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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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지하 연습실에서 남아 연습하고 있는 연습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수련을 데리고 연습실로 내려왔다.
“오빠, 저희···정말 해체하는 거예요?”
「활동 중단」이라는 기사는 ‘해체’와 다를 바 없었다. 계약 기간이 남은 문제와 ‘수련’이라는 멤버가 속한 탓에 바로 ‘해체’를 선택하지 못했을 뿐, 해체는 기정사실이 된 셈이었다.
“나도 방금 알았어.”
연습실의 적막이 태호의 목소리까지 잡아먹은 것처럼 음울한 느낌이었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는 수련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태호는 수련의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각자의 슬픔을 담아내고 있을 때, 단유가 내려왔다.
“어? 단유야?”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 인해 ‘단유’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태호가 당황스러워했다.
“무슨 일이세요?”
수련은 고개를 숙인 채 울었고, 태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네.”
지금 상황에서 계약 운운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여겼고, 태호는 우선 단유를 돌려보내려 했다.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한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어?”
단유는 수련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몸을 작게 움츠린 채 울고 있던 수련 앞에 다가간 단유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수련을 바라보았다.
“누나.”
단유의 나직한 부름에도 수련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단유는 수련이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수련에게서 보이는 절망감과 슬픔은 잘 알 수 있었다. 마치 목소리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그것과 같다고나 할까.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가 길 한복판에서 우는 모습이랄까.
아주 예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억 속에 생생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홀로 되었던 그 날의 자신의 모습과도 같다고나 할까.
“포기하지 마세요.”
단유의 말에 수련은 물론 태호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찾아보면, 분명 길이 있을 거예요.”
수련은 젖은 눈으로 단유와 시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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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매정한 시어머니보다 더한 싸늘함으로 볼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나마 눈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지만, 이렇게 차가운 바람과 싸워야 하는 거라면, 하루쯤은 운동을 미뤄도 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이 정도 쯤으로 악으로 버텨야 진짜 사나이라고.”
명수가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힘껏 올려 철봉 위에 간신히 닿는가 싶더니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 차거.”
손을 비비는 명수의 손바닥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미련하게 그러지 말고, 장갑을 껴.”
“악력을 기르려면 맨손으로 해야 한다고 했어.”
“니가 농구선수도 아닌데, 악력을 왜 길러?”
“······.”
명수는 상미가 내민 장갑을 낀 뒤에도 장갑 밑으로 입김을 불어 넣는 시늉을 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가야겠다, 너.”
상미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조기 축구회 모임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지난 방학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조기 축구회 활동을 하게 된 명수였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고깃집 사장님이 먼저 제안을 했다.
“그래? 단유야, 가자.”
옆에서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던 단유가 몸을 펴며 일어섰다.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을 뿐인데도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하얀 김으로 변해 단유를 감싸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신기하다. 땀은 안 흘리면서, 몸에서 저렇게 열이 나네?”
상미가 단유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면서, 마치 감자가 익었는지 살펴보는 사람 모양으로 단유를 살폈다.
“그만하고, 가자.”
단유는 호흡을 정리한 뒤, 곁에 두었던 잠바를 손에 들고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단유야. 연락해봤어?”
명수는 며칠 전 인터넷에 올라온 갤럭시즈의 활동 중단 기사를 언급하고 있었다. ‘누구?’, ‘듣보잡’, ‘이게 뭐?’ 같은 댓글만 4, 5개 달렸을 뿐인 그 인터넷 기사는 곧 다른 것들에 조용히 묻혔다. 하지만 명수를 비롯 갤럭시즈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나름 호기심을 자아내는 기사였다.
‘충격’까지는 아니었다. 솔직히 가요계에서 ‘갤럭시즈’의 위치를 고려하면 언제 해체해도 무리가 아닌 팀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나마 활동 중단 기사도 ‘가디스R’의 성공 때문에 기사화된 것이지, 아니면 ‘기삿거리’가 되지 않을 내용이었다.
“연락 안 되더라.”
어차피 가디스R도 공식활동은 마감한 상태라 수련이나 나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누나들, 지금 많이 힘들겠다.”
“···그렇겠지.”
상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 없을까?”
그 말에 단유나 명수는 입을 다물었다. 명수는 혹시 그런 방법이 있을까 싶어 궁리하느라 입을 다물었지만, 단유는 다른 의미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음악은 할 수 없어.’
가디스R의 성공도 단유가 보기에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단순히 자신의 예상치를 뛰어넘은 성공이라서 그 결과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과 별개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마케팅이 효과적이었기에 부가적인 효과가 발휘된 것뿐이며, 실제로도 지금 가디스R의 리모트는 공식활동이 끝나자마자 곧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끔 길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빈도를 따지자면 확연히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당초 박 이사는 그들을 아티스트로 봐줄 생각도 없었고, 길게 보는 여유도 없었다. 당장의 효과가 떨어지는 게 보이니, 벌써 다른 곡으로 컴백을 준비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연장선에서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갤럭시즈에로 가는 지원을 끊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니, 갤럭시즈의 부활은 힘든 일이었다.
“단유야, 무슨 아이디어 없어?”
