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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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명수가 우렁찬 목소리로 귀가를 알리자 집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실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호빵이 헥헥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단유가 그 뒤를 쫓아 떨어진 털을 찍찍이 롤을 이용해 수거해 나갔고, 하은이 방긋 웃으며 수고했다는 의미로 명수의 등을 팡팡 때렸고, 호빵과 하은의 집중 공세를 피해 명수가 도망 다녔고, 그런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이모님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샤워 후 머리를 덜 말린 채로 등장한 명수는 식탁에 앉자마자 밥그릇을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천천히 먹으란 말이 무소용이라 여길 정도로 기세가 대단해, 사람들은 못 본 척하며 각자의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 맞다. 단유야. 너 혹시 내일 시간 괜찮지?”
“괜찮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단정 짓듯 말해버리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까?”
“그건 그냥 넘어가고, 내일 같이 학교에 가자.”
“왜?”
“축구부 사람이 모자라서 대타 좀 뛰어달라고.”
명수의 말에 따르면 축구부원 몇 사람이 개인적인 문제로 연습을 못 나오게 되어서 사람이 모자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 있어?”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무슨 학원 가야 한다고 축구부 활동을 못 하게 하더래.”
하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치맛바람’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단유의 관심사는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근데 왜 나야?”
“내가 너 추천했거든?”
“날?”
“응.”
“왜?”
“시간이···, 아니 너 축구 잘하잖아.”
시간이 남아돌잖아, 라는 말을 하고 싶어 했음을 모를 리 없었지만, 역시 넘어가기로 했다.
“감독님이 아무 말씀 안 하셔? 아무나 써도 된다고 그래?”
그래도 춘계 대회를 준비 중인데 이렇게나 무성의하게 대체 선수를 뽑아서 연습을 시킬까?
“괜찮아. 어차피 우리끼리 연습하는 건데 수가 안 맞아서 그런 거니까.”
이후의 설명에 따르면, 11명 대 11명으로 연습시합을 가지고 싶어도 숫자가 맞지 않아서 10명 대 9명으로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는데, 그러다 보니 전술 연습도 제대로 되지 않고 시합을 하는 기분도 나지 않더라는 이야기였다. 한 명만 더 있어도 숫자가 맞으니까 나름 구색을 갖춰서 경기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명수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먼저?”
“응.”
입술 근처에 여러 개의 밥풀이 대기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란히 붙어 있다가 명수가 혀로 핥아내자 하나씩 차례대로 쏙쏙 사라져갔다.
“내 생각에는 니가 그냥 나를 써먹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써먹긴 뭘 써먹어? 니가 뭐 대단하다고.”
라고 하지만, 히죽 웃는 명수의 모양새는 그의 대답과 영 달랐다.
“잘됐네. 너무 집 안에만 있지 말고 잠깐 나가서 뛰는 것도 좋겠지.”
하은의 지원 사격이 있자, 명수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고, 몇 알의 밥알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아래로 낙하했다. 단유는 낙하지점을 확인하는 대신 숟가락을 놓고 물로 입 안을 헹궈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단유는 겨울에는 동면하는 곰처럼 밖에 잘 나가지 않는구나.”
“아침마다 나가는데요?”
“그건 빼고.”
그걸 왜 빼나? 그럼 논리가 전혀 안 맞는데?
“그쵸? 제가 봐도 그래요. 예전에는 겨울에 얇은 티 한 장만 입고도 잘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갑자기 겨울에 잘 안 나가더라고요.”
생각해보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겨울철에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물론 집안에서 공부에 집중하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어릴 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확실히 잘 나가지 않는 편이었다.
사실 두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한때는 겨울의 추위가 ‘추위’로 와 닿지 않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겨울의 차가움이 맨살에 와 닿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였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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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수련은 주방의 식탁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안주는 마른 육포가 전부였다.
“크으.”
소주잔을 비우고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고개를 들었을 때 텅 빈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북적거리던 거실이 휑하게 변한 현실이 이제는 눈에 익어버렸다. 드라이기를 찾으러 이방 저 방을 기웃거리던 명지의 모습도, 자기 드라이기를 선뜻 내주면서 카랑카랑한 웃음을 짓던 예영의 목소리도, 그런 모습과 별개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겠다며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던 지수와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내일을 준비하던 수영의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그게 눈에 익어버렸다.
철컥, 걸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나윤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수련은 대답 대신 소주병을 기울였다. 나윤이 조용히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갈 때, 다시 현관문이 열리며 태호가 들어왔다. 양손에 짐을 든 태호는 수련을 흘깃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또 술이냐?”
“···상관 마세요.”
“목 상한다.”
대답은 쓴 소주의 끝 맛을 느끼는 소리로 대신했다. 태호는 들고 있던 짐을 들어 나윤의 방에 넣어주고 다시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태호는 잠시 멈칫하고 고민을 하더니, 현관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리고 수련의 맞은편 의자를 뺐다.
“왜요?”
태호는 그 자리에 앉은 뒤, 수련의 잔을 뺏었다. 그리고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바로 술을 한 잔 더 따라서 마셨다. 그리고 다시 술을 붓더니, 잔을 수련에게 넘겼다.
수련은 가만히 술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잔을 붙잡고, 천천히 소주를 들이켰다. 비어버린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태호가 다시 잔을 가져다가 술을 붓고 마신 뒤, 다시 채워서 수련 앞에 놓았다.
그러기를 2번 정도 반복하니, 소주가 텅 비워졌다.
수련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더 마실래요?”
