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3)
-------------- 336/952 --------------
언제나와 같이 새벽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단유와 명수가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왔을 때, 하은은 나갈 채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서 구두를 고르는 중이었다.
“밥 차려놨으니까 알아서들 챙겨 먹고 나가.”
“선생님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구두를 신던 하은이 문득 단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냥 너한테 이런 인사를 들으니까 조금 신선해서.”
늘 인사를 하며 배웅하던 쪽에 있다가 배웅을 받으며 출근을 하게 되니 낯설기도 했다.
“금방 적응되실 거예요.”
단유의 말에 피식 웃은 하은은 구두를 마저 신고 몸을 바로 세웠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뒤늦게 젖은 머리를 하고 나타난 명수가 손을 크게 흔들며 하은에게 인사했다. 하은은 명수의 머리를 가리키며 ‘머리 꼭 말리고 가라’ 고 당부를 한 뒤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하은은 한 번 더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거울을 통해 복장 점검을 했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층수를 확인하니, 마침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의 굽소리를 들으며 차로 향한 하은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잠시 엔진의 열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룸미러를 통해 또 한 번 화장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오른쪽 눈의 마스카라가 왼쪽에 비해 너무 진한 건 아닌지 헷갈렸지만, 당장 손을 댈 정도는 아니었다. 볼 터치를 약하게 하긴 했는데, 너무 어려 보이려고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지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깊이 고민해야 했다.
비록 학원 강사라도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야 할 위치인데, 이런 화장은 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브러쉬를 꺼내고 화장을 고치려다 보니, 또 봄인데 너무 창백하게 보이면 생기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좀 연하게 하는 정도로 할까.’
브러쉬로 약하게 볼을 쓰다듬으니, 다소 진하다고 생각했던 볼의 색이 옅어졌다. 그러고 보니 턱 쪽의 음영이 또 너무 옅어진 기분이었다. 쉐도우브러쉬를 가지고 나왔던가 확인한 하은은 다행히 잊지 않고 챙겨온 자신을 칭찬하며, 룸미러를 보며 턱 쪽의 음영을 더 했다. 그러고 다시 룸미러로 확인하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얼굴선이 나오는 것 같았다.
문득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지하주차장에 내려온 지 15분이 지났다.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만, 조금 빠듯한 시간. 잠깐의 갈등 끝에 하은은 마스카라까지 꺼내서 눈을 손본 뒤에야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출근 첫날, 하은은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전방을 바라보며 자신의 새로운 직장이 된 학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30여분 뒤, 명수와 단유도 오피스텔을 나섰다. 두 사람도 원래 등교하는 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온 셈이었는데, 아무래도 개학 첫날이다 보니 설레는 마음도 있었던 탓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명수가 많이 들떠 있었다.
“어? 너 벌써 가?”
“안녕? 너희도 벌써 학교 가?”
오피스텔을 나와 큰 길가로 걷던 단유와 명수는 상미를 만났다.
“나 먼저 간다! 안녕!”
상미는 바쁜 척을 하며 손을 젓고는 다른 길로 사라졌다. 어차피 방향이 달라서 같이 갈 수는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아침부터 쟤를 보다니. 오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명수의 중얼거림에 단유가 이유를 물었다.
“상미가 평소와 다른 패턴을 보일 때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졌어.”
명수는 평소 4-3-3 전략을 쓰던 상미가 갑자기 4-4-2나 4-3-1-2 같은 전략을 쓰면 게임이 잘 안 풀리고 갑자기 패드가 먹통이 되는 일이 생겼다며 자신의 예측이 맞을 거라는 근거를 들었다. 당연히 단유는 으레 그렇듯 못 들은 척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근데 상미, 작년에는 자기 아버지 차 타고 가지 않았나?”
“맞네? 왜 안 탔지?”
아마도 그래서 서둘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하던 단유는 마침 집에서 나오던 또 다른 친구, 지태를 만났다.
“오, 역시 빨리 나오니까 이렇게도 보네. 어쩐지 오늘 집에서 나오는데 어쩌면 너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래?”
“역시 모범생이니까 첫날에는 일찍 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지.”
“그건 아닌데. 오늘은 명수 때문에 일찍 나왔어.”
“니가 일찍 나오자고 했다고?”
명수의 고갯짓에 지태가 이유를 물었다.
“난 학교 일찍 가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니가 학교에 일찍 가려고 했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도 사실이지. 마치 단유가 공부하기 싫다고 자퇴서 내는 것 같잖아?”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래서 일찍 가는 이유가 뭔데?”
“그냥. 올해부터는 좀 부지런해지려고.”
지태는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지만, 단유나 명수는 좀 더 자신들의 삶에 충실해지기로 약속했다. 딱히 거창하게 무언갈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좀 더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는 의견에 서로 동의한 뒤의 결심이었다.
“안녕!”
채윤이 멀리서 손짓을 하며 인사를 하는 모습을 명수가 먼저 발견했다.
“쟤도 일찍 나온 거 아냐?”
“그러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채윤은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채윤을 기다려주기로 하고 맞은편 건널목에서 기다렸다.
“근데, 너 춥냐?”
“아직은 추운데? 너야말로 안 추워?”
“이 정도로 춥다고 하면 엄살이지.”
명수가 가슴을 쭉 내밀며 거드름을 피웠고 지태는 비록 3월이지만 그래도 날씨가 쌀쌀하다며, 엄살을 피웠다. 초록불로 바뀌며 채윤을 비롯한 사람들이 건널목을 건널 때였다.
“어?”
