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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335화 (335/956)

도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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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줘야 하는데.”

“괜찮아요, 오늘은.”

단유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나윤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나윤은 앞에 놓인 수저를 만지작거리며 할 말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두운 분위기로 만들 게 뻔한 단어들만 연상될 뿐이었다.

“많이 바쁘세요?”

단유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나윤은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또 대화가 끊겼다. 그러다 보니 계속 단유를 보는 거도 힘들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음식이라도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까 보니까 연습실이 좀 썰렁하던데, 춥진 않으시고요?”

“어? 어. 괜찮아. 연습하면 열이 나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아무 말이나 해봐’라는 생각에 나윤은 입을 열었다.

“잘 지내니?”

나윤은 말을 꺼내고는 얼굴을 붉혔다. 기껏 생각한 게 ‘잘 지내냐’는 말이라니.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보시다시피 지갑도 두둑해졌고요.”

“그 돈으로 뭐할 거야?”

진짜 이제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내뱉고 있었다. 나윤은 도대체 자기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길래 이러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자신이 봤다면, 바로 옆에 붙어서 박장대소를 했을 것이다.

“별로 큰돈은 아니라서요. 아마 명수 신발 사주고 나면 끝날 거 같네요.”

“신발?”

“아, 혹시 이전에 말을 했었나 모르겠는데, 명수가요, 축구부 활동을 하거든요. 그런데 워낙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신발이 다 떨어졌더라고요. 그래서 이 돈으로 신발을 사주려고요.”

“대단하다, 너! 친구를 위해서 돈을 쓰다니.”

“명수는 가족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가족’이란 말에 또 마음이 쿵, 하고 충격을 받는 느낌이었다.

“아, 이 돈으로 누나 밥도 사주고요.”

“어, 그래.”

‘가족’과 연상되는 것들이 또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자, 나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누나는 연습할 때도 화장을 해요?”

“응? 아니, 안 하는데?”

“그런데 입술이 되게 붉으시네요.”

“아, 이거는 그냥 립밤 바른 거야.”

“그래요? 립스틱 같은 거예요?”

“비슷해. 그런데 색깔은 별로 안 들어간 건데.”

“그럼 원래 입술이 많이 붉어요?”

“응, 조금.”

그 사이에 음식이 나왔다. 단유가 시킨 것은 떡볶이, 나윤이 시킨 것은 김밥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어, 고마워. 너도 많이 먹어.”

“전에 명수가 가르쳐 준 건데요, 김밥을 여기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맛있대요.”

“원래 그렇게 먹는 거야.”

“그래요? 몰랐어요. 전.”

“분식 잘 안 먹어?”

“네. 별로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아서요.”

“그렇구나.”

나윤은 김밥을 하나 집어서 떡볶이의 붉은 소스에 찍은 뒤,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매콤한 소스와 김밥이 어우러지면서 입안에 자극이 가득했다.

“맛있어요?”

“응. 맛있어.”

단유는 미소를 지으며 나윤의 먹는 모습을 보다 자신도 떡볶이 하나를 집어서 먹었다.

“맛있네요.”

“맛있지? 여기가 회사 근처에서 제일 맛있는 분식집이거든. 연습생들이 자주 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던 단유는 연습생들마다 다니는 가게가 다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미성년자인 연습생들은 치킨 가게에 가서 음식을 먹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문득 그날 갤럭시즈 멤버들이 잔을 들어 올리던 모습을 떠올린 단유는 얼른 잡생각을 떨쳐내고 나윤에게 집중했다.

자극적인 맛의 음식이 입안에 들어가니, 그나마 얼굴이 나아 보였다. 얼굴이 굳어질 때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할 때마다 단유는 일부러 별 의미 없는 말이라도 굳이 꺼내서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대화로 나윤이 한 곳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고, 그 덕택인지 아까 나윤을 보았을 때의 음울한 분위기는 많이 가신 것 같았다. 그래도 말이 끊어지거나, 아니면 대화 중간에 연상되는 무언가가 있으면 곧 입술이 닫히고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단유가 보기에 굉장히 불안하기만 한 나윤이었다.