붉어진 얼굴을 하고 앉은 태호의 눈에는 살짝 핏줄이 선 것처럼 보였다.
“더 마실 거냐?”
태호가 되묻자, 수련은 일어나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들었다.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생기가 없다고 여겨질 표정으로 뚜껑을 따고 다시 잔을 채웠다.
태호는 찰랑거리는 소주잔을 노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잡아채고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혀끝에 남은 소주의 쓴맛을 침으로 희석시켜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뭘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냐고!”
태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음에도 수련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른한 표정, 권태로운 표정, 생기를 잃은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요.”
“젠장.”
태호는 거칠게 소주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수련은 막지 않았고, 태호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나윤은 몸을 돌렸다. 눈을 질끈 감아보지만,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저런 식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저 쓰린 속을 쓴 소주로 달래는 수련과, 뭘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미친 듯이 소주잔을 비우는 것밖에 없는 매니저였다. 두 사람 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상황에 직면하여 벌거벗은 민낯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그 모습은 위로가 아닌 상처였다.
언젠가는, 소주를 비우고 비우다 그 맛이 둔감하게 여겨질 정도로 감각이 없어질 때, 기억도 상처도 둔감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진 저렇게 쓴 소주 맛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눈물을 쏟아내고, 비명을 질러대고, 쓰러질 때까지 쓰린 속을 부둥켜안고 살아야 하리라.
“수련아.”
태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수련의 대답이 들렸다.
“네.”
“넌 포기할 수 있겠니?”
“······.”
“난 못하겠다. 못 할 거 같다. 이렇게는 안 될 거 같다.”
어쩌면 수련보다 더한 애착을 보이는 게 태호일지 모른다. 아니, 다른 멤버 모두를 합친다 해도 태호보다는 못할지도 모른다. 태호에게 갤럭시즈는 친자식 그 이상이었고, 그 이상의 믿음과 그 이상의 집착이 서려 있는 팀이었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우리.”
‘우리’란 말에 태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우리’란 말이 이렇게 와 닿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가슴에 콱 꽂히는 기분이었다.
“···없지는 않아.”
몇 번이고 입술을 짓이기다가 힘겹게 꺼낸 그 말에 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술김에 하는 말일까, 싶어 보지만 취한 듯해도 아직 눈빛이 형형한 태호였다.
“어떻게요?”
하지만 태호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혹시···.”
태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련의 말을 막았다.
“하지 마.”
‘여기서 하지 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는, 나윤이 같이 있는 이곳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나윤에게 너무 미안한 말이었고, 나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될 말이었다.
“뭔데요, 그게.”
수련의 시선이 태호 뒤로 옮겨졌고, 태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말씀해보세요. 그런 방법이 있으면···저도 알고 싶어요. 저도 돕고 싶어요.”
태호는 말하지 못했다. 수련도 입을 닫았다. 나윤은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쉽게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윤이 갤럭시즈를 돕고 싶다는 말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나윤 스스로는 지금의 성공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이대로 쭉 ‘가디스R’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지만, 또 한편으로는 ‘갤럭시즈’가 부활해서 선배 그룹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대 바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은···너무 힘들어.’
이기적인 년, 지밖에 모르는 년, 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윤은 두 사람을 향해 되물었다.
“방법, 알려주세요.”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자, 나윤은 태호 앞에 있던 술잔을 채갔다. 태호가 말릴 틈도 없이 나윤은 잔에 든 술을 꿀꺽 마셨다. 생애 처음으로 마시는 소주의 맛은, ‘독’했다.
“저는 알면 안 되는 거예요? 저도 수련 언니랑 같은 팀이잖아요? 수련 언니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 보기 힘들단 말이에요. 도와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어떻게든 같이 노력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거 아냐.”
수련의 대답이 꽤 차갑게 느껴져서, 잠깐 사이 달아올랐던 열기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수련아.”
“오빠. 오빠가 하려는 말, 정확히는 몰라요. 그런데, 짐작은 가요.”
“수련아.”
“근데, 그건···안 되잖아요. 못하는 거잖아요.”
안 되는 일이고, 못 하는 일.
“뭔데요, 그게. 왜 나만 빼고 그래요? 나는 알면 안 되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요. 왜 그래요? 이러니까 제가 무슨 따돌림당하는 기분이잖아요!”
울먹거리는 나윤의 목소리에 태호도 당황했다.
“아냐, 그런 거.”
“그럼 뭔데요!”
“계약 해지.”
“네?”
수련의 대답에 나윤의 눈물이 그쳤다. 그리고 동그란 눈으로 수련과 태호를 번갈아 보았다.
“맞아요?”
수련의 질문에 태호가 대답을 망설였다.
“계약 해지 후 소속사 이전. 그렇죠?”
태호의 대답은 없었지만, 나윤은 그 말이 태호가 하고 싶었던 말, 아니 생각하고 있었던 계획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차피 회사는 갤럭시즈 멤버들과 계약 해지를 진행 중에 있었다. 그렇다면 단체로 계약을 해지한 이후, 다른 소속사로 이전하여 똑같은 그룹으로 재데뷔를 하는 방법, 이 태호가 계획했던 방법일 테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할 경우, 태호 역시 회사에 사표를 내고 같이 옮겨간다는 계획인 것 같았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건, 수련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갤럭시즈의 메인보컬은 수련이었으니까. 그런데 만약 수련이 계약을 해지하고 옮긴다면?
‘나는?’
나윤은 멍한 눈으로 수련을 바라보았고, 수련은 고개 숙인 태호를 바라보았으며, 태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가볍게 놀린 자신을 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