명수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명수도 단유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두 사람이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반칙 같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코 쓸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결코 쓸 수 없는, 반칙과도 같은, 힘을 가졌지만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재훈은 지금 오랜만에 연회장과 독대를 가지는 중이었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조찬에 오랜만에 함께 된 재훈은 피곤한 눈을 억지로 부릅떠가며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면접 준비로 한참 피곤한 시기임에도 갑자기 전날 연 회장의 호출을 받은 재훈은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젊은 놈이 영 먹지를 못하는구나.”
둘러 표현하는 연 회장의 말에 재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앞에 놓인 컵을 들었다. 시원한 목이 입 안을 헹구며 들어가자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요.”
“내 말 하지 않았더냐.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연 회장은 재훈이 영리병원 설립을 위해 남은 재산을 털어 넣으려 할 때 반대했다. 당시의 정권에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음 정권으로 바뀌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었다. 게다가 다음 정권이 야당 쪽으로 기우는 사회 분위기를 일찌감치 파악했던 연 회장은 그룹 전체의 전략 역시 잠시 몸을 숙이는 방향으로 잡았던 터였다. 하지만 재훈이 그답지 않게 고집을 세우는 바람에 연 회장이 소원 한 번 들어주는 셈 치고 병원설립을 도왔었던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요.”
“쯧.”
재훈은 애써 화제를 자신에게로 돌려,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느라 힘들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었다. 그 뜻을 읽은 연 회장이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재훈은 식사를 대충 마무리하고 할아버지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연 회장은 식사를 물린 뒤, 차를 주문했고, 우전 녹차가 단아한 향을 풍기며 앞에 놓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재훈은 빨리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고 싶었다. 연 회장은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물고 맛과 향기를 음미했다. 천천히 목을 타고 넘어가는 연한 차 향의 마지막까지 즐기다가 입을 열었다.
“의사 계속할 거냐?”
“네.”
연 회장은 녹차를 다시 들려다가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재훈아, 이 할애비도 이제 나잇살을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지 기력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재훈의 말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당장 아침에 문안인사를 드릴 때도 또렷한 초점과 형형한 눈빛을 보면,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호랑이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아니다. 이제는 다리 하나 들어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뭔가를 결정할 때도 겁이 많아져서 선뜻 결정하기가 힘이 든다. 다행히 너희 작은 아버지와 큰 형들이 도와줘서 기업에는 문제가 없다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게 어디 그것뿐이더냐.”
재훈은 할아버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있어 내가 지금은 짐을 많이 들 수 있었고,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여생을 즐기는 것 같구나.”
“아닐 겁니다, 할아버지. 아직 할아버지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녀석. 회사 일에 관심도 없는 녀석이 그리 말하니 믿기가 힘들구나. 아무튼 말이다, 요즘 이 할애비가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러다보니 적적하기도 하고 생각도 많아지더구나.”
연 회장은 재훈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니가 이랬겠구나 싶더구나. 적적하고 넘치는 시간, 할 일은 없으니 생각만 많아지고,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다른 식으로 시간을 보내려 했겠지.”
연 회장은 재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어린 시절 재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주변의 경계와 상황으로 인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때문에 밖으로 나돌게 되었고, 나돌다 못해 해외로 도망가기에까지 이르렀었다.
재훈은 입을 다물고 차 위에 떠오른 희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조그만 계열사 하나라도 맡는 게 어떻겠냐 했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하더구나.”
병원설립허가가 무산되고 나서의 일.
“난 그때, 니가 또 다른 일을 찾으려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의사 일을 계속하겠다고 했을 때, 너의 진심을 묻고 싶었다.”
“진심입니다. 지금도.”
“그래, 알겠다. 하긴 회장 손자라고 꼭 경영만 하란 법은 없으니.”
서열에 밀려난 손자가 무슨 경영입니까, 라는 말은 속에 묻었다.
“그렇다면 하나 묻자.”
“네.”
“니가 돌보는 그 아이들.”
재훈의 시선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예전에 물었다면, 당연히 변명할 말도 있었고, 훌륭한 핑곗거리도 있었다. 하지만 왜 지금 그걸 물을까? 여태 아무 말도 없으시다가?
“그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왜··· 왜 이제야 그걸 궁금해하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당시에는, 병원설립 허가권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다. 돈만 밝히는 사업주가 아니라, 불쌍한 고아를 돌볼 줄 아는 자애로운 의사의 이미지를 피력해서 허가 취득에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고.”
재훈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이제 병원은 물 건너가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지 않고 돌본다? 이해가 되지 않더구나.”
할아버지는, 연 회장은 여전히 호랑이와 같은 기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재계 서열 순위권에 드는 거대 기업을 세울 때 가졌던 통찰력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 그 아이와 관련돼서 몇 가지 일도 있었고 말이야.”
여전히 할아버지의 경계 안에서 관찰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묻는 거다. 의사도 하겠다고 그러고, 아이도 계속 돌보겠다고 하는 너의 생각을. 이제는 정말, 예전에 내가 알던 재훈과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야.”
재훈은 잔을 들려다가 손끝이 떨린다는 기분에 다시 손을 내렸다. 손만 내려간 게 아니라, 시선도 같이 내려갔다는 것을 재훈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재훈을 끝까지 관찰하는 연회장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