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6)-수정(0519)
-------------- 339/952 --------------
오후에는 구름이 끼면서 날이 어둑해졌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가벼운 몸풀기와 체력 훈련에 이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방학 때 빠진 아이들도 돌아왔기에 두 팀으로 나뉘어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중앙선을 넘어온 공이 앞선에서 자리를 지키던 명수에게로 이어졌다. 명수는 빠르게 몸을 돌려 수비수 한 명을 제친 뒤, 곧바로 골문을 향해 드리블했다. 그 앞에 또 다른 수비수 2명이 달려들었다.
“명수야, 패스해!”
반대편에서 뒤쫓던 같은 팀의 외침이 있었으나 명수는 우직하게 앞으로만 달릴 뿐이었다.
“명수야!”
명수는 두 수비수와 맞닥뜨린 뒤 공을 세웠다. 아니, 세우는 듯했던 명수는 발바닥으로 공을 옆으로 빼는 모양새를 취했고, 거기에 한 사람이 몸을 살짝 기울일 때 그 찰나를 노려 명수는 교묘한 발재간으로 공을 차올려 두 수비수 사이로 넘겼다. 두 수비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공으로 옮겨지며 명수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 순간을 노려, 명수는 앞으로 튀어나가며 두 수비수를 뚫었다.
“막아야지!”
골키퍼가 달려오는 명수와 공을 향해 달려나가며 각을 좁혔다. 명수는 가볍게 공을 띄웠고, 골키퍼의 머리 위로 넘어가던 공은 골문 안으로 통통 튀기며 들어갔다.
“명수, 저런 플레이는 지적해야 할 거 같은데요.”
팔짱을 끼고 경기를 지켜보던 코치가 감독에게 요구했으나,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냥 지켜보자.”
평소에는 이타적인 플레이 위주로 하던 명수가 갑자기 저런 식으로 나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감독은 차라리 저런 식으로 골을 넣으려 하는 명수의 의지가 스트라이커로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연습 때는 충분히 테크닉을 보이던 명수가 시합만 들어가면 상대와 맞붙어 싸우기보다는 같은 팀 동료에게 공을 돌려 골을 넣게 해주는 플레이를 했었던 게 명수의 단점이라 생각했던 감독이었다.
‘몸싸움을 즐기지 않는 스타일의 축구선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크게 될 수 없다.’
고 여기면서도 중학 레벨이기에 특별히 지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명수가 보인 플레이는 언뜻 보면 독단적인 플레이지만, 달리 보면 골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스트라이크의 면모라 판단했다.
“야, 인명수! 왜 패스 안 해?”
“내가 넣을 수 있었거든.”
“거기서 뺏기면 어떡하려고?”
“안 뺏길 자신이 있었어.”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고 몰려드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아이들은 다시 각자의 포지션으로 돌아가 경기를 시작하려 하는데, 감독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명수는 스트라이커다. 스트라이커가 골을 욕심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방금의 플레이는 위험하긴 했지만,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음을 명수가 보여줬다. 그러니 이번 명수의 플레이에 관해서는 칭찬한다. 하지만, 인명수. 다음에도 이번처럼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외치는 명수의 눈빛을 보던 감독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동계에서 확실히 실력을 보여라. 실력으로 동료들을 설득해라. 그게 축구선수로서의 대답이다. 다른 사람들도. 알겠나.”
“예!”
아이들은 다시 흩어져서 시합을 재개했다. 말보다 행동으로, 실력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하라는 감독의 주문은 좀 더 자신감 있는 플레이로 팀에 기여하란 것임을 이해한 아이들이었다.
감독은 올해 춘계대회에서는 꽤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으며 아이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
단유는 지태와 채윤과 함께 하교하는 중이었다. 채윤은 아침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들뜬 모습이었다.
“말도 마라. 오늘 하루 종일 그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반 애들이 전부 외울 정도였다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그때 선생님 한 분도 계셨었나 봐. 우리 담임도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왔었대.”
“그래가지고 얘가 완전 신이 나서, 지 죽을 뻔한 이야기를 계속 떠드는데 보는 내내 한심해서 원.”
“야, 너 말이 심하다?”
