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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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던 하은은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때문에 두 번이나 노란 불에 페달을 깊이 밟아야 했고, 옆에서 끼어드는 차를 보지 못하고 박을 뻔한 것이 세 번이었다.
“야, 정신 나갔어!”
“죄송합니다.”
결국 하은은 차를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시킨 후, 마음의 평화를 위해 평소 듣던 음악 대신 라디오로 클래식 채널을 맞추고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를 위한 전주곡 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을 들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주영의 앞에서는 괜히 센 척하며 기세등등하게 행동했지만, 실은 혀가 바싹 마를 정도로 침착하지 못했던 하은이었다. 때문에 주영 앞에서 더 과장되게 떠벌리며 화를 내는 척했다.
“어떡하니.”
하은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것은 역시 두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천진한 아이들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 걸까. 아니 어떻게 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걸까. 주영이 직접 말하겠다는 걸 괜히 말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주영이라면 아이들에게 너무 매정하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섰을 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말하는 게 낫겠지?’
음악과 바람이 도움되었던 것인지, 일단 당장 하은이 해야 할 일은 결정됐다. 차를 몰고 다시 도로 위에 오른 하은은 앞만 보며 달렸다. 당장의 일은 결정했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을 짓지 못했다. 마치 당장의 목적지인 오피스텔로 향하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미래 따위는 일단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도 되겠지.’
지금 당장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만약 그런 생각에 몰두하게 되면 자신도 재훈과 다를 바 없어진다고 여겨지는 탓도 있었다.
하은은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조금 빠르게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단유와 명수는 거실에서 하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라고 환하게 인사해주는 두 아이에게 미소를 지은 하은은 얼른 밥 먹자, 고 재촉해 식사를 시작했다.
“아, 아까 태호 형한테 전화 왔었어요.”
“매니저님한테?”
“회사 그만뒀대요.”
단유는 태호에게서 온 전화 내용을 일러주었다. 이미 주영에게 언질을 받은 터라,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갤럭시즈를 위해 세운 것이라는 사실은 단유에게서 처음 듣게 되었다.
“그럼 갤럭시즈로 다시 컴백하는 건가?”
“그런가 봐요. 수련 누나도 그 회사로 옮겼다네요.”
완전체로 컴백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는 태호의 말에 단유는 일단 축하의 말을 전하긴 했다.
“가디스R은?”
“그건 모르겠네요.”
태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들은 하은은 그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거니, 라고 넘기며 화제를 마무리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밥부터 먹어.”
이미 열심히 먹고 있던 명수는 물론이고 단유도 이후에는 특별한 대화 없이 식사를 끝냈다. 정작 말을 꺼낸 하은이 깨작거리며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명수와 단유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하은은 식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미안하다고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저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또 한 번 저 두 사람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함이 가중되었다.
하은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되도록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표현을 가려가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명수의 표정은 확실히 처연하달까, 슬프달까 그런 표정이었는데 반해 단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덤덤했다. 하지만 눈가의 주름이 살짝 잡힐 정도로 깜빡거림이 잦아지는 것을 보니 뭔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선생님은요?”
명수는 재훈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신 하은의 향후 거취에 대해 물었다. 아마도 하은까지, 모두 떠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을 느껴서 그런 질문을 했을 것 같았다.
하은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일인지라 아직 생각을 마치지 못했던 탓이다.
“난 너희들과 계속 같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해야 한다, 생각은 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같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해도 ‘일단’이라는 조건이 불안감을 안겨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이 아이들을 두고 떠날 생각은 아니었기에, 다른 옵션은 생각나지 않았다.
“선생님도.”
그때, 단유가 하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도 언제까지나 우리와 같이 있을 수는 없을 거야.”
단유의 말이 하은을 아프게 했고, 화나게 했다.
“우리가 보육원을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화가 났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 같아 슬펐다. 그래도 하은은 쉽게 말을 뱉지 못했다.
“선생님도 오늘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 그러면 선생님도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셨을 거 같으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하은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단유야, 명수야. 그래도 재훈 오빠, 너무 원망하지 말자.”
“원망 안 해요. 오히려 고맙죠. 지금까지 저희에게 해주신 것만 해도 평생을 고마워해야 하는데요.”
명수도 단유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다행이고.···그래도 너희가 나보다 낫네. 난 재훈 오빠의 결정이 잘 이해가 안 되거든.”
“···그 결정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봐요.”
“왜?”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잖아요?”
“이해심이 넓네, 단유는.”
“그런 건 아니고요. 이를테면 미로 풀기 같은 거예요.”
“미로 풀기?”