건널목을 지나던 몇 사람이 사거리 쪽을 보며 걷다가 당황해했고, 덩달아 시선을 옮겼을 때는 이미 중앙선을 넘어 달리던 승용차 한 대가 정지선을 넘고 있었다.
****
방학 동안 늦잠을 자버릇하던 습관이 남았던지라, 상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개학날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마침 출장을 가신 날이기도 했던 탓이었다. 즉, 오늘 상미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상미의 학교는 집에서 조금 먼 편이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집에서 살지만, 아버지가 매일 아침 태워다준 덕에 지각은 하지 않았고, 모자란 잠도 승용차 안에서 마저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상미는 불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홀로 학교에 가야 했고, 그래서 보통 때보다 훨씬 일찍,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했지만, 상미는 결국 어머니에게 등을 두들겨 맞으며 아침을 맞이했다.
“으이구, 어제 그렇게 일찍 자라고 했는데 말 안 듣더니, 이게 뭐야! 빨리 일어나!”
“아! 엄마! 아퍼!”
“얼른 안 일어나!”
상미는 꿈틀거리며 침대를 벗어나 세안을 마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엄마! 지금 깨우면 어떡해!”
상미의 어머니는 식탁 위에 올려진 숟가락을 아무렇게나 집어서 던지는 시늉을 했다.
“이게 죽으려고!”
움찔한 상미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는 상미를 물끄러미 보다가 턱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밥 먹을 시간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미가 울상이 된 채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다 기어코 한 숟가락 입안에 집어넣은 뒤,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단유 같은 모범생이랑 친하게 지내면, 좀 차분해지고 얌전해질 줄 알았더니, 명수 같은 애랑 붙어 놀면서 오히려 더 왈가닥이 된 것 같다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물론 걔네랑 어울리면서 상미의 성적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말이다.
“차 조심해.”
그래도 딸에 대한 걱정에 한 마디를 또 덧붙이는 어머니였다. 상미는 히죽 웃으면서 엄지를 내밀었다.
“알았어요, 엄마!”
저 못 말리는 성격 같으니라고. 현관에서도 허둥대며 신발을 신은 상미가 집을 나선 뒤에야, 집 안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서다가 식탁 위에 남겨진 밥그릇을 보았다. 한숨을 쉬며 상미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상미가 들었던 숟가락으로 남은 밥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안녕! 벌써 학교 가?”
상미는 버스를 타러 달려가다가 만난 단유와 명수에게 허겁지겁 인사한 뒤, 서둘러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달리며 생각해보니 등굣길에 두 사람을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아버지 차를 타고 나가다가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인사는 처음이네.’
아침부터 친한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눴더니 상미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오늘은 꽤 기분 좋은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달린 덕인지, 상미는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학교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 몇몇이 안에 보였지만, 얼굴을 잘 모르는 이들이었기에 그냥 모른 척하며 적당한 자리에 서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도로에 아침 출근 차들이 몰려나올 시간인지라, 빠르게 달리는 차들이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특히 이 동네는 신호등이 많고 신호가 조금씩 어긋나서 자칫하면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 차를 탈 때도 조금 늦게 집을 나서면 꼼짝없이 도로 위에 붙잡혀서 속을 태워야 했던 적이 많았던 상미였다.
“도대체 시에서는 이런 거 알면서 안 고치는 거야, 모르고 못 고치는 거야.”
“왜요? 아빠?”
“신호등 4개가 전부 따로 불이 들어오니까, 앞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 봐라, 또 빨간 불이다.”
“이거 신고하면 안 돼요?”
아버지는 신고할 시간이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으시다가 녹색 불에 급하게 튀어나가곤 했다. 답답해도 일단은 딸 아이가 지각하지 않도록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이셨을 것이다.
상미는 이전 기억을 떠올리며 바깥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역시나 또 한 번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버스는 정류장을 출발하기가 무섭게 다시 멈춰야 했다. 고작 몇 분에 불과할지라도, 그 몇 분이 지각을 좌우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녹색불이 들어왔을 때, 맞은편 차선에서 텅 빈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는 검정색 승용차가 보였다. 저 사람도 아마 급한 마음에서 저러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상미는 또 한 번 시계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동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 게임에서 조종했던 캐릭터의 능력을 떠올리면서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는 상미였다.
****
검은색 승용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신호등에 열이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급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닐 테지만, 마음은 급하고 재수 없게도 신호란 신호는 다 걸리는 것만 같아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노란불에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이자, 검은 승용차는 옆 차선, 중앙선 너머가 비었음을 인지한 즉시 핸들을 꺾었다.
빨리 달리면 큰 사고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란 불이 빨간 불로 바뀌는 시간은 대략 1~2초 정도라 판단했고, 그 시간에 자신의 승용차는 충분히 속력을 얻어서 지나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정지선을 넘었을 때, 이미 빨간불이었지만 앞은 훤하게 트여 있었다. 악셀을 보다 빨리 밟으면 괜찮을 것이다, 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녹색불에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빨리 이상함을 느끼고 걸음을 멈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경우, 검은 승용차 이상으로 마음이 급한 사람도 있었고, 또 몇몇은 아예 이어폰을 낀 채로 앞만 보고 걷는지라 주변 상황에 둔감해진 경우도 있었다.
검은색 승용차의 후면 램프에 빨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에서 운전자의 선택을 알 수 있었다.
“저 미친···.”
검은 승용차 뒤에서 속도를 줄이던 운전자들이나 건널목에 서 있던 사람들이나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
명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들었을 때, 단유의 시선 역시 자동차로 옮겨져 있었다. 엔진의 RPM이 올라가는 소리를 모두가 들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