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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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 단유는 복도에서 지태 등을 만났다.
“너 3반이야? 아, 아쉽다. 같은 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반이어야 네 등수가 하나 더 오르는 거 아냐?”
“어? 그러네? 그럼 잘 된 거네? 단유야, 너 나랑 평생 같은 반 하지 말자.”
그게 마음먹는 대로 되는 일이더냐. 단유는 그저 실소를 터뜨려 보이는 정도로 화답했다. 지태와 채윤은 또 같은 반이 되었기에 그들 사이의 만담은 1년간은 계속 이어질 듯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작년의 친구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잡담을 나누는 풍경은 비단 단유네만은 아니었다. 많은 아이들이 1교시를 마치고 복도로 나와서 정보를 교류하며 친목을 다지는 와중에, 몇몇 아이들은 굳이 건물 바깥까지 나와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야, 다른 반 됐다고 쌩까면 안 되잖아?”
“미안.”
“당연히 사람이면 미안한 줄 알아야지. 우리 우정이 그렇게 싸구려는 아니잖아?”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는 모양새가 영 불편하지만, 면전에서 그 모습을 지적할 힘이 없던 아이는 어깨를 움츠리고 사과만 할 뿐이었다.
“미안해.”
“그래, 적당히 미안해하고 얼마 가져왔어?”
“오늘, 은 별로 없어.”
“너 그러다 걸리면 죽는 걸 알잖아? 왜 괜히 말 돌리고 그래. 피차 피곤하게 그러지 말자.”
그때 뒤에서 망을 보던 덩치가 다가와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아이의 턱을 붙잡았다.
“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꺼내, 새끼야!”
턱을 붙잡힌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덩치를 쳐다보았다가 노려보는 눈동자의 살기에 움찔 놀라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야, 진태야. 왜 괜히 겁주고 그래. 좋게 말로 하자니까.”
한 발 뒤에 있던 소년, 도하가 덩치를 달랬다.
“새끼가 괜히 시간 끌면서 꼼수 부리잖아.”
“괜찮아. 오늘 시간 많아. 그치? 지철아?”
도하의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지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야, 가자. 지철이는 오후에 다시 보자, 응?”
도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몸을 돌렸다.
“에이 씨. 매점 갈 시간도 없겠네.”
진태가 지철을 째려보며 한마디 하자, 처음 지철이를 붙잡고 있던 소년, 우성은 또 한 번 입꼬리를 올리며 지철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나중에 보자?”
지철은 지금이라도 지갑을 꺼내야 하나 싶었는데, 오히려 빠르게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아이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도하는 호탕해 보이는 성격과 중위권 이상을 차지하는 성적 때문에 특별한 경계대상은 아니었다. 접점이 없어 자주 마주치는 편은 아니어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지철의 도하에 대한 인상은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뒷자리에 틈만 나면 가래침을 뱉는 진태나 표정 자체가 불량스러운 우성이만이 경계대상이었다.
소심한 지철은 특별히 반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유난히 더웠던 어느 날 매점 앞을 지나다가 도하가 자신을 불렀다.
“지철아.”
도하가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부른다는 게 이상했지만, 지철은 달리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목이 마른 데, 돈이 없네. 음료수 사 먹게 1,000원만 좀 빌려줄래?”
그게 악연의 시작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지철은 별생각 없이 돈을 꿔줬고, 도하가 1,00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고 웃음을 짓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지철아?”
도하는 이후 종종 지철을 불렀다. 그리고 어느 날 도하 뒤에 진태와 우성이 붙었고, 돈의 액수가 점점 커졌다. 도하는 방학 때도 종종 지철을 불렀다.
“같이 피시방이나 갈래?”
지철은 아이들의 유흥비를 책임졌다. 하지만 용돈에도 한계가 있으니 지철이 돈이 없다고,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세 사람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날 지철은 진태와 우성에게 이보다 심하게 맞을 수 없다는 듯 두들겨 맞았다.