단유는 젓가락 끝으로 식탁 위에 뭔가를 그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복잡하게 그려진 미로를 푸는 문제요. 언뜻 보면 출발지에서 출구까지의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차분하게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출구는 찾을 수 있게 되잖아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출구까지 가는 길이 있듯이,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도 그렇게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당장 눈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출구로 나갈 수 없다고 단정할 순 없듯이, 당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은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보니까 우리 단유 다 컸네?”
“단유는 지금도 우리 중에서 제일 키가 큰데요?”
“분위기 깨고 있어.”
명수의 말에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은은 이 두 아이가 강한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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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방학이 끝나기 전, 에이바운스로 향했다. 오전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중으로 정산이 될 건데, 서류에 서명할 게 있어요.”
단유는 주영에게 전화를 걸어 이전에 계약할 때 도움을 줬던 변호사를 회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잘 지내지?”
라고 묻는 주영의 말에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전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네.”
“누나.”
“응?”
“혹시 이렇게 전화를 걸면 안 되는 건가요?”
“아니 안 될 건 없지. 아니, 자주 걸어.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그럴게요.”
단유는 간단하게 통화를 마치고, 회사로 향했다. 지하철을 이용해 가는 동안 사람들의 면면을 관찰했다. 몇 번이고 지하철을 탈 때마다 하는 관찰이지만, 그때마다 느낌은 매번 달랐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른 듯 같았고, 같으면서 달랐다. 무표정이라는 간단한 표현 앞에는 ‘다양한 감정들을 숨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옳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일을 겪으니 어느 누구 하나 같은 사람은 없을 테지만, 또 그 감정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는 드물어서, 하나같이 ‘무표정’으로 일관한 모습들이었다.
저 표정만 보고서 저 사람의 일생을, 생활을, 생각을 평가한다거나, 예측한다거나,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재훈 역시도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다. 저 사람들처럼 또 다른 무표정으로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길을 가듯이. 그러니 재훈을 오롯이 이해하지는 못해도, 납득하지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섭섭하긴 하지만, 비난할 정도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겠지.’
자신도 종종 표정 때문에 ‘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아무 감정 없이 사는 건 아니었으니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은 나름의 이유와 합리적인 과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남들이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듯, 자신도 남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니, 재훈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그 결정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회사에 도착한 단유는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전과 다른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단유는 변호사와 함께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하고 대리인의 자격으로 변호사가 서명하고 공증한 뒤, 정산을 받았다.
“앞으로는 그냥 통장으로 들어갈 테니까, 다시 올 필요는 없을 거야.”
이전에 봤을 때도 그렇게 생기 넘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할 일이 많아 죽겠다는 엄살을 부리던 사람이 지금은 할 일 없고, 귀찮기만 하네, 같은 표정으로 있으니 단유는 호기심이 들었다. 아마도 얼마 전에 태호에게서 들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사무실을 나온 단유는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변호사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뒤, 홀로 지하 연습실로 향했다. 4개의 보컬 연습실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 안무 연습실로 향하니, 갤럭시즈 멤버들이 자주 쓰던 ‘제 1 연습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단유는 그 안에서 거울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윤을 발견했다.
사람의 표정만 보고 사람을 이해하긴 어렵다고 했었나? 그러나 가끔 감춰진 감정이 드러나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해할 수 있을 때도 있었다. 그 경우가 바로 지금의 경우였다.
초점 잃은 눈으로 거울을 향한 나윤의 표정에서 단유는 ‘상실감’을 읽었다.
“여기 계셨네요.”
단유의 말에 나윤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초점이 조금씩 돌아오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저건 ‘민망하다’는 뜻일까?
“어, 어쩐 일이야?”
“정산받으려고요.”
“정산? 아, 음원 때문에?”
“네. 그런데 얼마 안 되네요. 솔직히 조금 기대했었는데.”
나윤은 단유의 말에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니가 나보다 낫네. 난 정산 받으려면···.”
힘이 빠지며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정산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하려 했는데, 그 순간 ‘정산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가디스R은 끝났어.’
그 말은 자신의 컴백도 불투명하다는 뜻. 만약 이 상태로 시간만 흐른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저기요?”
단유는 다시 초점을 잃기 시작하는 나윤을 불러 정신을 일깨웠다.
“응?”
“···식사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이제 점심시간이었다.
“아니.”
“그럼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
“왜?”
말한 뒤에야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 시비조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단유는 안개 속에서 빛나는 달빛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정산받았으니까요?”
나윤이 머쓱해 하지 않게 재치있게 받아친 단유는 나윤과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