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324화 (324/956)

적자생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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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 그러니 순순히 받아들여라?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이지만, 과연 당사자도 그럴까요? 아시잖아요? 이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는지. 그런데 실패라는 한 현상을 단순히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로만 해석하려 하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상대를 쳐다보되 노려보듯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지금의 대화는 자기 뜻을 상대에게 알리기 위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어야지, 상대의 뜻을 꺾고 짓밟으려는 전투적인 대화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네 눈에 강해지려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노력이 우습게 보이더란 말이냐?”

물론 화자의 뜻이 청자에게 100% 순수하게 전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다른 환경, 다른 세월을 살면서 쌓아온 가치관과 생각의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당연히 단어 한마디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고, 간단한 문장도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 심지어 전혀 적대적이지 않으려 함에도 상대는 ‘건방진’ 것으로 읽고 화를 내는 중이었다.

“아니요. 저도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걸요. 하지만, 강해진다는 것의 기준이 ‘진화론적’ 해석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죠. 가령 제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돈도 벌지 못하고, 취업도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을 할게요. 그렇다면 저는 약한 건가요? 실패한 건가요?”

“늙어서까지도 돈 없이 살아보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거다. 이 사회에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돈 없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으냐? 돈 없이 이 사회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거 같으냐?”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노려보는 눈빛이 날카롭기만 했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요, 들어오세요.”

붉은색 계열의 치마를 입고, 검은색 스웨터를 걸친 하은이 붉은 입술을 늘어뜨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립스틱이 입꼬리를 살짝 벗어난 것처럼 보이고, 치마도 준비된 것이 아니었는지 아랫단에 가로로 주름이 가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태호는 이를 언급하는 대신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유랑 잠시 이야기 좀 하려고요.”

“저도 들어야 하나요?”

“어··· 일단 단유랑 둘이서만 대화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단유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하은을 바라보았고, 하은도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읽었다.

“그러세요.”

태호는 단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왜 왔는지는 잘 알 테니까, 용건만 간단히 이야기할게. 혹시 결정은 내렸어?”

“아뇨, 아직 못 내렸어요.”

하긴 보통 신중한 녀석이 아니니까. 태호는 머리를 긁다가 말을 꺼냈다.

“혹시 연예인이라는 직업, 아니 가수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

“노래를 부르는 직업이죠.”

간결한 설명에 태호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혹시 가수라는 직업에 대해 선망이 있는지, 연예인이라는 직종에 대해 사견을 물으시는 거라면, 솔직히 그런 건 없어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제가 노래를 잘한다는 이야기도 최근에야 들은 거니까요. 대중들 앞에 나서는 건, 글쎄요. 30명 안팎의 아이들 앞에 서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보다 수천 배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제 성향에 맞다고 볼 수는 없죠.”

단유의 부정적인 의견에 태호는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성공한 가수들을 보면 얼마나 멋있어? 자신들이 잘하는 노래로 대중들을 만족시켜 주고 위로해주고 그걸로 돈까지 벌 수 있잖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직업이라는 게 때로는 피곤하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고, 자부심도 느낄 수 있는 직업이라고 보거든.”

태호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솔직히 이런 말 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갤럭시즈의 경우를 봐서 성공하지 못한 가수들이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근처에서 본 경우라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겁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연예계의 전부는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벌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니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태호는 단유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하다 우연히 읽게 되었던 기사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직장인의 비애란 말 들어본 적 있어? 장시간 노동과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용돈이 부족해서 점심값도 줄이고, 원치 않는 저녁 회식에도 상사의 부름이라면 당장 달려가야 하는 실정이라는 말이 있대. 그분들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곳에서는 자신의 개성, 능력 등이 온전히 발현될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그에 반해서 이쪽은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마음껏 자신의 끼와 재능을 펼칠 수 있고, 여유가 된다면 자기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하잖아.”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태호의 말을 막았다.

“그 비유는 잘못된 것 같네요.”

“뭐?”

“직장인에 대한 거요. 저도 요즘은 인터넷을 하니까 그런 글들 종종 읽어요. 방금 말씀하신 것도 며칠 전 인터넷 신문사의 한 칼럼에서 읽은 기억이 나고요.”

“아, 그래.”

머쓱해 하는 태호에게 단유가 말했다.

“직장인의 비애가 단지 특정 회사나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고 봐요. 당장 형만 봐도, 형 역시 직장인이죠. 갤럭시즈 누나들도 엄밀히 따지면 직장인이죠. 해당 칼럼에서 통계를 낼 때는 기업에서 근무하는 샐러리맨을 대상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직장인’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직업을 가진 대부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봐요. 오로지 혼자 일을 하는 사람, 자영업자 같은 경우라도 ‘직장인’이죠. 자신의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 역시 말씀하신 바와 같은 비애를 겪고 있어요. 동네에서 고깃집 운영하는 사장님들만 봐도 그렇죠. 그분들에게 직장 다니시는 분들보다 편하냐고 물으면 아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실 걸요?”

