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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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진 침실 안에 가득 들어찬 진득한 살내음을 지우려 재훈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냄새가 거북했던 것인지, 아니면 재훈이 일어나면서 흘러내린 이불 때문에 추위를 느낀 것인지, 옆에 누워 있던 여자가 살짝 몸을 떨었다.
재훈은 침대를 빠져나와, 여자의 위로 이불을 덮어준 뒤 거실로 나왔다. 살내음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거실의 서늘함이 다가왔다. 재떨이를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두고, 재훈은 천장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방 안에는 실습 기간 만난 여자 후배가 벌거벗은 채 누워있고, 저 멀리 또 다른 공간에는 자신이 후원해야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신, 새벽 잠이 없는 할아버지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몇 시간 뒤엔 주영이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테고, 또 그 후에는 그의 아버지와 형이 회사에 나가서 오전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친구는 가업을 이어받기 위한 경영 수업을 받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친구는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채로 호텔을 나서고 있을 것이다.
모두 다른 모습, 다른 형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뭘 해야 하지?’
할아버지의 도움 따위 필요 없어, 라는 건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처럼 혼자 일어서겠어요, 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어린 날의 치기가 지금은 부러울 정도다. 중간에 길을 잃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자는 생각에 그 힘든 의료실습도 버텼는데, 이제야 이런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할아버지가 일깨워준 덕분이라 하겠지만, 연 회장의 말이 나오기 전에 재훈은 자기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을 잔뜩 하고 있었다.
특히 다친 단유를 병문안 갔을 때, 재훈은 ‘책임감’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책임감을 떠안을 준비가 되었는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또래에는 벌써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친구도 있지만, 여전히 솔로인 친구들도 있었고, 솔로로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난 아직 가족을 책임질 자신이 없어.”
핑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저 지금 당장 여자가 없으니까, 혹은 그냥 인생을 즐기고 싶으니까, 라고. ‘책임감’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해본 적이 없었던 재훈은, 마치 자기가 그렇게 살아가듯, 그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대화를 나눈 여자를 집으로 끌고 들어와 침대에 눕히는 일을 할 때처럼.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모두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만 달라졌다.
‘아니, 실은 그 반대일지도.’
재훈은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꺼버렸다. 조금의 불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힘껏 비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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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
페널티 아크를 지나 골대를 눈앞에 둔 공격수가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골키퍼가 지키지 못할 빈 공간을 노려 오른발을 힘껏 휘둘렀다. 뒤에서 쫓아오던 수비수가 놓쳤다는 생각에 다리가 풀릴 때쯤, 단유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날아오던 공을 주먹으로 힘껏 쳐냈다.
“우와!”
단유의 슈퍼세이브에 수비수와 몇몇 상대 선수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잘하는데요?”
“그래.”
코치가 눈을 번뜩이며 단유를 보았고, 감독은 심각한 얼굴로 단유와 그 뒤의 플레이들을 지켜보았다. 대략 30분 정도의 플레이 타임 동안 단유가 보인 플레이는 꽤 주목할 만한 것이었고, 코치는 왜 저런 실력을 갖춘 아이가 축구부에 들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축구부 가입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려울걸.”
감독은 턱을 문지르며 센터라인을 지나는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왜요?”
외부초빙 형식으로 데리고 온 코치는 감독의 대학 후배였고, 그래서 장계중학교 내부 사정을 잘 몰랐다.
“쟤, 전교 1등 하는 애야.”
“···뭐가요?”
코치는 감독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공부요?’라고 물었을 때, 감독이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 했을 때, 코치는 ‘세상에 저런 녀석도 있구나’라고 중얼거리며, ‘그래도 트라이 해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1년 전에 물어봤었다.”
명수가 축구부에 가입할 무렵, 구경나온 단유가 같이 뛰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던 감독은 단유에게 권유했고, 단유는 거절했다.
“공부해야 돼요.”
그리고 감독이 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지난 1년간, 단유라는 녀석이 1학년 전교 1등을 매번 차지한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사실 축구선수가 되는 것보다, 공부 쪽으로 가는 게 훨씬 낫지.”
매일 근육통에 시달리고, 토가 나올 정도로 뛰어도 특출난 실력과 확실한 인맥이 없으면 주목받기 힘든 것이 프로축구 선수였다. 대한민국 베스트 일레븐에 꼽힐 정도의 선수가 된다면 모를까.
코치도 감독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입을 굳게 닫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어중간한 실력 때문에 중학교 임시 코치직이나 하는 수밖에 없는 미래를 저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는 어려웠으니까.
“뭐, 그래도 동아리 활동인데 한 번 물어나 볼까.”
코치는 감독을 째려보았다가 신경질적으로 기록지를 넘기며 투덜댔다.
“진짜 선배 변덕은 알아줘야 합니다.”
“변덕이 아니라 중학교 축구부 감독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인드야.”
