

인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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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구세요?”

도하의 물음이 있자 동굴 안쪽에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도하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바닥을 급하게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노인이 부릅뜬 눈을 하고 도하 앞에 나타났다.

“너, 너 누구냐!”

더듬거리며 외치는 노인의 기세에 놀란 도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벌린 채 겁을 잔뜩 집어먹은 도하의 모습에도 노인의 기세는 더 강해질 뿐이었다.

“누구냐고! 누구야! 누군데···.”

도하는 뒤로 물러나려고 발을 버둥거렸지만, 엉덩이가 바닥에서 밀릴 낌새가 없어 고작 발뒤꿈치만 상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너··· 혹시 한국 사람이냐?”

도하는 노인의 물음에 어리둥절했다. 한국에서 한국 사람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도하는 노인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큰일 겪기 전에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필사적인 것은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에 헤진, 엉성한 천 조각으로 몸을 대충 두르고만 있을 뿐인 노인은 도하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한국 사람이냐고!”

눈앞에서 붉은 눈동자를 들이밀고 역한 입 냄새를 풍기는 미친 노인의 발작 같은 외침에 기절할 것만 같던 도하였다. 게다가 노인답지 않게 강한 악력 때문에 어깨에 가해지는 아픔이 말도 못했다.

“네, 네!”

“이, 이럴 수가.”

이름도 모를 이곳에서 보낸 세월이 몇 년이던가.

노인은 소년의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에 힘이 빠지며, 마주한 소년처럼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겨우, 이제야···.”

도하는 노인의 중얼거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계속 중얼거렸다.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목소리가 거칠고 노쇠했지만 도하는 그 대부분의 중얼거림이 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40년인가, 50년인가. 개좆같은 이곳에서 지낸 게···.”

노인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곳으로 온 것이냐! 다시 나가는 곳이 있는 거냐? 응? 말을 해! 말을 하라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미친 사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도하를 노려보니, 도하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서 모른 척하고 싶었다.

‘살려 줘.’

어쩌면 노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하가 살려달라고 생각했지만, 입이 얼어붙었는지 생각이 말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런 도하를 구해준 것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여기 있었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도하는 고개를 돌렸다. 동굴 밖은 동굴 안쪽만큼이나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달빛이라고 추정할만한 옅은 빛이 있어 동굴 입구에 선 실루엣의 윤곽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실루엣의 얼굴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다만 목소리가 낯익다는 생각은 들었다.

반면 노인의 반응은 도하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너, 너는!”

실루엣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잠시 후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반응을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너!”

노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격정에 쌓인, 단 한마디를 내뱉고 입을 닫은 노인은 그저 야윈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

처음 이 세상으로 왔을 때,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진 않았다. 농담조로 낯선 곳에 떨어져도 주먹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 수 있다고 말하곤 했었던 자신이었다. 거친 산길과 굶주린 산짐승들의 습격 때문에 도망을 치는 동안 함께 이곳으로 왔던 동료들이 모두 유명을 달리하고 오직 자신만 살아남았다. 그래도 특별히 겁을 먹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자신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고, 복수를 꿈꿨다.

긴 시간이 지나고 겨우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았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이라도 현대에서 보기 힘든 구조물과 보기 힘든 복장의 사람들을 보니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차라리 영화 세트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현대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성벽을 보다가, 사내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비록 벌거숭이였지만, 그게 뭔 대수인가. 일단은 살고 볼 일이었기에 남자는 당당하게 성으로 향했다.

곧 성문 앞에 당도한 남자는 낯선 얼굴의 문지기와 맞닥뜨렸다.

“여기가 어디요?”

사내는 호기롭게, 전혀 위축되지 않은 양 당당하게 물었다. 하지만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내는 당황했다.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들었기에 당황했고, 창날을 세우고 자신을 향하는 상대의 적대심에 당황했다. 언제라도 찌를 수 있다는 듯 날카롭게 벼린 창날 앞에서 사내는 당당할 수 없었다.

사내는 일단 자존심을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비굴함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깟 자존심, 나이 많은 여자들을 위해 봉사할 때마다 버리곤 했었다.

“옷이랑 돈을 모두 강도들에게 뺏겼소. 부디 도와주시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둘의 대치는 오래 지속 되었다. 하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비는 사내의 행동에 문지기들도 더 이상 적대적으로 나올 순 없었다. 창을 거둬들이고 둘이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모습에 사내는 희망을 품었다.

결과적으로 사내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수상한 사람을 성안에 들일 수 없다는 경비대장의 방침 때문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 수 없는 사내는 고작 빵 한 조각과 허름한 옷가지를 얻은 채 쫓겨나야 했다.

사내는 그 후로 성문 근처를 배회했다. 잠은 들판에서 야숙(野宿)을 하고, 잠이 깨면 성문 근처로 다가와 지나가는 사람들―약초꾼이나 사냥꾼들―에게 동냥을 했다. 그러다 한 사냥꾼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사냥꾼의 보호 아래 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내는 사냥꾼의 집에서 지내며 사냥꾼의 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심부름’이라고 했지만, 거의 모든 잡일을 돌보거나,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사냥에서 미끼 역할을 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했다.