“얼굴은 안된다, 진태야.”
도하는 주먹을 쓰지 않았다. 뒤에서 담배를 문 채 지철이 맞는 장면을 구경할 뿐이었다. 주먹질이 끝났을 때는 도하가 담배를 두 개비를 피우고 난 후였다.
“지철아.”
“······.”
“대답이 없네? 어떡하지?”
“으, 응.”
“그래, 친구가 부르면 바로바로 대답해야 돼.”
지철은 고통에 찬 신음도 마음대로 내지 못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할 테니까, 들어가서 좀 쉬어. 이렇게 놀면 몸 상해. 푹 쉬고, 몸 좀 나으면 그때 보자. 그리고 그때는 꼭 ‘같이’ 놀자.”
도하는 지철의 뺨을 토닥여 준 뒤, 몸을 일으켰다.
“아, 혹시나 하는 말인데. 만약에 오늘 일이 이상하게 소문이 돌잖아? 그러면 나도 움직일 거야.”
진태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도하 네가 움직이면 쟤, 그냥 죽는 거 아냐?”
“죽긴 뭘 죽어. 그냥 좀 힘든 정도지.”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나누며 도하의 무리는 사라졌다. 지철은 꺽꺽거리며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지철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도하 같은 아이가 손을 쓰면 더 독하게 쓴다는 사실을. 반 광분 상태에 빠진 애들과 달리 끝까지 자신을 즐기듯 바라보던 그 시선을 지철은 잊을 수 없었고, 무시할 수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지철은 2반이 되었다. 다른 반이 되었다는 것에 기뻐한 것도 잠시, 3반의 도하와 우성, 1반의 진태가 자신의 반 복도에서 불렀을 때 절망감에 쓰러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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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야, 오늘 축구부 단체 연습이 있어서 같이 못 가겠다.”
“알았어. 연습 잘하고 와.”
이번 주 주말에 바로 춘계대회 예선전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에 대비한 훈련이니 아마도 오늘 축구부 감독님은 단단히 기합을 넣어줄 예정이리라.
점심을 먹고 다시 교실로 돌아올 때, 단유는 명수네 반 교실로 향하는 아이의 교복이 심하게 구겨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심하게 놀다가 구겨졌다기 보기 힘든 모습과 아이가 내뿜는 음울한 기운에 단유는 다른 무언가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관심을 끊고 반으로 들어갔다. 저런 아이들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당장 자신과 관련이 없는데 괜한 오지랖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단유는 본인의 성장에 더욱 집중할 때였으니까.
자리로 돌아온 단유가 책을 펼쳤을 때, 도하가 우성과 같이 반에 들어왔다. 도하는 교실 뒤에 붙은 거울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고, 때문에 단유의 뒤를 지나가야 했다. 단유는 도하가 지나갈 때, 짙은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도하는 머리를 매만지며 얼굴 이곳저곳을 확인하다가, 우성에게 치약이 있냐고 물었다. 우성은 가방에서 치약을 하나 꺼내 흔들어 보였고, 도하는 그 치약을 건네받아 서랍에서 칫솔을 꺼내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그냥 나가는 줄 알았던 도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야, 너 뭐 보냐?”
단유는 힐끔 돌아보았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가라.”
“응?”
단유는 대답 대신 무시를 선택했다.
“이 새끼 봐라? 야, 내 말 씹냐?”
도하는 치약으로 단유의 머리를 툭툭 쳤다. 단유는 손을 저어 도하의 그 행동을 막으려 했는데, 그게 오히려 도하에게는 재밌는 장난처럼 여겨졌나 보다.
“우성아, 이것 봐라.”
단유의 손을 피해 머리를 툭툭 치는 모습을 보고 우성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단유가 인상을 쓰며 도하를 바라보자, 도하도 장난을 멈췄다.
“새끼야, 얼굴 풀어. 친구끼리 장난치는데 진지 빨고 지랄이냐.”
“친구?”