그러는 사이, 명수에게 이어진 패스는 그대로 골키퍼의 빈틈을 노려 골망을 가르는 골이 되었다.
“이예!”
명수가 터뜨린 환호를 보며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가끔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제까지 겨울바람을 피하고만 있겠는가.
“그래도 골키퍼는 좀 그러네.”
단유는 팔뚝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황량한 겨울 산 위에 걸친 파란 하늘에 찢어진 솜뭉치 같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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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나고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온 단유와 명수는 하루 종일 심심해하던 하은과 수다를 떨며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감독님이?”
“네. 2학년 때 동아리 활동 삼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데?”
“할 시간이 없다고 했죠.”
단유는 자신이 축구부에 들어가는 게 민폐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우며 필사적인 아이들의 훈련에도 자신은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감독이 또 다른 말로 자신을 꾀려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래서 고집스럽게 ‘공부’를 핑계로 감독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주말에 가끔 같이 하는 정도면 되지, 뭐.”
그때, 벨 소리가 울렸고, 하은은 자신의 핸드폰을 집었다.
“여보세요? 아,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명수와 단유가 서로 쳐다보며 무슨 내용일까를 궁리할 때였다.
“수련 씨요? 아뇨. 연락 없었는데. 잠시만요. 혹시 수련 씨한테 연락 온 적 있었니?”
단유와 명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없다는데요.···네.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친 하은에게 명수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수련 씨가 안 보인다고, 혹시 우리 집에 온 건 아닌지 묻더라.”
“또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글쎄다.”
하은과 명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단유도 깊이 생각에 빠졌다.
‘지난번 수련 누나가 불안해 보이던데, 그 때문일까?’
연습실에서 눈물을 보이던 수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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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 꾹 눌러 참은 뒤 깊은 심호흡으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디 간 거지?’
“연락 안 돼?”
태호는 옆에서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나윤에게 물었지만, 나윤은 고개만 가로 저었다. 시계를 본 태호는 이를 악물었다.
“여보세요? 아, 저 에이바운스 장 실장입니다. 네, 다름이 아니고요, 저희 가디스R의 수련이가요, 지금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응급실에 갔습니다. 네, 그래서 불가피하게 금일 행사에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예. 아뇨, 불참은 아니고요, 나윤이는 갈 겁니다. 네. 혼자라도 잘할 수 있습니다. 가서 말씀드리는 것보다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네. 예, 죄송합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태호는 연신 굽신거리면서 통화를 한 뒤,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가슴 안쪽 포켓에 집어넣었다.
“가자.”
“저 혼자요?”
“···그래.”
어떻게요, 나 저 못해요, 같은 말은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윤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밴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태호는 눈짓으로 로드매니저에게 신호를 보낸 뒤,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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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할 필요 없어. 안 될 거니까.”
수련의 말에 나윤이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울먹거리듯, 화가 난 듯했던 수련의 목소리가 다시 이전처럼 나른하게 변했다.
“그렇죠? 계약 해지 후 소속사를 이전한다고 한들, 어느 소속사에서 저희를 받아주겠어요?”
소주잔을 빙글 돌리면서 안에 담긴 술을 보던 수련은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눈꼬리에 달린 눈물방울이 보였다.
나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려다가, 본심이 드러난다는 생각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자, 수련이 소주잔 대신 물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호가 느릿한 어조로 수련의 말에 답변했다.
“그래. 받아줄 소속사는 없지.”
“그리고 저도 이 회사에서 나올 방법이 없죠.”
다른 멤버와 달리 수련은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데다, 회사에서 놓아줄 리가 없었다. 안 되는 일이었고, 못 하는 일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무슨 방법을 생각했을까. 우리 태호 오라버니는.”
나윤이 보니, 수련은 이미 한계를 넘은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주를 들이키는 수련은 감정 기복이 심한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나른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비웃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흐릿한 시선으로 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잖아? 못 그만두잖아? 돈 벌어야지? 돈. 이제 오라버니도 돈 많이 벌 거잖아? 그치? 실장도 됐으니까 돈 많이 벌 거잖아. 괜히 우리 위하는 척하지 말고, 그냥 일해요, 일.”
수련의 말이 자극되었을까? 태호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들었다.
“말이 심하다.”
“심하긴? 이게 현실이지, 뭐. 출중한 능력을 갖추신 우리 박 이사님이 늘 하시는 말씀처럼 ‘현실을 깨달아라.’ 이거잖아. 안 그래요? 응?”
태호는 손바닥으로 오른쪽 눈을 꾹 누르며 비볐다.
“오빠도 정신 차리고, 나도 정신 차리고, 나윤이는···원래 똑똑하니까 우리처럼 방황하지도 않고. 좋네. 이렇게 가자고.”
꿀럭꿀럭 거리며 소주잔이 채워지는 소리가 들릴 때, 태호가 말했다.
“그깟 회사, 차리면 된다.”
소주 채워지는 소리가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