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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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이 할애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할애비가 그래도 나름 성공한 축에 들지 않았느냐?”
‘나름 성공한 축’이라고 표현하기엔 이룬 것이 너무 거대했다.
“하지만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는지를 아느냐?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자리였다.”
“······.”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는 것은 욕심이고, 욕심쟁이는 성공하지 못한다. 고작 성공했다고 외쳐봐야 욕심쟁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성공은 포기를 대가로 피를 흘린 뒤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당시에는, 포기해야만 했던 그 순간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땅을 쳐야만 했고, 후회하기도 했다.”
“지금도···후회하십니까?”
“후회라···. 그런 것 같지는 않구나. 그런 과정이 있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눈으로 웃음을 짓는 연 회장의 말은 진심이리라.
“지금 하시는 말씀은, 제게 포기하란 말입니까?”
‘무엇을’이라는 목적어는 빠졌지만, ‘성공’이란 목표를 상정하고 나누는 대화였기에 ‘무엇’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럴 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모두 너의 선택이고, 너의 결정이다.”
‘선택’과 ‘결정’이라는 단순한 용어도 심상치 않게 들렸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결정하란 말일까?
“의사, 할 거냐?”
몇 분 전, 연 회장이 물었던 똑같은 질문에 재훈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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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고 들으면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소리처럼 들리고, 후각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육향(肉香)과 침샘이 폭발할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육즙이 올라오는 고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명수의 허기진 손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 돼, 덜 익었어.”
단유가 사전에 명수의 젓가락질을 막으며 주의를 줬다.
“이 정도는 다 익은 거 아냐?”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먹어.”
그런 단유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명수는 초조해서 연신 한쪽 발을 덜덜 떨어댔다. 명수는 보기 좋게 구워지는 고기에 시선을 던졌다가 맞은 편에 앉은 상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나씩 먹기다.”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상미 역시 고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럴 때 보면 둘 다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것 같았다.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기 한 점을 뒤집었다가, 보기 좋게 익었음을 확인한 후 가위로 먹기 좋게 썰었다.
집게에 들려 있던 고기가 가위질에 썰려 불판 위로 떨어질 때, 총성 없는 신호라도 들린 것처럼 양쪽에서 날 선 젓가락들이 달려들었다. 순간적인 반응은 명수가 빨랐지만, 젓가락질은 상미가 더 능숙했다.
명수의 젓가락이 고기를 집었을 때, 상미의 젓가락이 달려와 명수의 젓가락 하나를 세차게 쳤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순간적인 충격이 젓가락을 붙잡고 있던 손가락 힘을 약하게 만들었고, 다시 고기가 불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상미는 매우 놀랍고도 간결하게 젓가락을 내려 떨어지는 고기의 위를 집는 대신, 날카로운 끝으로 고기를 찔러서 시간 낭비를 줄였다.
명수가 반격의 젓가락질을 하기도 전에 고기는 상미의 입으로 들어갔고, 상미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단유의 가위질이 계속될 때마다 고기가 한 점씩 불판 위로 떨어졌고, 떨어진 고기들은 따뜻한 불판의 온기를 느낄 틈도 없이 사나운 포식자들의 흉기에 찔려 사라져갔다.
“천천히 좀 먹어라. 그러다 체해.”
고기 한 접시를 더 가져다주던 사장님이 명수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미 양 볼 가득히 고기를 채워놓고도 지기 싫어서 젓가락을 들고 틈을 노리던 명수는 상미와 불판을 번갈아 보면서 집중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명수 너 수고 많았다. 아, 콜라 줄까?”
단유가 대신 대답했다.
“제가 가져갈게요.”
단유가 집게를 놓아야, 불판에도 평화가 찾아오리라. 단유가 콜라를 가지러 간 사이, 아저씨는 자리 하나를 가지고 와서 명수 옆에 앉았다.
“들어보니까, 너 대회 나간다며?”
입안에 든 걸 우물거리느라 발음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의사를 전달할 수는 있었다.
“네. 봄에 대회가 있는데, 예선전을 다음 달부터 한다고 해서요. 아마 그때부터는 나오기 힘들지도 몰라요.”
