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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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태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박 이사는 얼른 표정을 고쳤다.
“왔구나. 어서 와라.”
박 이사는 푸근한 미소로 단유를 반기며 얼른 자리로 안내했다. 단유는 공손한 인사 뒤에 박 이사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자리했다.
“장 매니저는 잠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까?”
집에 가지 말란 소리구나. 태호는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문을 닫고 사무실을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태호에게 눈짓을 주었다.
“퇴근들 안 하세요?”
태호는 그들의 눈빛에 다른 말로 답변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좌불안석, 다리를 떨면서 자릴 지키고 있는데! 강 부장이 헛기침을 터뜨리며 박 이사님에 대해 물었다.
“지금 면담 중이신데, 별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제가 남을 텐데 다들 퇴근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강 부장은 빠르게 계산기를 눌렀고, 조금 덜컥거리는 계산기는 ‘가도 될걸?’이라는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다들 퇴근해.”
잠시 후, 사람들이 빠지고 텅 빈 사무실에 태호와 강 부장만 남았다. 강 부장 역시 곧 퇴근할 사람처럼 두꺼운 코트를 걸친 채 태호와 마주 섰다.
“장 매니저, 고생이 많다.”
활동 마감에 대한 격려일까, 성공적인 가디스R에 대한 치하일까.
“고맙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장 매니저, 이번에 진급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미 이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니 장 매니저의 급을 올려도 되지 않겠냐는, 내부 의견이 있었다는 강 부장의 이야기가 놀랍지는 않았다. 태호도 오랜 생활 끝에 얻은 ‘귀’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것과 지원팀 강 부장에게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진짜 진급하게 된다면 제가 강 부장님께 한턱 쏴야 겠습니다.”
“에이, 뭘 나한테 쏘나.”
“강 부장님이 평소에 저희를 많이 지원해주셨잖아요. 그 노고 덕에 제가 덕을 본 셈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나요.”
적절한 처세는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만든다. 특히 직장에서의 처세술은 그 이상의 부가 효과도 가져온다.
“이 사람, 괜찮아. 고생은 자기가 다했으면서. 특히 이번에 자네가 올린 마케팅 기획안 좋았어. 덕분에 이런 성과도 올리지 않았던가? 회사에서도 자네 공을 인정할 거야.”
능숙하게 공을 돌리는 강 부장의 말솜씨야말로 본을 받아야 하리라.
“박 이사님이 최근에 그 아이 영입에 열을 올리는 것 같은데, 자네가 친하니까 또 이렇게 가운데 껴서 고생이구먼. 그래도 만약 이번 일까지 잘 해내면 자네 입지도 튼튼해질 테니까 좀 더 고생하게.”
태호는 손사래를 치며 겸양을 떨려다가 문득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강 부장의 말에서 단순히 단유의 재능을 보고 계약을 맺으려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의 영입이 자신의 ‘입지’를 튼튼하게 한다, 는 표현은 아직까지 가능성만 보이는 단유를 두고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강 부장님. 김단유,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강 부장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아닐세. 다른 이유는 무슨. 워낙 뛰어난 아이다 보니 박 이사님이 욕심을 내는 거고, 그렇다는 거지.”
괜히 부장 노릇 하려다가 입방정을 떤 것은 아닌지 내심 후회를 하며 강 부장은 가방을 챙겨 몸을 돌렸다. 하지만 태호도 이대로 강 부장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뻔히 보이는 물음표를 앞에 두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단유의 일이 아닌가.
“무슨 일인데요? 말씀해 주세요.”
“응? 에이, 이 사람아. 일은 무슨.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갑자기 이렇게 달려들어? 혹시 내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나?”
발뺌하는 강 부장의 연기가 태호의 눈에 어색해 보였다.
“박 이사님이 단유를 데려오려 하는 이유, 따로 있는 겁니까?”
강 부장은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 했는데, 의외로 장태호의 힘이 억셌다. 역정이라도 내려 하는데, 태호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강 부장은 오늘 마가 낀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잘 무마할 수 있을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연습실로 내려간 수련은 불 꺼진 연습실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이 시간에 연습실이 불 꺼진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옆의 연습실로 갔더니, 마침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던 연습생 5명이 수련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남녀 연습생 5명이 동시에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인사를 했다. 고압적인 선배도 아닐진대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받은 적이 없던 수련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아, 안녕하세요.”
