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3)-수정(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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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도 좀 먹어라.”
“쟤는?”
“쟤 지금 조금 맛이 갔다.”
“도하가? 왜?”
“몰라, 씨발.”
우성은 라면 국물을 한 번에 들이킨 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진태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렇지않아도 험악한 얼굴이 더욱 험악해 보이는 효과가 발생했다.
미진과 함께 따라온 효정은 과자 한 봉지를 해치운 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도하를 흘겨봤다.
“저 새끼 약했냐?”
“약은 무슨..”
효정은 중3이었지만, 소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탓에 우성이나 진태는 말을 편하게 놓고 대화를 했다. 효정도 딱히 반발하지 않은 탓도 있었고.
“야, 미진아. 저놈 좀 정신 차리게 해줘라.”
“어떻게?”
“발로 까버려.”
키득대는 아이들을 흘겨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미진은 도하에게 다가갔다.
“야, 진도하. 진도하!”
하지만 도하는 멍한 눈으로 한 곳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 들리는 거야, 들리지 않는 척하는 거야?”
미진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확인한 뒤, 다시 도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도화의 머리를 툭툭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냐고.”
미진은 도하의 머리를 계속 때려댔지만, 도하가 전혀 요동이 없으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성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킬킬거리며 과자를 우적우적 먹을 뿐이었다. 미진은 투덜대면서 도하를 세게 밀치고는 정신 차려보라고 말을 걸어보지만,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던 도하의 자세가 허물어지며 반쯤 누운 자세가 됐지만, 그 자세 그대로 허공만 응시할 뿐, 미진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 맞지?”
자기 말을 일부러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한 미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모르겠는데?”
우성이 놀리듯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도 도하가 일부러 정신을 놓은 척하는 것 같았다. 미진은 발로 도하의 머리를 툭툭 쳤다.
“야, 이것 봐라.”
“보긴 뭘 봐.”
“지랄한다.”
미진은 축 늘어진 도하를 보다 손을 가져갔다.
“쯧.”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미진이 돌아보자,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을 보며 키득대며 웃을 뿐이었다.
‘뭐지?’
분명 가까운 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는데, 눈앞의 도하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진은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록 방 안이 어둡긴 해도,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방의 입구 근처에서 정신없이 놀고있는 아이들의 얼굴도 정확히 보일 정도인데, 그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야, 뭐해? 그냥 밟아버려.”
미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도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더는 못 봐주겠네.”
중얼거림을 들었다고 인식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미진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아이들은 호기심에 먹던 것도 멈추고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꾸라진 미진과 도하 두 사람 모두 가만히 있을 뿐인지라, 금방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뭐야? 야! 양미진! 진도하!”
우성이 벌떡 일어났고, 뒤따라 진태와 효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갈 무렵, 세 사람은 동시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여긴 어디야?”
미진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푸른 잡초가 우거진 들판 가운데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도.
“꺄악!”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미진은 들판에 난 긴 잡초들이 자신의 맨몸을 가리기에 불충분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게 뭐야···.”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높은 산이 있긴 하지만, 그 산은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 외에는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으음.”
뒤에서 들려온 신음에 놀란 미진이 ‘엄마야!’라고 외치며 주저앉았다.
“아이고, 머리야···.”
정신이 덜 깬 효정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곧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바람이 효정의 맨살에 와 닿자 그제야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진의 경우처럼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효정아···.”
흠칫 놀란 효정이 시선을 돌렸을 때, 울먹거리는 듯한 표정의 미진을 볼 수 있었다.
“야, 양미진, 이거 뭐야? 여기 어디야?”
“몰라, 나도.”
“어떻게 온 거야? 옷은?”
“모른다니까!”
“왜 소릴 질러!”
“모르는데 계속 모르는 걸 묻잖아! 니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효정은 머리를 부여잡다 얼른 손을 끌어내려 이제 살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가슴께를 가리며 물었다.
“너 언제 왔어?”
“모른다고!”
“몰라?”
“···나도 방금 정신이 들었단 말이야.”
미진은 울먹거림 속에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효정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산과 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짙은 보랏빛이 마치 저녁노을처럼 보이기도 했다.
“추워, 효정아.”
한가지는 분명했다. 우선은 몸을 가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 수치심을 떠나 점점 추워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여긴 효정이었다.
한편, 우성과 진태 또한 낯선 곳에서 조우하여 웅크린 자세로 마주했다.
“여기 어디야?”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왜 나한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뭐, 이 새끼야?”
두 사람 다 아랫도리를 가린 손을 들추기 싫어 앉은 채로 말로만 옥신각신할 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유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고뇌하는 중이었다.
‘아, 진짜 왜 이러지.’
한 사람도 아니고 다섯 사람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영원히 이곳에 묶어둘 것이 아닌 이상, 저 아이들은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할 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떠벌일 게 분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빈촌에서 멀리 떨어진, 길도 없는 벌판으로 옮겨 놓긴 했는데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소 잘 돌아가던 머리도 지금은 전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충동적으로 선택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데 쓰일 뿐이었다.
저 언덕 너머로는 두 여자아이가 말다툼을 하는 중이었고, 이곳에서는 두 소년이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도하는···.
“헉, 헉.”
또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들판에 내려놓았는데, 역시나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목적지도 없이 계속 내달릴 뿐이었다. 왜 뛰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저렇게 달리도록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은 도하 역시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면 한참이 남았으니, 그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단유는 산 중턱에 솟아난 넓적 바위 위에 올라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도하는 뒤에서 달려오는 무시무시한 괴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달렸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라고 유혹하는 괴물이었다. 도하는 울먹거렸다.