“니가 안 나오면, 우리 팀 골은 누가 넣어주나?”
“아저씨가 넣으면 되죠. 저기 대리 아저씨가 넣어도 되고.”
“김 대리 그 양반은 아직 안 되지. 포지셔닝이 너무 약해.”
“그래도 빠르시잖아요? 안쪽으로 길게 찔러 주면, 기회가 생길 거 같은데요?”
“그럴까? 그런데 트래핑도 약해서 그렇게 찔러줘도 제대로 컨트롤을 못하면 슛을 못 하잖아?”
“요즘 보니까, 시합 전에 연습하실 때도 트래핑 위주로 연습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래? 나도 내 공 차느라고 안 봐서 몰랐네? 그럼 이제 김 대리를 위로 올려야 하나?”
“그건 좀 위험하죠. 아저씨 말대로 포지셔닝이 아직 안 좋으신 데다가 치고 들어가는 공격에 능한 분을 위에 두면 효과가 덜하잖아요? 그 아저씨는 계속 지금처럼 미들에 두시고, 아저씨가 옆에서 가운데로 오시면 되지 않을까요?”
상미의 대답에 아저씨가 그렇게 해 봐야겠다며 웃음을 지었다.
“넌 할 줄도 모르면서 입만 살았어.”
“야, 내가 모르긴 뭘 몰라? 맨날 나한테 지면서.”
“야, 그건 게임이잖아. 진짜로 하면 넌 나한테 상대도 안 돼.”
“아이구, 잘나셨어요. 그래서 여자한테 이기면 기분 좋냐?”
“웃기시네. 이럴 때만 여자냐?”
“그래, 이럴 때만 그런다, 어쩔래?”
단유는 콜라를 각자의 컵에 따라 건네주며 말싸움을 말렸다.
“조금 있다가 집에 가서 한 번 붙자. 내가 오늘은 꼭 이겨주고 말겠어.”
“야, 니가 아무리 현실에서 잘해도, 게임은 내가 선배야.”
“아우, 정말.”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과 상관없이 단유는 계속 고기를 굽고, 자르며 조달했고, 단유의 공급이 넘치지 않도록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간간이 입안에 넘쳐서 들어가지 않을 때, 쌈을 사서 단유의 입에 넣어주는 여유도 부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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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다 될 무렵 눈을 뜬 나윤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조용한 거실은 언제나와 같이 텅 비어 있었다. 좀비 같은 몰골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주방을 향한 나윤은 먼저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보통은 가습기를 틀어놓고 잠을 자는 게 좋겠지만, 어머니가 ‘가습기 쓰지 마라’고 하셔서 가습기 대신 젖은 빨래를 방에 널어두고 자는 나윤이었다.
그러나 가습기보다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겨울이라 더 건조한 방 안 공기에 목이 빨리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물을 먼저 찾게 되는 나윤이었다. 물을 마신 뒤, 낮은 소리로 허밍을 하며 목을 풀어준 나윤은 고개를 두어 번 꺾으며 굳은 근육을 풀어주고, 다시 거실로 나섰다.
조용한 숙소의 짙은 적막감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숙소로 왔던 초기에 느꼈던 어색함과는 완전히 다른, 곱절로 무거운 쇳덩어리 바닷속을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다른 방의 문 경첩에서 비명 같은 기성(奇聲)이 나오더니 열린 문틈으로 수련이 고개를 내밀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인 수련은 꾹꾹 눌러서 도저히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물 좀.”
나윤은 언제 흐느적거렸냐는 듯,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컵에 담아 수련에게 바쳤다.
깊은 산 속 시원한 옹달샘을 만난, 20년 심마니 업에 종사 중인 중년의 그것과 같은 목소리로 트림을 한 수련은 잠이 덜 깬 눈으로 나윤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나윤은 자신이 왜 일어났던지 떠올려보다가 생각해냈다.
“아, 조금 있다가 레슨 있어요.”
“무슨 레슨?”
“안무 레슨, 이라고···.”
나윤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레슨은 수련도 같이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전날 태호가 일러주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수련은 전혀 들어본 적 없다는 눈으로 나윤을 보며 껌뻑거렸다.