수련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연습생들에게 옆 연습실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오늘은 선배님들이 안 나오신 것 같던데요?”
“그래요?”
이상하다 여길 때, 다른 연습생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사실, 요즘 선배님들 잘 안 오시는 것 같아요.”
얼굴이 익은 여자 연습생의 말이었다.
“레슨도 안 받고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아까 배 실장님이 오셔서 나중에 남녀 따로 나눠서 연습실 쓰게 해주겠다고 이야기도 하시던데요.”
그 말에 수련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갤럭시즈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충 인사를 한 뒤, 연습실을 빠져나온 수련은 핸드폰을 열어보려다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멤버들에게 직접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지만, 회사 사람들, 특히 다른 팀을 맡고 있는 배 실장님에게 가서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간 수련은 배 실장님이 이미 퇴근하고 안 계시다는, 잔업으로 눈 밑이 검은 여자 직원의 말에 인사하고 사무실을 지나가다가 다른 사무실에 있는 태호의 모습을 목격했다.
‘이 시간에?’
아까 단유에게 간다고 들었는데, 왜 사무실에 있을까를 궁금해하며 다가가는데, 살짝 열린 유리 문틈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 이사님이 단유를 영입하려는 목적, 혹시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건가요?”
수련의 귀가 쫑긋거렸다.
“속셈이라니!”
표현이 거슬린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는 강 부장에게 태호는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단유, 쟤! 저한테 진짜 친동생 같은 아이라서 이러는 겁니다. 저 아시잖아요? 어지간하면 회사의 입장대로 일해왔고, 불평불만 잘 말 안 하고 다니는 거. 갤럭시즈 활동, 위에서 마음대로 자르고 일부러 멀리 있는 행사 위주로 잡으라고 할 때도 저 아무 말 없이 따라갔습니다. 그것도 갤럭시즈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 있어도 말 안 했습니다. 애들 고생하는 거, 제가 다 욕받이 해가며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저 아이, 진짜 그냥 보통의 아이 아닙니다.”
보통의 아이가 아니란 건 강 부장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 부장이 아는 ‘보통’과 태호의 ‘보통’이 다른 의미라는 것은 몰랐다.
“말씀해 주세요. 강 부장님.”
“보통이 아니란 걸 알면, 이미 다 아는 건데 뭘 그래.”
태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이질적인 느낌을 또 한 번 포착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명히 다른 포인트를 집어낼 수 있었다.
“강 부장님. 부장님이 아시는 단유, 어떤 아이입니까?”
강부장인 눈을 가늘게 뜨고 태호를 보다가, 뒤를 살폈다. 사원들이 사무실을 나가며 소등을 한 탓에, 강 부장의 자리만 흐릿한 형광등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연성 그룹.”
태호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어떻게라니? 자네만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했었나?”
태호는 몰랐었다. 단유가 갤럭시즈 뮤직비디오에 처음 출연하였을 때, 단유의 보호자 자격으로 주영을 만났고, 주영의 언급으로 눈치를 챘을 뿐이었다. 주영은 물론이고 단유 역시 그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꺼린다고 여겨 태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설마···.”
연성이라는 이름표가 단유의 가슴에 붙자, 박 이사의 유난스러운 영입 의지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호가 떠올린 시나리오는 박 이사만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연예계 전반에서 펼쳐지는 M&A,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링 위에서 펼쳐지는 무규칙 레슬링처럼, 시뻘건 눈으로 티켓을 들고 침을 튀기며 외치는 사람들의 무리 안에서 펼쳐지는 투견들의 싸움판처럼,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태호가 등을 돌리자, 이번에는 강 부장이 태호의 팔을 붙잡았다
“뭐하려고?”
“부장님, 이거 놓으십시오. 저,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정말 순수하게 단유의 미래를 위해, 물론 곁다리로 자신의 커리어와 성공을 함께 그려보긴 했으나, 진짜 순수하게 단유를 위해 영입을 시도하려 했던 태호는 이 일이 자칫하면 단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봐, 장 매니저. 진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해. 지금 자네, 뭔가 오해하는 게 있는 거 같아.”