지금 단유의 대처는 나윤의 ‘증세’를 낫게 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 증상이 발현되는 것을 미룰 뿐이었다.

“물 좀 가져다 드릴까요?”

“어? 아냐, 내가 가져올게.”

“앉아 계세요. 제가 가져올게요.”

단유는 단답형으로 끝내도 될 말을 굳이 한 마디 덧붙이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 상대가 자신에게 집중하게끔 했다. 그 덕에 나윤은 정신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허겁지겁 먹었던 것은 아닌데, 별 거 아닌 주제로라도 대화하면서 젓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텅 빈 접시만 남았다.

“언제 먹었는지 모르겠네.”

“더 드실래요?”

“아냐, 괜찮아.”

이제는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춤을 출 때 무거운 몸은 방해가 되니까 꾸준히 몸 관리를 해주는 게 좋았다. 가디스R이 어떻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니······.’

수련의 얼굴이 떠오르자, 눈 아래의 살이 떨리다 굳는 느낌이었다.

“누나.”

그 순간을 포착하여 다시 나윤을 부른 단유. 나윤이 쳐다보자 단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많이 힘들어요?”

나윤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단유, 저 아이도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니, 알 것이다.

‘언니랑 친하니까, 태호 오빠랑도 친하니까, 이미 다 들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왜 왔을까? 정산받으러 왔다면, 그냥 돈만 받아서 가면 되지, 왜 굳이 날 보러 왔을까?

‘내가 어떻게 있는지 궁금해서? 언니가 나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라고 해서? 언니 말 안 듣고 남았다가 쭉정이 신세가 된 내 모습을 보려고?’

“누나, 혹시 수학 좋아해요?”

나윤의 눈에 서리는 아픔을 보던 단유가 질문을 던지자, 나윤은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 했다.

“제가 요즘 고등학교 수학을 배우거든요. 자랑인가? 아무튼 고등학교 수학 중에요, 삼각함수가 있어요.”

비록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 신분이지만, 고등학생이기도 한 나윤은 학교에서 정규수업을 들어야 했고, 당연히 ‘삼각함수’를 배운 기억이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삼각함수’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지만.

나윤의 눈치를 살피며 단유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삼각함수에 대해 가르쳐 주실 때요,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삼각함수는 인생과 같다고. 물론 이제 겨우 15살인 제가 인생을 어찌 알겠냐 물었더니, 그래도 들어두면 좋다고 하시면서 ‘억지로’ 알려주시더군요.”

나윤은 단유의 옅은 미소와 선한 눈동자를 보며 귀를 기울였다.

“삼각함수에는 기본함수로 사인함수(Sin), 코사인함수(Cos), 탄젠트함수(Tan)가 있대요.”

살짝 머리가 아파져 오는 느낌은 정말 느낌일 뿐이겠지.

“여기서 사인함수가 이런 모양이잖아요?”

단유는 젓가락으로 공중을 저으며 사인함수의 그래프를 그려보았다.

“사인함수의 시작은 0이고, 끝도 0이에요. 그래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을 표현한다고 그래요. 그리고 코사인함수는요, 1에서 시작해서 1로 끝나요. 1이 삼각함수에서 가장 큰 수거든요? 그래서 인생의 황금기를 뜻한다고 해서, 코사인함수는 사랑을 의미한대요.”

그런 의미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탄젠트함수는 이런 모양이에요. 이 끝은 Y선에 수렴한다고 하죠? 붙는 모양으로 이렇게 진행되지만, 영원히 만나지 않아요. 마이너스든 플러스든 말이죠. 결코 만날 수 없는,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이란 뜻에서 이별을 상징한다고 해요.”

