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30화 (330/956)

구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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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들을 되짚어 보아도 단유가 본인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기껏 해봐야 ‘너 커서 뭐 될래?’라는 물음에 ‘뭐든 되겠죠’ 라든가, ‘잘 모르겠는데요’ 라는 식의 싱거운 농담 같은 대화만 있었을 뿐이었으니.

“내가 모든 전공을 다 겪어본 적이 없어서 정답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의 질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 학문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확실히 대학에서 공부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봐.”

“학문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요?”

“그런 말이 있지?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취업을 위해서라면 어중간한 전공을 선택해서 대학을 가느니, 차라리 안 가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어차피 회사를 위한 자격증 삼아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것일 뿐이니까. 그런데 같은 의미로 이 자격증이 없으면 좋은 직장, 또는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 때문에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거고.”

단유는 의미 없이 펼쳐져 있는 수학 교과서를 덮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대학을 가느냐 마느냐의 명분은 방금 말한 것에 따라 결정될 수 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고려해볼 때는 또 다른 변수가 있지. 대표적인 경우가 등록금일 거야. 뉴스에서 보면 그러잖아? 사회 초년생이 해결하기에 부담스러울 정도의 빚을 떠안고 시작하는 청년들이라고. 아르바이트로 해결하기 힘든 금액인 건 물론이고. 누군가는 그러지. 투자라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열심히 일해서 갚으면 되지 않느냐고. 시작하기도 전에 불평만 늘어놓는다고.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경우가 있어. 요즘은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영업직 사원들에게 비싼 차를 사게 해놓고 벌어서 갚게 한다는 이야기. 운동선수도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동기 부여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더라? 만약 잘되면 비싼 할부 다 갚고 원하는 차를 얻는 최상의 결과겠지만, 안 되면 전부 빚으로 돌아오는 거잖아? 사람들이 그런 관행에 대해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하곤 했었는데, 지금 대학생들이 바로 그런 꼴이야.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서 갚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꼴이.”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하은은 단유의 신호를 캐치하지 못했다.

“또 다른 현실의 벽으로 느끼는 게 바로 최근의 취업난이지. 기성세대에 비해 많아진 인구 탓이라고도 하고, 힘든 일을 하기 싫어하는 청년들의 나태함이라는 비판도 있지. 하지만 결국은 늘지 않는 일자리가 문제인 거야. 과거의 예처럼 무지막지한 성장률을 보이던 시대도 아니고, 기업의 확장도 한계가 있는 데다가, 정년 퇴임이 늦춰지면서 기업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인력의 한계가 온 건데 말이다. 그리고 등록금 이야기할 때 말한 것처럼, 이미 빚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고급 백수들이 어떻게 빚을 해결할 수 있을까? 좋은 직장, 혹은 고소득 직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런 직장들만 찾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놓고, 놀기 좋아한다느니, 정신이 어떻다느니 말하는 인간들은 정말 제정신인 거야, 뭐야?”

단유는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다. 처음에는 상담해줄 것처럼 보이던 ‘선생님’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어느새 친구와 수다를 떠는 평소의 ‘하은’으로 변해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역시 하은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이 분명했다. 방학인 데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 밖을 잘 나가지 않는 단유 덕분에 그런 성향이 많이 줄었다지만, 또 이렇게 말이 길어지고 있다 보니 듣는 사람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는 이모님도 하은을 슬슬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이는데, 쓸었던 곳을 또 쓸고, 닦았던 곳에 한 번 더 걸레를 가져다 대보는 이모님의 뒷모습이 자주 보였던 이유랄까?

“뉴스 보면 대학 들어오자마자 공무원 시험 준비하겠다고 도서관에 들어간다는 사람 이야기 있잖아? 우리 때도 그런 애들이 있긴 해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거든? 요즘은 개학 첫날부터 도서관에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꽉꽉 찬다며?”

모르죠. 가보질 않았는데.

“누구는 그게 영리한 선택이라고 하는데, 진짜 그런 이유라면 굳이 대학을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고. 비싼 등록금 내면서 어디서도 쉽게 듣기 힘든 높은 수준의 학문 강의를 들으면서, 정작 취업은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곳으로 가려 하다니. 그게 시간 낭비고 돈 낭비 아니니?”

그러니까, 모른다니깐요?