“얘, 봐라. 어휴. 보는 사람은 얼마나 가슴이 졸였는데, 얘는 왜 이런대? 보통 나이가 한 살 더 들면 철이 들어야 하는데, 얘는 왜 거꾸로 간대?”
“웃기시네?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해서 철이 덜 든 건 너지.”
두 사람의 만담을 웃으며 듣던 단유는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 그냥.”
“뭐 있어?”
단유를 따라 뒤를 돌아보던 두 소년은 아무런 이상도 찾지 못했다.
“뭔데?”
“아냐, 가자.”
단유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시작된 만담을 들으며 집으로 향하는 내내, 단유는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계속 따라오며 지켜본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만약 누가 따라온다면, 아마도 자신에게 해코지할 마음을 가진 ‘진도하’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가능성일 뿐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니, 일단 옆의 두 친구와 헤어진 뒤에 확인해도 늦지 않으리라.
아침의 사고가 벌어졌던 건널목에 이르러 채윤은 다시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멈춰 섰다.
“와, 다시 오니까 가슴이 또 뛰네. 나 진짜 평생 잊을 수 없을 거 같애.”
“단유야. 혹시 이런 사고가 날 뻔한 일 때문에 머리에 충격을 받고 어려지는 경우가 있냐?”
“책에서 그런 경우를 보지 못했지만, 없으리란 법은 없지.”
“김단유. 너까지 그러기냐?”
단유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채윤을 배웅한 뒤, 곧이어 지태와도 헤어졌다. 집으로 걸음을 옮기던 단유가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후, 한 소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단유가 사라진 골목 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단유는 없었다. 당황한 소년이 걸음을 재촉해 여기저기를 살펴보지만, 단유가 어느 길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뭘 어떡해?”
소년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단유가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누구야?”
소년은 대답 대신 뒷걸음질 쳤다.
“왜? 뭐? 왜 그러는데?”
단유가 말없이 다가오자, 소년은 다시 한 걸음 물러서며 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왜 그래? 갑자기? 나 아무 잘못 한 거 없어. 내가 안 그랬어.”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그럼 오지 마.”
“니가 먼저 날 쫓아 왔잖아? 무슨 용건이 있을 거 아냐?”
소년은 도하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계를 풀지 않고 다가간 단유에게 소년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 그런 거 없어.”
단유는 소년의 가슴에 붙은 명찰을 보았다.
“권순욱? 혹시 나 알아?”
“아, 아니. 몰라.”
“모르는데 왜 쫓아 왔어?”
“쫓은 거 아니라니까.”
“그럼 어디 가는 중이었는데?”
“그걸 왜 말해? 니가 무슨 경찰이야?”
단유는 꽤 뻔뻔한 순욱의 대답을 들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야 순욱이 왜 자신을 쫓아 왔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일단 너희 집이 이쪽이 아니란 건 맞지?”
“아닌데? 우리 집 이쪽인데?”
“그래?”
일단 거짓말을 하고 있음은 확인했다.
“집에 가는 길이야?”
“그, 그래. 그러니까 비켜.”
단유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권순욱. 일단 너희 집이 이쪽이 아니란 건, 니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 붙은 카드만 봐도 알 거 같은데?”
카드란 말에 순욱은 자신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핸드폰 뒷면에 꽂아둔 교통카드였다.
“지하철 카드잖아? 자주 쓰니까 그 앞에 두고 쓰는 거겠지. 그런데 이쪽은 지하철이 없거든? 그러니까 너는 이곳이 자주 오는 곳이 아니란 거야.”
“아니거든. 이건···학원 갈 때 쓰는 거거든.”
“니가 다니는 학원이 어딘데?”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니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순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켜, 너랑 이야기할 시간 없어.”
순욱이 억지로 가려 하자, 단유는 몸을 옆으로 틀어 길을 열어줬다. 그에 오히려 순욱이 멈칫거리며 눈치를 봐야 했다.
“가.”
순욱은 단유를 째려보다, 얼른 걸음을 옮겨 다시 큰길로 나갔다.
“그러니까, 집에 간다는 애가 왜 다시 돌아가냐고.”
단유는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사라진 줄 알았던 순욱이 고개를 내밀고 골목을 살피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단유가 간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단유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씨발. 큰일인데.”