단유는 공중을 휘젓던 젓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사인 나누기 코사인은 탄젠트(Sin/Cos=Tan)이란 기본 공식이 있죠? 여기에 대입해 보면, ‘인생을 사랑으로 나누면 이별’이란 공식이 나오네요. 결국 사랑을 하다 보면 이별도 나오고, 이별은 또 다른 사랑을 만들기도 한다, 는 뜻이래요.”

나윤은 피식 웃었다.

“그게 뭐야.”

“뭐긴요. 그냥 이리저리 끼워 맞춘 거죠. 재밌죠?”

“재밌네.”

“아까 탄젠트함수 그래프가 이런 모양이라고 말씀드린 거 기억나시죠? 위로 뻗든, 아래로 뻗든 결국 교점은 0이에요. 다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관계이니 결국 0, 모두 빈손으로 돌아오는 거죠. 그리고 다시 시작하죠. 0에서 다시 위로, 혹은 아래로. 다시 0에서 위로, 혹은 아래로. 최대값과 최소값이 없는 탄젠트는 그렇게 무한대로 뻗어 나가요. 그리고 각에 따라 또 다른 0에서 시작하죠.”

단유는 원을 그리고 탄젠트 그래프가 만들어지는 모양을 그려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요,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결국, 이별을 향하지만, 또다시 이별을 준비하는 것처럼 다시 시작하고, 시작하죠. 이별이란, 그런 건지도 몰라요. 아프지만, 또다시 시작하는 거요.”

나윤은 입술을 깨물며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젓가락으로 그린 그래프가 눈에 보일 리 만무하건만, 마치 선명하게 식탁 위로 도드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는 좀 그렇긴 한데, 저도 지금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중이거든요. 그리고 누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누나, 아프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 끝은 없어요. 계속 아플 뿐이에요. 그러니 0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요?”

이번에는 참기 힘들었다. 나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배어 나올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다 보니 더 많은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단유는 그 자리에서 계속 그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이제 단유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

단유는 명수를 데리고 축구화를 사러 갔다. 명수는 부담스럽다면서도 기쁘게 선물을 받아들었고, 단유는 명수의 웃음으로 값을 대신한다며 명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춘계대회에서 꼭 1등 할게.”

“우승하겠다고?”

“아니, 우승 말고 1등. 제일 골 많이 넣는 사람이 1등이야.”

명수는 단유를 끌고 운동장으로 갔다. 그리고 새 신발을 꺼내 신고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단유는 골키퍼 역할을 하고, 명수는 스트라이커였다.

“자, 이번에 3골만 넣어보자.”

“3골 넣으면?”

“그럼 아마 이번 대회 득점 1위일 걸?”

“그럼 봐줘야겠네.”

“봐주면 안 되지. 봐주지 말고 해. 진심으로. 그래야 나도 실력이 늘지.”

“알았어.”

단유는 빈말 따윈 하지 않았다. 열심히 뛰고, 열심히 막았다. 덕분에 명수는 1골만 기록했다.

“아, 진짜. 못 해 먹겠네.”

바닥에 풀썩 앉아서 지쳤다는 시늉을 하는 명수에게 다가간 단유가 왜 그러냐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널 이길 수 있냐?”

“잘하면 되지.”

“내가 지금 못 해?”

“잘해.”

“근데 왜 골을 못 넣는데?”

“그 정도는 안 되나 보지.”

“야, 그냥 니가 축구해라. 내가 공부할게.”

“진짜?”

“농담도 못 하냐?”

명수는 ‘다 쉬었다’ 고 외치며, 후반전을 시작하자고 졸랐다. 그리고 결국 명수는 후반전이라 외치고 줄창 공만 찬 끝에 1골을 더 넣을 수 있었다.

“우연히 들어가도 골이다.”

“누가 뭐래?”

“우연도 실력이다!”

“아무 말 안 했어.”

두 사람은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 마지막 날, 그렇게 땀을 흘린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내일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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