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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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의 말에 수련과 나윤은 모두 경직된 얼굴로 태호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태호는 집을 나왔고, 수련도 흐느적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윤이 주방을 치우고 방에 들어간 뒤, 거실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 뒤, 수련은 물론 태호나 나윤도 그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말을 꺼내는 일이 없었다. 세 사람이 온종일 대화도 없이 움직이니, 함께 따라다니던 로드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도 덩달아 침묵에 동참했다. 불편한 동행이 이어지면서 각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저녁 행사 때문에 다시 숙소를 찾게 된 태호는 거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나윤을 발견하게 되었고, 나윤은 수련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아까 행사 끝나고 숙소 올라간 거 아냐?”
“뭐 좀 살 게 있다고 저 보고 먼저 올라가라길래.”
“너희 지금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되는 거 몰라!”
이제는 인지도가 없던 시절과 다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진이 찍혀서 인터넷에 화제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필요한 게 있어도 매니저가 대신 사다 주는 형편이었는데.
나윤은 이번에도 근처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러 간 거겠거니 생각했던 것인데, 시간이 지나도 수련이 나타나지 않아서 당황하던 차였다.
“전화는?”
“안 받아요.”
결국 행사까지 한 시간이 남은 상황에서 더 기다리지 못하고, 수련의 불참을 통보한 태호는 나윤만 데리고 차에 올랐다.
“샵 갈 시간 없으니까, 여기서 대충 얼굴만 하고, 도착해서 머리 좀 손 보자.”
스타일리스트는 나윤의 옆자리에 앉아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스타일리스트는 능숙하게 해냈고, 도착할 무렵 썩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게 꾸며졌다.
무대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나윤을 본 태호는 대기실을 나와 복도 한 편에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역시나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기랄.”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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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생각한 소속사 이야기는 홧김에 나온 말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이 급하게 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편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단유’였다. 아니, 단유 뒤에 있다는 ‘연성’이 먼저 떠올랐다.
솔직히 태호는 연성과 아무런 접점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유를 통해 주영을 만난 적도 있었기에, 어렵지만 부탁만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단유가 갤럭시즈를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이 단유를 잘 챙겨줬다고 생각했기에, 단유와 주영이라는 라인을 타고 올라가 작은 소속사를 만들 수 있게 도움을 달라고 부탁해 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는 만나기도 어려울뿐더러, 만나더라도 거절당할 게 분명해 보였기에 계획만 했을 뿐 실행은 꿈도 꾸지 않았다.
“자, 여기.”
박 이사가 내민 계약 해지 통보서를 보기 전까지는.
“뭡니까?”
“뭐긴. 갤럭시즈 계약 해지 통보서지.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여기 있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조항에 따라 정식으로 계약 해지를 하는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정말 이렇게 되는 겁니까?”
박 이사는 등을 돌렸고, 태호는 굽은 등을 펴지 못한 채 이사실을 나와야 했다.
“수영이니? 응. 나다. 어디, 집이야? ···잠깐 볼 수 있을까?”
태호는 전화를 끊었다. 회사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그 앞에서 수련을 만났다. 수련은 태호가 들고 있는 서류봉투에 눈을 주었다.
“뭐예요.”
“···들어가 있어.”
“뭔데요, 그거.”
“아무것도 아냐.”
수련은 날 선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수련의 눈빛은 계속 뇌리에 남아 태호를 자극했고, 결국 태호는 결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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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 장 태호라고 합니다.”
―알아요. 몇 번 뵀었잖아요? 단유가 도움을 얻기도 했고요.
“도움이라뇨.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았죠.”
주영과 통화를 하는 태호의 마음은 절박함 뿐이었다. 수영에게 건네줄 서류를 끝내 넘기지 못하고 잘 지내고 있어라,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로 헤어진 직후의 일이었다. 영업직을 뛰어보진 않았지만, 술 취한 친구들이 하소연할 때 들었던 것처럼, 절박하면 뭐든 하게 된다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주영의 번호를 누른 태호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주영과 약속을 잡은 태호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완벽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래야 모두가 덜 상처받고 빨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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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군.”
주영은 심드렁한 재훈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
좋게 말하면 재기가 넘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저 까불거림이 심한 정도인 평소의 재훈과 달리, 지금의 재훈은 어쩐지 흐리멍덩해 보였다.
“도와주실···건가요?”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비전이 확실하지도 않은 사업이 분명해요. 단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단유에게 도움이 될 일도 아니죠. 우리가 도울 어떤 명분도 찾기 힘드네요.”