순욱은 핸드폰을 쥔 채로 발을 구르다,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나야. 미안. 아니, 안 들켰어. 들킨 건 아닌데 골목이 많은 곳으로 가서 길을 놓쳐서 그래. 응. 아냐, 꼭 알아낼 수 있어. 진짜야.”
순욱은 통화를 마치고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가지가지 한다.”
그 모습을 보던 단유가 중얼거리다, 다시 몸을 돌렸다. 순욱은 단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줄도 모르고 투덜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 시간, 도하는 먼지 가득한 방안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방금의 통화내용을 떨쳐냈다.
“실패야?”
“그런가보다.”
“병신, 그 새끼는 진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러게 그런 놈을 왜 시켜?”
“주변에 사람이 없다.”
도하가 쓸쓸한 어조로 넋두리하듯 한마디를 뱉고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뿜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던 도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고개를 돌렸다.
“진태야, 적당히 좀 마셔라. 나중에 또 토하지 말고.”
고주망태가 되기 직전이던 진태는 흔들거리는 시선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적당히 마시라고.”
진태는 도하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도하는 슬쩍 그곳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성아, 전화해서 이리로 오라 그래.”
“여기로?”
“그리고 올 때 물 좀 사 오라고 해. 목마르다.”
진태의 주문까지 접수한 우성이 순욱에게 전화할 때, 도하는 일어나서 집을 나섰다. 언덕에 위치한 이 집은 빈집이 된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도하가 아지트로 사용할 마음을 품으면서 지금까지 요긴하게 사용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집보다 더 오래 머물다 보니, 마치 자기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러운 게 흠이지만.’
다음에 날 잡아서 애들한테 청소라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집을 나와 보니 시원한 바람이 언덕길 아래에서부터 불어와 도하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구름 낀 하늘이 자줏빛으로 물들고 있는 경치가 보기 좋았다.
잠시 후, 진태가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나왔다.
“왜 여기 있어. 들어가자.”
얼굴이 하얗게 변한 듯한 게 아무래도 속을 게워냈던 것 같아 보였다.
“토했냐?”
“응? 아. 뭐.”
“그리고 애들 좀 보내라. 조용히 있고 싶다.”
“···그럴래?”
진태가 히죽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문이 열리며 여자애 두 명이 엉거주춤하는 걸음으로 나왔다. 여자애는 도하를 흘겨보면서도 눈치를 보았다.
“빨리 가라.”
여자애는 지가 불러놓고, 라고 중얼거리며 콧방귀를 뀌고는 골목길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단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니가 어른이나 되는 줄 알아?”
“씨발놈.”
도하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다시 빈 집으로 들어간 도하는 자리를 정리하던 우성에게 말했다.
“술 남았냐?”
“지난번에 사 온 거 있을걸?”
찬장을 뒤져보니 소주병이 하나 나왔다. 도하는 뚜껑을 따고 소주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벌컥벌컥 들어가는 소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마시던 도하는 반쯤 마시다 병을 내렸다.
“윽.”
물을 급히 마셔도 사레가 들릴 판에 소주를 들이부었으니, 목이 여간 따가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러운 기분을 잊으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았다. 가장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
“나 왔어.”
“오셨어요?”
“이야, 이게 누구야? 우리 단유가 날 다 마중 나오네?”
“전 안 보이시나 봐요?”
“이야, 이게 누구야? 웬일로 우리 명수가 게임을 안 하고 있어?”
“밥 차려놨어요.”
“밥? 누가? 니가?”
“같이 했어요.”
“우와, 완전 대박.”
하은은 씻는 건 뒤로 미루고 식기 전에 먹자며 식탁에 앉았다.
“맛있겠네.”
식탁에는 3인분 라면이 김을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라면을 덜어서 한 젓가락을 들어보는 하은은 면을 씹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맛있어요?”
명수의 질문에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면 맛이야.”
“뭐예요, 그게. 맛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라면 맛이 라면 맛이지. 그리고 누가 끓인 거야?”
명수는 단유를 가리켰다.
“다음에는 라면에 꼭 건더기 스프 넣자?”
“네.”
하은을 비롯 세 사람은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