“대학 축제 때 도서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시끄럽다고 말하는 애들 말이야, 난 이해가 안 돼. 시끄러운 게 축젠데, 시끄럽게 하지 말라면 조용한 곳을 찾아가든가, 아니면 시끄러운 걸 감수해야지. 아니면 지가 뭔데 축제를 하라 마라야?”

잘은 모르겠지만, 저건 분명히 하은 개인의 경험담이 섞인 사연인 게 분명해 보였다. 유난히 열을 내는 모습이 그랬다.

“선생님.”

“응?”

“선생님 생각에는 제가 대학을 가는 게 좋을까요?”

“갈 수 있다면 가는 게 좋다고 본다, 나는. 넌 똑똑하고, 학구열이 뛰어나고, 특히 지식욕이 많은 아이니까. 더 많은 지식과 학문들을 배울 기회를 하찮은 이유로 팽개칠 아이는 아니라고 보거든. 취업은 그다음 문제고. 일단 대학이란 영역의 순수한 의미를 되새겨 보자면, 넌 꼭 대학에 들어가야 하겠지.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역시 현실을 고려해보면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 물론 니가 등록금을 걱정할 필요는 없고 말이야.”

“왜요?”

“왜긴? 재훈 오빠가 있는데, 니가 등록금 걱정을 왜 하니? 설마 그것도 부담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단유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생에 반칙이 있다면 재훈이 형 같은 사람이 반칙일지도.

****

“명수야!”

빈 공간을 노리고 달려드는 명수를 본 팀원에게서 패스가 이어졌다. 동시에 명수를 막으려고 달려들던 상대 팀 수비수 역시 공을 향해 달렸다.

먼저 도착한 것은 명수였고, 몸으로 위치를 잡은 뒤 등으로 상대 수비수를 막았다. 그리고 날아온 공을 가슴으로 받아 땅으로 떨군 뒤, 지체하지 않고 능숙한 발재간으로 공을 다뤄 수비수를 제쳤다.

제쳐진 수비수가 중심을 잃고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명수에게로 달려들 때, 명수는 페널티 에리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페널티 아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최종 수비수 역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듯 달려들었고, 명수는 앞뒤에서 수비수들에게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전개를 처음부터 지켜보던 감독은 날카로운 눈으로 명수를 지켜보았다. 명수는 평소의 활발함과 가벼움을 잊게 할 만큼 축구장 위에서 진지한 선수였다. 건성으로 훈련을 받는 것 같지만, 날이 다르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선수 중 한 명이었고 그래서 감독이 눈여겨보는 신입생 중 하나였다.

처음의 계획대로라면, 지난 추계대회 때 큰 대회 경험을 한 번 쌓게 해주고 싶었다. 단순한 동정이나 편애로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장계 중학교 축구부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유소년 축구 클럽에는 발 한 번 내민 적 없는, 순수하게 초등학교 운동장 축구만 하던 소년임에도 실력이 뛰어난 이였고, 발전이 빠른 아이였으니 집중적으로 길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불행한 사고와 그로 인한 추계대회 결장, 그리고 오랜 연습 불참이 불안한 마음을 들게도 했지만, 연습에 다시 참여한 직후 그런 불안은 말끔히 씻겨 내려갔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기대를 품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는 명수였다.

‘균형감각이 좋아.’

상하가 고르게 발달한 몸과 후천적인 노력과 선천적 재능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트래핑 실력이 저런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휘했다. 최종 수비수 앞에서 오른쪽으로 한껏 기울여진 명수의 다음 행동은 분명 오른쪽으로 빠져나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이 먼저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수비수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뒤따라 명수의 몸이 용수철처럼 왼쪽으로 퉁겨지듯 빠져나가니 이미 몸의 중심을 잃은 수비수들은 명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말은 어렵지만, 결국 가장 간단한 페이크 동작과 드리블의 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동작도 명수의 훌륭한 바디 컨트롤이 섞이면 저렇게 가볍게 상대를 제치고 나아가 슛을 쏠 기회까지 만들어 주었다.

감독은 순간적으로 박수를 칠 뻔했지만, 움찔하는 정도에서 참을 수 있었다. 겨우 연습경기일 뿐이고,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인데 감독이 체통을 잃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좋지 않으리라 판단한 탓이었다.

“명수, 나와. 재진이 들어가고.”

그래도 부상에서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명수였기에 최대한 관리를 해줘야 했다.