“오해라뇨? 저도 이 바닥에 있을 만큼 있었고, 볼 만큼 봤습니다. 저게 무슨 뜻인지 모를 것 같습니까? 단유, 어떻게 연성과 연결된 걸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엮어서 들어오게 할 일은 아닙니다.”
“이봐, 이러니까 자네가 오해하는 거라고. 우리도 알아. 그 친구 재능 있는 거. 마스크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아직 변성기라서 앞으로 목소리가 어떻게 변할지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은 있지만, 지금 당장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거 잘 알아. 그런 점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투자금 목적으로 영입하는 거 같은가?”
“그래도 이건 아니죠. 아직 이쪽 업계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기도 하고, 연예계에 꿈을 가진 아이도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저 아이에게 뭐라고 했는데요? 꿈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된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제가 그 아이의 꿈을 돈에 팔아 먹은 것과 뭐가 다릅니까?”
강 부장이 잠시 태호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붙잡고 있던 태호를 놓았다.
“자네, 요즘 가디스R이 잘 나간다고 해서 뭔가 착각하나 본데.”
태호는 강 부장의 눈이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즐거운 미소가 아니라, 어딘지 비웃는 느낌이었다.
“꿈? 이 바닥에서 꿈을 찾아? 누가 꿈을 찾는단 말인가? 갤럭시즈가 꿈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가? 가디스R이 꿈을 꿔서 성공했던가? 꿈? 솔직하게 말해. 여기도 결국 자본과 경제가 판치는 시장이야. 핸드폰에 꿈을 담아 만드는 기업이 있다던가? 컴퓨터에 희망을 담아 만드는 기업이 있다던가?”
태호의 가슴이 바스락거리며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아이가 꿈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그럼 잘 된 거지. 헛된 꿈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현실에 눈을 뜨고 사는 게 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도울 테니까.”
그리고 사무실 입구, 유리로 된 문 옆에서 몸을 감추고 이야기를 듣던 수련은 이를 꽉 깨물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강 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현실, 을 이야기한 김에 말하는 건데, 갤럭시즈 애들, 계약해지 통보가 갈 거야.”
“네?”
“가망성이 없는 상품을 부여잡고 있는 건 미련한 짓이란 거 알잖아? 요즘 연습도 잘 안 한다며? 지들도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부장님!”
“장 매니저, 아니 장 실장. 지금부터가 중요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라고. 이제는 자네도 더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할 시기야. 가디스R의 성공이 그걸 도울 거고. 갤럭시즈는 자네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야. 그 아이들도 빨리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꿈? 망상과 꿈을 헷갈려 하면 안 되지 않겠어? 여기는 꿈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벽에 기댄 수련의 무릎에 힘이 풀려,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갤럭시즈의 해체. ‘현실’이라는 강 부장의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
“생각은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박 이사의 말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온 걸 보니, 어느 정도 결론은 난 거 같고. 그렇지?”
“네.”
박 이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한 부는 지금 여기서 확인하면 되고, 다른 한 부는 보호자에게 보내야 하는데, 내가 직접 보내서 확인하실 수 있게 해드리지. 복잡한 내용이긴 하지만, 어려운 건 아니야. 일단 계약금부터 보면,”
“박 이사님.”
단유의 부름에 박 이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왜?”
“여기 오기 전에 태호 형이랑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장 매니저, 이 어린놈이 또 무슨 얘기를 했을까? 혹시 쓸데없는 이야기로 아이를 흔들어 놓은 건 아니겠지?
“그런데?”
“박 이사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요?”
“···어떤? 뭐, 지원 방향이라든가 그런 거?”
“아뇨. 박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성공에 대해서요.”
“성공?”
“지난번에 박 이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박 이사님도 그렇게 언급하셨고, 태호 형이나 여기서 근무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대부분 ‘성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시더라고요. 성공하려면 여기 와야 한다. 너라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럼 그럼. 너라면 꼭 성공할 수 있지.”
재능과 재력을 겸비한 너라면 말이야.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서요. 박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성공.”
‘아, 고민이네.’
중학교 1학년, 이제 겨우 초등학교 졸업한 아이한테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질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듣기 좋게, 받아들이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높으신 분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은 익숙해도, 20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성공이라···.”
박 이사는 앞에 놓인 홍차를 들어 입을 적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