“그래, 새끼야. 같은 반이면 친구지 새끼야.”
도하의 히죽거림이 눈에 거슬렸다.
“갑자기 시비를 거는 녀석이 내 친구는 아니지.”
“뭐?”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하 역시 단유와 시선을 마주했지만, 단유가 조금 더 컸던 탓에 시선이 약간 올라갔다.
“그냥 화장실에나 가. 가서 더러운 냄새나 지우고 말해. 토 나올 거 같으니까.”
도하는 자신에게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책이나 보는 ‘모범생’이라는 사실에 더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럽고, 화가 났다.
“개새끼가, 적당히 해줄라니까···. 야, 뒤질래?”
우성이도 도하 옆으로 다가왔다.
“도하야, 비켜봐라. 뒤에서 그냥 보고 있을라니까 존나 열 받게 만드네.”
우성은 도하 앞으로 몸을 들이밀고는 단유의 가슴을 밀쳤다.
“야, 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우성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단유의 가슴을 한 번 더 밀치려 했다. 단유가 그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말이다.
어, 하는 사이에 손목이 붙잡힌 우성은 강한 악력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우성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놔, 새끼야! 아프다고!”
하지만 단유는 여전히 시선을 도하에게 던졌다.
“학기 초마다 시비 거는 놈들이 한두 명씩 있는데, 도대체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가길래 매번 이러냐? 담배나 피우면서 어른 흉내나 내면 진짜 어른이라도 된 거 같애? 너보다 약한 애들 괴롭히면서 자위하면 인생이 즐거워? 고작 30명 정도인 교실에서 왕 노릇하면서 사는 게 인생의 목표야? 그런 거 아니면 정신 차리고 살아.”
단유의 말에 도하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성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만, 그저 한 손목만 붙잡혀 있을 뿐인데 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욕을 하고 폭력을 쓴다고 니들이 진짜 강한 줄 알면 그건 착각이야. 그런 건 전혀 강한 것도 아니고, 너희보다 강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니가 보는 세상보다 이 세상은 넓어. 조심하면서 살아.”
단유는 우성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우성은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단유에게서 멀어지려는 힘겨운 몸짓이 도하는 못마땅했다.
“존나 잘난 새끼였네. 그러는 니는 지금 한 게 폭력 아니냐, 새꺄? 작년에도 광종인가 하는 새끼 패고 다녔더만, 니는 얼마나 깨끗하다고 훈계 질이야, 씹새끼야!”
“그게 훈계로 들려? 난 충고를 한 거야. 훈계라면 너희들이 바른길로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해야 훈계지. 너희들이 바르게 살든 엉망진창으로 살든 내 알 바 아니거든.”
“이 새끼가.”
단유는 도하가 계속 화를 내든 말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래도 얼굴 맞대고 1년을 함께 할 녀석이라서 충고를 한 거야. 그렇게 가볍게 살다가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진실을 알려 준거니까, 머리가 있으면 받아들여. 그런 머리도 없으면 할 수 없고.”
도하는 붉어진 얼굴로 단유를 노려보았다. 주변의 아이들이 웅성거림도 멈추고 두 사람을 지켜볼 때, 도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럴게. 주의하지 뭐.”
의외의 반응에 주위 아이들이 어리둥절할 때, 도하는 쓰러진 우성의 허벅지를 툭툭 걷어찼다.
“일어나라. 꼴사납다.”
우성이 힘겹게 일어서자, 도하는 단유에게 치약을 흔들어 보였다.
“김단유, 너. 꽤 잘난 놈이네. 잘났다. 아주 잘났어.”
그리고 돌아섰다. 아이들은 어쩐지 싱겁게 끝난 싸움에 도하가 졌네, 봐줬네 등으로 속삭임을 나눴고, 도하는 우성을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도하야.”
“조용해, 새끼야.”
도하는 방금 전과 또 다르게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오후에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하겠다.”
입안에 하얀 거품을 가득 베어 문 도하가 화장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