“몰라, 나는 더 자야겠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술 때문에 속이 부대껴 눈을 뜬 차에 나윤을 보고 물을 부탁했던 수련은 다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윤은 닫힌 문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대충 세면도구를 챙겨 욕실로 들어간 나윤은 클렌징으로 얼굴을 문지르다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하아.”
이런 걸 기대했던 게 아니었는데,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윤은 그야말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셈이었다. 중소기획사 출신 가수들 중에서 데뷔하자마자 이렇게 격렬한 호응을 받은 사례가 있던가? 데뷔와 동시에 많은 팬들이 만들어졌고, 음원 성적도 좋아서 회사는 물론, 가족들도 모두 환호성을 질렀었다.
음악 방송 외에 다른 방송에서도 ‘화제의 신인’으로 불리며 출연했고, 방송이 낯설었지만 수련의 도움으로 큰 실수 없이 막방 활동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데뷔만 하면 된다, 고 생각했던 연습생 때의 목표 이상으로 높은 성적을 거둔 탓에 앞으로 꽃길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막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갤럭시즈 멤버 대부분이 숙소에 있다가 자신들을 반겨주곤 했었는데, 그날은 텅 빈 숙소가 자신들을 반겼다. 그래도 그때는 피곤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음 날 인터넷에 오른 기사를 보고 사정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불편해졌다.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났었는지, 막방 다음 날 오후에 잡혀 있던 행사에서 나윤은 처음으로 노래를 부를 때 실수를 했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사람들은 ‘많이 지쳤나 봐요’라고 위로했지만, 태호에게서 크게 혼이 나고 말았다.
“가수가 무대에서 집중을 안 하니까 그런 실수를 하는 거잖아!”
태호가 평소와 달리 신경질적이라고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의 실수가 더 크게 느껴져 달리 변명은 하지 못했다.
이후의 행사에서는 실수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더 답답해졌고, 지쳐갔다. 표정은 웃어야 하는데, 그 뒤에서는 슬픔, 미안함, 자책과 비난이 오갔다.
사람들은 화려한 면을 보며 박수를 쳐 주지만, 자신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혼자 삭혀야만 했다.
수련은 나윤처럼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밤마다 술을 마셨다. 그래도 여러 행사를 다녔던 경력이 한몫해서인지 무대 위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고, 태호도 수련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수련 역시 태호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지만.
나윤은 잡념을 털어버리려는 듯 거친 손길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얀 거품이 얼굴을 뒤덮었다. 하얀 거품으로 얼굴을 모두 가렸지만, 슬픔이 가득한 눈만은 가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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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맞나요?”
“맞아. 이제 이 정도쯤은 쉽게 풀 수 있나 보네.”
한동안 정체되었던 단유의 수학 실력이 하은을 만나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여러 지식에 대한 갈증 때문에 잠시 손을 놓기도 했었지만, 하은이라는 뛰어난 선생님 덕분에 단유는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은 훨씬 뛰어넘겠는걸?”
수Ⅱ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한참 전이었지만, 이제야 거의 전 범위를 학습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기하와 벡터 부분은 하은이 깜짝 놀랄 정도의 수준으로 이해도와 계산이 빨랐다.
“가끔 수학 외에도 특정 과목의 특정 부분에 장점이 보이거든?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전공을 미리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은은 단유의 대입까지 생각하며 조언을 했다.
“선생님.”
“응?”
“대학, 꼭 가야 하는 건가요?”
단유의 질문에 하은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왜? 가기 싫어?”
“가기 싫다기보다는 과연 대학을 가는 것이 제게 유리한지를 모르겠어서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냥 뉴스 같은 거 보면, 대학을 가도 취업이 되지 않느니, 비싼 등록금 때문에 공부가 하기 힘들다느니 하잖아요?”
취업이 되지 않는 대학 교육의 질에 대한 고민, 비싼 등록금이 매년 매 학기 뉴스 꼭지를 차지하는 현실적 고민이 단유가 가진 갈등의 원인이었다.
하은은 모처럼 신중하게 이 문제에 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