“싫어요, 싫어요!”
“어린 노무 새끼가 말을 쳐 안 들어!”
“싫어요!”
“너희 엄마가 대신 맞는다?”
“싫어요!”
“병신같은 놈! 구구단도 제대로 못 외는 놈! 인간 못 될 놈!”
“아니에요, 아니에요!”
도하는 귀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더 빨리, 더 멀리 멀어지기 위해 달릴 뿐이었다. 풀밭이라 산길보다 달리기 편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하는 계속된 괴물의 협박과 조롱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어릴 때는 매를 피해서 거칠게 포장된 시멘트 도로 위를 내달렸다. 그때는 지금보다 여린 피부 탓에 발바닥이 쉽게 갈라졌다. 하지만 어린 애가 달려봐야 지금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금방 억척스러운 손에 잡혀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가야 했다.
소주병이 날아들고, 등 긁는 막대가 부러지도록 맞아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가 그 남자와 헤어지고 이사를 온 다음에도 도하는 집에 잘 들어가질 않게 되었다. 고작 두 입이라도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보험영업에 뛰어든 엄마는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오질 않았고, 집 안에 홀로 있는 게 무서웠던 도하는 집에 들어가질 않았다. 대신 홀로 숨을 곳을 찾는 일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한 번은 가스통을 보관하는 조그만 창고 비슷한 구조물의 안쪽에 틈을 마련하고 그곳에 숨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비좁고 습했지만,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다 엄마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엄마는 밤늦도록 밖에서 논다고 생각하며 혼을 냈다.
“엄마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데, 넌 종일 노니? 놀아?”
남자의 손에서 어머니의 잔소리로 바뀌었다. 도하는 떠올렸다. 잔소리가 다시 손으로, 매로, 술병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중학생이 되었을 때, 도하는 꽤 괜찮은 아지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아지트를 공유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서로 치고박고 싸우며 친해졌다. 다른 애들의 돈을 뺐기도 했고, 밤거리를 쏘다녔으며, 전혀 다른 이유겠지만 비슷한 생활을 갈구하는 여자들도 만났다. 그중 몇몇에게는 아지트를 공유했다.
“씨발 놈아, 뒤질래?”
아지트에서는 도하가 대장이었다. 주먹으로, 발길질로 상대를 무력화시켰다. 모두가 도하의 밑에서 굽신거렸다. 여기에서는 온전히 살아 숨 쉴 수 있었고, 도망갈 필요가 없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잡생각이 난 사이에 괴물이 등 뒤에 붙었다.
“으아악!”
도하는 힘껏 팔을 내저으며 달렸다. 계속 달렸다. 숨을 곳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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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훈은 말없이 떠났다. 단유는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재훈과의 이별이 가족과의 이별을 떠올리게 하였다.
사실 가족이 사라진 것과 같으면서 달랐다. 가족은 ‘이유 없이’ 사라졌고, 재훈은 ‘이유 없이’ 떠났다. 어머니가 사라진 현상은 초월적 힘이 작용한 것이었고, 재훈은 스스로의 의지로 떠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건은 모두 단유를 홀로 두었다는 사실에서 일치한다.
‘어쩌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몰라.’
다른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유 본인의 합리화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요인이 원인이 되어 이런 결과를 창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냐, 이건. 너무 자기비하적 결과론에 불과해.’
단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분명 두 사건이 교묘하게 고리를 지어 단유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것이리라.
‘그래서 본래의 자신에서 퇴행하여 유아적(幼兒的) 충동심을 느낀 것일까?’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타당한 면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또래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단순하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한국이란 공간으로 오게 되면서부터는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유에게 ‘어른스럽다’거나 ‘점잖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특히나 세 명의 ‘지톤’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보다 말이, 행동이 앞선 경우가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런 행동은 바보 같은 짓이야. 내 삶과 생존에 스스로 칼을 들이미는 꼴이나 마찬가지.’
단유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 뒤, 다신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새벽마다 하는 운동으로 몸만 가꿀 것이 아니라 정신도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 것으로 정신이 자라진 않는다. 지식을 내 것으로 삼고 그 지식을 실천해야 비로소 내 정신이 자란다.’
공자의 말씀 중 ‘지혜가 넘치더라도 덕이 없다면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라(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했으니, 덕은 곧 자신의 인격이며 지성이다. 단순히 안다는 것만으로 이룰 수 없으니, 스스로가 깨닫고 실천을 해야 옳을 일이라는 그 말을 되뇌며,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하늘을 보며 단유는 그 말씀의 뒷말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갖추어도 예로 대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을 것이다(知及之 仁能守之 莊以?之 動之不以禮 未善也).’
단유는 보라색으로 물든 하늘을 보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주변의 사람들을 잃기 싫었다. 명수도, 하은도. 그리고 앞으로 또 만나게 될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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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는 들판이 끝나는 곳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산 아래 굽이진 길을 발견했다. 저 길을 따라가도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도하는 보이는 그 길로 발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들몰 부근 오른쪽 모롱이에 시선이 닿았다. 정확히는 산모롱이 사이에 움푹 들어간 동굴 같은 것이었다.
도하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자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작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동굴 속은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지만, 차라리 그 속이 도하에겐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굴 바깥을 경계하던 도하는 문득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웬··· 미친놈이 남의 집에 말도 없이 들어오는 것이냐.”
쇳조각을 입안 가득 굴리며 말하는 듯한 목소리에 도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