“조금만 더 뛰면 안 돼요?”

헉헉거리면서도 더 뛰고 싶다는 명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려 보는 정도는 괜찮으리라.

“나중에. 대회 나가면 뛰기 싫어도 뛰게 해 줄 테니까.”

춘계 대회 예선전은 이제 한 달이 남았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되리라. 명수는 장계 중학교 축구부 에이스니까.

****

연초라서 행사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지역 행사와 몇몇 기업 신년회 행사에 초대되어 가는 경우가 있었다. 보통은 특정 장르, 예를 들어 트로트 같은 장르의 가수들이 섭외되곤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라 요즘은 여러 장르를 섞어서 무대를 연출하곤 했다. 트로트 가수 한 명, 발라드 가수 한 명, 인기 아이돌 한 팀이 기본 세트처럼 꾸며지고, 여기에 합창단 혹은 중창단, 또는 민속 공연 등의 특별 공연이 곁들여지곤 했다.

이런 자리에 신인 아이돌 그룹 ‘가디스R’이 초대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난 연말부터 시작해서 감히 ‘대세’ 신인 그룹 타이틀을 얻은 그룹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오늘 수고 많았다.”

행사에서는 보통 두 곡이나 세 곡을 불러야 하는데, 싱글로 데뷔한 ‘가디스R’은 신곡 하나와 팝송 하나, 그리고 과거에 히트한 대중가요를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팝송과 리메이크곡은 라디오 출연 시에 불렀다가 반응이 좋아서 행사에서도 종종 부르게 된 곡이었다.

하지만, 갤럭시즈의 곡은 부르지 않았다.

“나윤이 너도 오늘은 괜찮더라.”

말이 없는 수련 대신 나윤에게 칭찬을 덧붙이는 태호였다.

“고맙습니다.”

나윤 역시 건조하게 대답을 하곤 몸을 의자에 깊게 묻었다. 그래 봐야 딱딱한 시트 때문에 몸을 숨기기도 힘들지만.

“모레는 행사가 두 개야. 오전 오후로 있는데, 오전에 대전을 가야 하니까 8시까지 숙소로 데리러 간다.”

“내일 이야기해요.”

수련의 대꾸에 태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운전석 옆에 앉은 태호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미간을 좁히며 깊은 골을 만들어 냈으리라, 예상해보는 나윤이었다.

“내일은 레슨만 받으면 된다. 점심 먹고 회사로 2시까지 출근하면 되니까,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과거와 달라진 또 하나는 어딜 가든 태호가 데리러 온다는 점이었다. 갤럭시즈 때는 회사로 출근하는 길은 각자에게 맡겼었지만, 이제는 그 짧은 거리도 밴으로 오고 가게 되었다.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어.”

음흉하게 느껴지던 박 이사의 말이었다. 수련은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귓가에 남은 것 같아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각자의 생각에 빠진 터라 조용해진 차 안의 서늘한 분위기가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나윤이었다.

“아, 나윤아.”

검게 선팅된 밴의 바깥을 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들을 세어보던 중에 태호의 물음에 나윤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수첩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던 태호가 말을 이었다.

“너 예능 하나 잡혔어.”

굳이 그 이야기를 왜 지금?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시선이 저절로 수련에게로 옮겨졌다.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수련을 확인하고 얼른 태호에게로 시선을 돌린 뒤, 물었다.

“언니는요?”

“너만.”

괜히 물었나.

“별로 할 거 없어. 그냥 적당히 리액션만 하다 오면 되는 거고. 대신 리액션은 좀 과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카메라에 자주 잡힐 테니까.”

‘얼굴마담’이라는 걸까? 연습생 때, 가끔 예능을 보면서 얼굴마담 역할 하는 아이돌들을 보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 말 한마디도 안 할 거면 거길 왜 나가, 라고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얼굴마담이라도 해서 얼굴을 알리고, 이름을 알려야 했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참 묘해서, 데뷔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그다음에는 이왕 한 김에 사람들에게 기억될 정도로 많이 순위가 높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랬더니 이제는 가요 프로에서 1등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인 걸까.’

1등을 하면, 지금의 힘겨움과 짜증과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다음 주 월요일 촬영이니까, 그 전에 다시 한번 미팅해서 이야기할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 둬.”

“근데, 무슨 프론데요?”

“그냥 토크 예능 쇼야.”

태호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후, 수첩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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