태호는 단유가 생각보다 직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단유가 자신의 꿈을 정확히 확정 짓지 못해 미래에 대해, 혹은 직업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뿐이지 이미 초등학교 4학년 때 직업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아이였다. 단순한 관심도 아니고, 선망과 동경에 의해 관념적으로 직업관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어떤 직업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면밀히 살피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태호의 비유는 단유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긴 셈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이 짧았네.”

사과는 짧게. 그리고 다시 주제로.

“어쨌든 말이야, 연예계가 그런 직장인들 혹은 자영업자들에 비해 훨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좋은 직장이고, 성공했을 때의 보수가 다른 직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건 알겠지?”

말을 꺼내놓고 보니, 태호는 자신이 뱉은 말에 스스로 자신이 없어졌다. 잠깐의 고민 끝에 스스로 답을 내놓자면, 보통의 경우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과 꿈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꿈들이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단유에게 말할 때는, 계속 연예인이라는 ‘직업’으로 한정 짓고, 그 직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직업인가에 관해서만 설명이 집중되는 형편이었다.

‘속물.’

태호 스스로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태호의 목소리도 점점 죽어 들어갔다. 이를 단유가 의아하게 여기자, 태호가 피식 웃으며 손을 털었다.

“미안하다. 욕심이 앞섰는지, 아니면 내가 애초부터 생각을 잘 못 했던 건지 계속 너를 유혹하는 쪽으로만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유혹은 굉장히 유효한 설득 수단이죠. 그 점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 말에 태호는 속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혀야 했다. 이어지는 말이 없어 확신은 못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치 자신이 앞에서 떠들었던 그 모든 말들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형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금 정리되는 면도 있어요. 확실히 이런 건 대화를 해야 하나 봐요. 복잡하던 것들도 정리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면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막연하게 이야기한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시간에 오신 건, 아마 박 이사님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맞나요?”

태호는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단유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어?”

“형 성격상 아무리 급하다 한들 이 시간에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형은 자신의 마음이 급해도 일단은 상대를 먼저 생각하니까요. 반면에 박 이사님은 자신의 결정과 시간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타입이니까, 스케줄 마치고 돌아가는 형을 저한테 보내실 정도라고 본 거고요.”

확실히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단유를 보통의 아이들처럼 상대하려다가는 큰코다칠 게 뻔했다. 박 이사 코가 크던가?

“가요. 이왕 생각난 김에 저도 확실히 정리해야 마음이 편하겠네요.”

“어딜 가?”

“회사로요. 박 이사님, 아직 형 기다리고 계실 걸요?”

시계가 8시를 향해 가고 있지만,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거라는 단유의 말처럼 박 이사는 책상을 두들기면서 속을 태우는 중이리라.

“선생님, 저 잠깐 갔다 올게요.”

“밖에 춥던데, 목도리하고 가.”

“아, 그럴게요.”

회색 그라데이션 무늬의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단유는 태호와 함께 집을 나섰다.

****

중간에 태호가 내리고 수련과 나윤만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10시까지 올게.”

“네, 오빠. 조심해서 들어가요.”

로드매니저 현철이 손을 살짝 들어 보인 후, 곧 골목 끝으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사이 숙소 문을 열고 들어온 수련과 나윤은 휑한 거실과 맞닥뜨렸다.

“언니, 저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차에서 잠깐의 수면을 가진 정도로는 몸에 누적된 피로를 풀기에 역부족이었던 모양인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방으로 사라지는 나윤이었다. 나윤이 문을 열었을 때, 그 잠깐의 틈으로 들여다본 방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예영아.’

수련은 보이지 않는 막내의 이름을 속으로 한 번 되뇌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같은 방 멤버인 명지도 역시 자리에 없었다. 시간은 7시를 넘어가고 있으니 어쩌면 이 시간에도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으리라.

‘명지 언니.’

차마 언니들 방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기척도 없는 숙소의 분위기 상 두 사람 역시 집에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시간에 숙소로 들어온 게 오랜만이라서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숙소라는 게, 시각적으로도 휑한 느낌이지만 감정적으로도 뭔가 보이지 않는 칼들이 쑥쑥 날아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조용하고 차가운 숙소의 공기만큼이나 벌어진 간격이 느껴졌다. 비록 수련이 가디스R의 활동으로 성공의 맛을 보았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여전히 ‘갤럭시즈’의 넷째이자 메인보컬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하는데, 왜 이런 거리감이 느껴져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선 씻으면서 리프레쉬라도 해야겠다.’

위에 걸친 것들을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간 수련은 부딪치는 물살에 몸을 떨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흔들리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가디스R은 프로젝트 그룹. 자신은 갤럭시즈. 3년 이상 동고동락하며 성공을 향해 달려왔던 멤버들.

‘잊지 말자. 잊지 말자.’

설령 다른 사람들이 흔들리더라도, 자신만은 흔들리지 말고 잊지 말자고 되뇌었다.

젖은 머리를 하고 나온 수련은 머리를 말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캡 모자를 집어 들고나온 수련은 나윤이 깊은 잠에 들어 나직하게 코를 고는 모습을 확인한 후, 숙소를 나섰다.

덜 마른 머리 위에 모자의 챙을 깊이 눌러 쓰며, 수련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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