“만약 도와주면?”
“좋아하겠죠. 그들이.”
“애들은?”
“네?”
“애들은 좋아할까?”
“···아마도요?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재훈은 손을 저었다. 그리고 소파에 더욱 깊게 몸을 묻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 곁에 서서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주영아.”
“네?”
“나, 이 짓 못 해 먹겠다.”
“네?”
주영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혹시 의사가 되는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걸까? 연성이란 타이틀을 과시하지 않고, ‘연재훈’이란 이름으로 인턴 면접을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어서,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겠다는 말일까?
“할아버지가 독일로 가라네.”
“네?”
“독일에서 해외 지사 하나 맡아서 머리 좀 식히라네.”
이번에는 되묻는 대신 재훈의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아니면 거기서 그냥 자리 잡고 살던가.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긴···너무 지긋지긋해.”
“선배.”
“아, 정말 이제는 안 되나 보다. 확실히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긴 있어. 그치?”
벌떡 일어난 재훈이 거실 창가 쪽으로 향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눈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재훈은 말을 이었다.
“알잖아, 넌. 내가 왜 병원을 지으려고 했는지. 왜 계속 그룹 안에 들어가지 않고 겉으로 나돌았는지. 기회를 잡으려고. 틈이 보이길 기다리다 기회가 오면 바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그런데 그냥 들어갈 수 없으니 준비를 단단히 해서 어지간한 공격에 당하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 너도 알잖아?”
물론 주영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런 이유로 안에 심어져 있던 사람이었고.
“그런데 틈이 안 보이네, 틈이. 확실히 우리 집안 사람들이 철두철미해. 이렇게 허술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도 경계를 늦추지 않잖아.”
오히려 더 정신을 쏟지 못하게 일부러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찌라시에 뿌릴 정도니까.
“할아버지가 더는 못 봐주겠나 보더라.”
“그럼···.”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어서 뭐하냐? 포기해야지.”
“의사는요?”
“그냥 시간 때우기였지, 뭐.”
하지만 주영이 보기에 분명 재훈은 과거의 재훈과 달랐다. 특히 단유나 명수를 만나고, 그들의 후견을 자처한 이후 조금씩 변했다. 그래서 재훈이 계속 의사를 계속하려고 한다고 믿었다.
“주영아.”
“네.”
“오피스텔 명의는 단유 앞으로 옮겨줘라. 세금 문제도 해결해 주고.”
“설마···.”
재훈은 큰 손바닥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깊이 막힌 숨골이 트인 듯 길게 숨을 토해낸 재훈은 주영을 돌아보았다.
“후견인 포기신청 내고, 난 그만할래.”
웃음을 짓는 재훈을 보는 주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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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정말입니까?”
태호는 전화기를 붙잡고 말했다.
“네, 네. 아뇨,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겁니다! 네!”
태호는 핸드폰을 끊고 주먹을 꽉 쥐었다. 주영이 기획사 설립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어렵다고 이야기했을 때, 실망감과 좌절감에 진흙탕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융자’ 형식으로 빌려주겠다는 말이 이어지며 태호는 100m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진흙탕을 벗어나 하늘 위로 도약하는 새가 되었달까?
태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씁쓸한 웃음과 함께 전화를 끊은 주영은 카페 바깥을 쳐다보았다.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지만, 재훈은 도와주기로 했다.
“이런 것도 지겨워. 내가 애들 후견을 보겠다고 했지, 지들 후견을 보겠다고 했냐고?”
찌라시에 돌던 소문도 못 들은 척, 그냥 지나가는 바람인 것처럼 넘겨버리는 것같이 행동했지만, 속으로 쌓이는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재훈 본인을 ‘돈’으로 보고 ‘사립 은행’ 정도로 여겼다. 그러니까 단유가 납치당하는 일도 생겼던 것이고, 자신에게 ‘투자’를 바라는 이상한 시선들도 늘어났던 것이리라.
“그냥 이걸로 털자.”
태호를 돕는 것은 사실 태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끊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있는 한 이런 제안은 수도 없이 들어올 것, 이라고 생각한다는 재훈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후견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래도 이거는 해주고 떠나자고. 그래야 애들한테 덜 미안하지.”
재훈은 집을 정리했고, 가정법원에는 ‘법정 후견인 포기 신청서’를 제출했고, 출국 전까지 연 회장의 집으로 들어가 있기로 했다.