처음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등이 해결되면서 살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점차 먹을 것이 줄고, 일을 잘 못 한다는 핑계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사내가 담당해야 할 일들은 더 많아졌다.

‘노예.’

사내가 떠올린 그 단어 그대로의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쓰이는 말을 익히기만 하면 이곳을 떠나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꾹 참고 버텼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언어였다. 이상한 발음과 문법 체계는 사내의 머리로는 도저히 익혀지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것 같았다.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렇게 지낸다고 해서 사내의 성격이 집 지키는 개처럼 온순하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결국, 버틸 수 없는 매질에 사내는 곧잘 하던 방식으로, 사냥꾼의 뒤를 노려 칼을 휘둘렀다. 사냥꾼이 죽자 사내는 당장은 홀가분해졌으나, 이내 깨달았다. 이제는 성안에서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몇 가지 물품들을 챙겨 사내는 도주를 시도했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지만, 기어코 해냈다. 사내는 쫓아오는 경비대의 추적을 피해 다시 처음의 길로 향했다. 산을 넘고 짐승들의 습격을 피해 도망쳤다. 그리고 우연히 동굴을 찾았다. 사내는 사냥꾼의 집에서 훔쳐 온 칼과 도끼 등의 도구로 작은 동물들을 잡아가며 연명했고, 그 시간이 끝도 없이 길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근력이 떨어져 사냥도 힘들어질 무렵이었다. 돌아갈 길은 막막하고 이대로 동굴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좌절하고 있던 때에 찾아온 불청객은 뜻밖의 말을 뱉었다.

“누구세요?”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소년이었다. 격정과 흥분에 휩싸인 사내가 이성을 되찾기도 전에, 또 다른 불청객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너, 너는!”

“오랜만이네요.”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원흉. 객사(客死), 아사(餓死)를 걱정하게 만들고, 외로움과 좌절감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던 범인.

“아직 살아계셨군요.”

정환은 소리를 질렀다.

“이놈!”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소년,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노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내가 몇 년을, 몇십 년을 이 동굴에서 보냈는지 알아! 내가···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

“아저씨가 지은 죄, 몰라요?”

“나만 그랬냐? 나만 그러냐고? 세상 사람 다 그렇게 산다! 그런데 왜 나만 이런 지랄을 겪어야 하냐고!”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아저씨. 제게는 고작 몇 달 전의 경험이었고 기억이어서 너무 생생하네요. 아저씨는 절 납치했고, 절 죽이려 했어요.”

정환은 그제야 그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며, 몇 달?”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가까이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다루기 어렵다 하셨죠(爲難養也). 아저씨가 행한 죄의 무게를 그 세월이 지나고도 깨닫지 못하시니,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나 봅니다.”

“헛소리 마라!”

정환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마치 성대가 찢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환과 단유 사이에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도하가 정환의 분기(憤氣)에 놀라 겁을 먹을 무렵, 단유가 다가와 도하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도하는 곧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저씨.”

“······.”

“전 이제 완전히 잊을 겁니다.”

“뭐?”

“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저씨는 잊을 겁니다.”

단유의 선언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도하가 사라졌다. 그 현상에 놀라던 정환은 곧 그 의미를 깨닫고 단유를 향해 다가왔다.

“나, 나도!”

하지만 단유는 정환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나도!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게 해줘!”

단유는 미미하게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렸다. 이를 악문 정환이 맨발로 바닥을 차며 달려들 때, 단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개새끼야!”

동굴 안을 울리는 처절한 비명만이 메아리치며 남았다.

****

“헉!”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도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여전히 붉은 노을로 물든 하늘이 창밖으로 보였다.

“뭐, 뭐야?”

잇따라 터져 나오는 경악성에 돌아보니 희미한 의식 속에서 술판을 벌이던 친구들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 친구들이 하나같이 경악성을 입에 담으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도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안부를 물었다.

“너, 괜찮아?”

“응.”

진태나 효정, 미진도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몸에 걸쳐진 옷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서로가 겪은 기이한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꿈은 아닌 거 같지?”

“꿈일 리가 없잖아!”

진태가 문득 주위를 돌아보다 싸늘한 집안의 분위기에 어깨를 떨었다.

“혹시, 이 집. 귀신 붙은 집 아냐?”

“뭐?”

“그래서 오랫동안 빈집으로 있는 거 아닐까?”

“그럼 귀신이···?”

효정과 미진이 먼저 비명을 지르며 집을 뛰쳐나갔고, 그 소리에 덩달아 놀란 진태와 우성이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어깨를 부딪쳐가며 밖으로 뛰어갔다.

도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 목소리···.”

실루엣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나 체형은 어딘지 낯이 익다 싶었다. 당장은 정체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실루엣이 노인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꿈? 현실? 친구들의 말마따나 귀신 놀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보건대, 그것은 리얼이었고, 노인의 눈동자가 보인 살의와 악기(惡氣) 역시 진짜였다.

도하는 끌어내려 진 바지를 추켜올려 제대로 입은 뒤, 밖으로 향했다. 아마 앞으론 이 집에 오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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