상념에 빠져있던 그때, 카페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더니 하은이 나타났다.
“어이, 오랜만!”
방긋 웃으며 나타난 하은을 보며 주영도 손을 내밀었다.
“뭐니, 이게. 악수라도 하자고?”
“아, 미안. 습관이 돼서.”
“관두고. 뭐 마셨니? 아니면 뭐 시킬까?”
“너 마시고 싶은 거로.”
카페 안을 둘러보던 하은이 주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냐, 그 묘한 반응은?”
“······.”
“어라? 이것 봐라? 너 무슨 일 있어? 남자 생겼어? 고백했다 차였어? 아니면 회사에서 짤렸니? 에이 그건 아니다. 너처럼 열심히 일하는 애를 짜를 회사는 아니지. 아니면 큰 실수라도 한 거야? 시말서 같은 거 쓰고 그러나? 그거 반성문 같은 거 아니지? 학교 다닐 때 반성문 한 번 써본 적 없는 니가 그런 걸 쓰려면 고민 많이 되겠다.”
“그런 거 아냐.”
하은은 주영을 보다가,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그럼 뭔데?”
주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어렵게 재훈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하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하은은 탁자를 거세게 내려치며 말했다.
“그게 말이 돼? 갑자기? 그게 뭔데? 와, 그 사람 성격 고쳤나 했더니, 여전히 똘아이네. 내가 그래서 말했잖아, 그런 사람이랑 같이 있지 말라고. 그 사···아니, 그 새끼는 말이야, 전형적인 재벌 3세야. 위아래도 없고, 오직 저 혼자 사는 척하는 놈이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잘해줘 봐야,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 지 기분 내키면 그때만 좋은 사람인 척하는 그런 새끼라고. 내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내가 그 사람을 안 만나려고 했던 건데. 젠장.”
“···오피스텔은 단유 명의로 돌렸어.”
“진짜, 이렇게 끝?”
주영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가정법원에서 포기 사유가 정당치 않다고 신청 각하 결정을 내렸어.”
“뭐? 그럼 어떻게 되는데?”
“그래도 독일로 간대. 어차피 지금처럼 돈만 대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3년만 있으면 애들도 성인이 되니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후견인 자격도 말소가 될 테니까.”
“인간 정말···.”
“아무튼, 그래서 말이야. 넌 어떻게 할래?”
“나? 무슨 말이야?”
“내가 니 월급은 챙겨줄 수 있긴 해. 그러니까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괜찮고, 아이들한테는 좋을 수 있지.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를 거야. 지금까지처럼 전폭적인 지원 같은 건 없어질 테니까. 아마, 지금보다 돈이 줄어들 거야. 이모님도 더는 고용하기 힘들 거 같고.”
“···아주 관계를 끊겠다는 거네?”
“···응.”
“아주 씨발 놈이네.”
‘애들이 무슨 다마고친줄 아나’라고 씰룩거리며 뱉는 하은의 거친 욕설에 주영은 씁쓸한 미소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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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빠르게 움직였다. 흩어진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했고, 계획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망설였지만, 태호의 설득과 자신감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졌다.
“계약금은 못 줘. 미안하게도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난 꼭 너희들과 같이하고 싶다. 대중이 알아주지 않았다고? 아니야, 난 너희들이 꼭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 눈과 귀가 그렇게 말하니까.”
오글거린다며 눈물 글썽이던 명지가 주먹으로 태호의 등을 두들겼다. 지수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태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고마워요.”
수영은 한 걸음 뒤에 서 있다가 태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우리, 함께 가요.”
‘우리’가 된 멤버들과 태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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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게!”
박 이사의 책상에 날아온 서류는 ‘전속계약효력 부존재’ 소송에 관한 것이었다.
“수련이 어딨어?”
“숙소에서 벌써 짐 뺐던데요.”
“야! 지금 니가 그렇게 느긋하게 말할 처지야! 당장 나가서 찾아와!”
새로 매니저로 발탁된 남자는 박 이사의 호통에 헐레벌떡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 연습실에는 멍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는 나윤이 있었다.
“같이 갈래?”
수련은 그렇게 물었고, 자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난, 가야 돼.”
“언니.”
“너도 가자. 가서 같이 해. 우리같이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윤은 가지 못했다. 집에서도 반대했고, 자신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멍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습실 문이 열렸다.
“여기 계셨네요.”
단유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